초계변씨와 장흥과의 관련은 조선 단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변효경(卞孝敬 10세, ?~1456)으로부터 시작된다. 公은 조선 태조 때 한성윤(漢城尹)을 지낸 변남룡과 정부인 충주지씨, 정부인 파주염씨 사이에서 일곱 형제 중, 여섯째로 충청도 직산현(지금의 충남 천안시 직산) 태생으로 생년은 미상이다. 1414년(甲午 태종14) 식년 생원시 3등 44위로 입격하고 1419년(己亥 세종1) 증광시 동진사 12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그 후 1440년 승문원지사를 거쳐 1443년 봉칙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1445년 사간원 사간을 지내고
■ 이민기(李敏琦 인천人 27세, 1646년~1704) 선생 : 자는 경징(景徵), 호는 만수재(晩守齋)이다. 父 이원욱(李元郁)이 일찍 별세하여 母 순창조씨의 가르침 속에 자랐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나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학문을 수학하였으며, 1679년 장흥에 유배 온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에게 를 배웠다. 1681년(숙종 7)에 식년시 생원(生員)에 입격하였다. 민정중이 유배가 풀려 한양으로 올라간 후 선생을 추천 및 과거 보기를 권유했지만 불응하고 용두산 아래 만수동에서 은거하면서 학문에
1. 묘역(墓域)장흥군 장동면 하산리 산 60-2번지 연하동(烟霞洞) 제암산 자락에는 강릉유씨 참의공종중 파조(派祖) 예조참의(禮曹參議) 7세 유용순(劉用恂) 등 이하의 후손 9기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정확한 위치는 목포시와 순천시를 잇는 녹색로(고속화도로), 장흥에서 순천방향의 장흥군 장동면 하산리 구간 도로 인근에 위치하여 "江陵劉氏 參議公宗中世葬山" 표석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1) 통정대부 예조참의 유용순(7세 1421~1482)과 配 숙부인 하양허씨 묘소2)
1. 연혁 본 사우는 1935년(乙亥) 향중유론(鄕中儒論)에 의해 청강(淸江) 김세좌, 석청(石靑) 김희련, 송천(松川) 김응규, 오우당(五友堂) 김응원, 열사(烈士) 김유길 선생 등 경주김씨 5位 선조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고자 후손 삼우당(三友堂) 김병용(61세 1889~1947) 주도로 장흥군 군장로 700-11 평장리 김안마을 박산(博山) 아래에 설단하고 단향(壇享)으로 제향하였다. 이후 1974년(甲寅) 3월 장흥유생 의산(義山) 안홍천(죽산人 1895~1994)의 협력과 후손 김성옥(62세 1907~1981), 김덕선(62
■노홍(함평人 16세 1561~1619) : 자는 여신(汝信), 시호는 충렬(忠烈), 호는 관암(冠巖)이다. 시조는 노목(魯穆)으로 고려 인종 때 삼가현감(三嘉縣監)이 되어 이자겸(李資謙)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함풍군(咸豊君)에 봉작되고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父母는 군자감정 노평국(魯平國) 전주이씨, 祖父母는 노우명(魯友明) 광산김씨, 曾祖父母는 노형(魯衡) 옥천조씨이다.公은 순천 주암 갈마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용모는 엄정하고 기골이 장대하며 지략과 병법에 뛰어나 무용절인(武勇
2. 강진군 내 소장 현황 19), 20) 이필재는 강진군 군동면 평덕길 22-25 평덕마을에 위치한다. 장흥위씨 직장공파종중 소유로 입향조 직장(直長) 위대방(21세 1550~1617) 등 156위 위패가 봉안된 이필재(二必齋) 제실에 액호 1점과 상량문 축시 1점이 소장되어 있다. 이곳은 1954(甲午)년 종중 후손들의 참여로 이축하였다. 매년 11월 둘째주 일요일 직장(直長) 위대방 등 이하의 선조 156위 합제를 봉행하다. 21) 명문은 쌍덕리 평덕길
편액(扁額)이란 일상에서 널빤지나 종이·비단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문 위나 건물 전면 처마 아래 등 일정한 장소에 거는 액자를 말하며 흔히 현판(懸板)으로 통칭되고 있다. 경북 대구 거주자 극암 이기윤 선생은 1943년~1950년 7년간 전남 강진군 칠량면 송산리에 정착 거주하면서 여러 사우(祠宇)에 편액을 남겼다. 특히 서체(書體)는 무게감이 있고 웅장하면서 부드러움이 느껴져 편액 글씨의 진수(珍秀)라 할 수 있다. 선생이 쓴 편액은 장흥읍 평화리 장흥위씨 도문중 소유 회주사(懷州祠)의 강당 백산재(栢山齋) 액호 등 장흥·
4. 강당(講堂) 서원 강당은 4칸 팔작집으로 1698년(戊寅) 창건되어 1798년(戊午)과 1861년(辛酉) 중수를 거쳤다. 이후 1904년(甲辰) 중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서원 내 중앙에 위치하고 신실과 마주보는 동향으로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으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액호 연곡강당(淵谷講堂)은 1904년 중건하면서 둔촌 민유중의 9대손 시남(詩南) 민병석(閔丙奭 30세 1858~1940)이 써 걸었다. 강당에는 16점의 편액이 소장되어 있
서원(書院)은 조선중기 때 석학(碩學)이나 충절(忠節)의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講論)하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사설 교육기관을 말한다.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 46번지에는 영조대왕이 사액(賜額)한 연곡서원(淵谷書院)이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1675년(숙종1) 남인들이 집권하자 서인을 배척하여 1679년 장흥으로 귀양 온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 유생들에게 강학하여 교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1698년(숙종 24) 노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향론이 제발하여
호남5대 명산이자 남도의 영산(靈山)인 천관산(723m), 장천재 풍호대(風乎臺)는 묘각에서 동쪽 방향으로 300여미터 가다보면 청룡등(嶝) 국유림과 경계한 장흥위씨 장천문중 임야(林野) 내 위치한다. 이 정자(亭子)는 원래 1780년(庚子) 원취당(願醉堂) 위도순(魏道純) 선생이 지었던 정자다. 풍평대(風平臺)라고도 불렀으며, 유치면 단산리 태생 복재(復齋) 위계민(1855~1923) 선생의 복재집(復齋集)에 시문이 있다. 정자는 사라지고 없던 것을 2006년(丙戌) 전라남도(장흥군)에서 2층
호남5대 명산이자 남도의 영산(靈山) 천관산(天冠山 723m) 영은동천(靈隱洞天), 장천동(長川洞) 계곡에는 실학자 존재(存齋) 위백규(1727~1798) 선생이 명명(命名)한 장천팔경 등 비경(秘境)이 곳곳에 위치한다. 선생께서는 연령 25세 때부터 벽촌(僻村) 장흥 천관산 아래 방촌리에서 충남 예산 가야산 아래 옥계리를 수회 오가면서 스승 병계(屛溪) 윤봉구 선생(1683~1767)의 학문을 수학하였다. 이 과정에서 병계 선생이 가야산 자락 덕산천 계곡에 명명한 비경 가야구곡(伽倻九谷)과 유사한 형태의 암각문(岩刻文)을 남겨 신
남도의 영산(靈山) 천관산(해발 723m) 영은동천(靈隱洞天) 기슭,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산 92번지에는 장흥위씨 장천문중의 소유 장천재(長川齋)가 자리하고 있다. 승문원습독 위유형(18세 ~?)의 배(配) 의인(宜人) 평산申氏의 묘각이다. 웅천현감 위정렬(22세 1580 ~1656)이 타계하자 효자 동식(23세 1640~1708), 동헌(1645~1706) 형제가 초가삼간을 지어 3년간 시묘(侍墓)하시다 상(喪)을 마친 후 문중에서 주변 영은암(靈隱庵)의 승사(僧舍)를 철거하고 구조와 규모를
3. 강당은 5칸 팔작집으로 2003년 8월 25일 상량 신축하였다. 이곳에는 15개의 편액이 소장되어 있다. ①江城書院講堂重建有司錄은 1905년 9월 기록하였다. ②江城院講堂重建上梁文은 1906년 늦봄 후손 正三品 通政大夫中樞院 議官 桂泰(1875~1955) 再拜 근지(謹識)하다. ③江城院讚詩는 1906년 9월 진성인 響山 이만도(1842~1910) 근고(謹稿)하다. ④江城院址壇所事蹟은 1916년 가을 불초손 正三品 通政大夫中樞院 議官 桂泰(1875~195
본 서원은 삼우당(三憂堂) 문익점 선생과 풍암(楓菴) 문위세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옛 이름은 月川祠(楓菴書院)라 하였다. 원래는 임진왜란 때 창의한 문위세의 공덕을 흠모하여 전라도 유생들이 1644년(인조 22)에 옛 풍암서당에 제단을 설단하고 월천사 또는 풍암서원이라 하고 향사 봉행과 청소년을 교육한 것에서 비롯한다. 이후 1700년(숙종 26) 춘절에 문위세의 현손 天斗가 고조의 행장을 작성하고 스승 갈암 선생이 北關(지금의 함경도)에 유배되시고 다시 晞陽(지금의 광양시)의 이배지에서 사면되어 진양의 청원리(지금의 진주시 지
1. 고향 관산읍 방촌마을의 별신제(別神祭)와 매귀(埋鬼)는 400여 년 前부터 행해진 마을의 안녕(安寧)과 주민들의 단합(團合)을 기원하는 정월 대보름날의 전통풍속행사이다. 별신제(別神祭)는 여타 마을의 동제(洞祭), 당제(堂祭) 등과 토속적(土俗的) 의미는 비슷하나 절차는 양반 유교적(儒敎的)으로 다른 마을과 구별된다. 방촌마을에서는 농악이라고 하지 않고 액운(厄運)을 땅에 묻는다 하여 “매귀(埋鬼)”라고 하며 방촌마을만의 독특한 리듬이 전해 지고 있는 등 전통적 가치가 있어 앞으로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매년 대동계(大同契)
학교에서 중국에 갈 수 있는 좋은기회가 생겨서 가게 되었다.처음가는 해외여서 그런지 무척 떨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심 기대가 되었다. 오랜시간 버스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나니 중국에 도착해 있었다.중국에 가니까 내가 온통 모르는 중국어들이 적혀있어 걱정스럽고 막막했지만 중국의 문화를 체험하러 가는거니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가이드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처음 향한곳은 798예술의 거리였다. 그곳에는 벽화도 많고 풍경도 너무 좋아서 천천히 길을 걸으며 사진찍기 너무 좋았다.그 다음으로는 북경 서커스 공연장에 갔다. 그곳에서는 신기한
장흥신문사에서 좋은 기회를 주셔서 중국역사탐방을 하게 되었다.중국을 가기전 버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친구와 함께여서 인지 새로웠다. 중국에서의 첫날에는 798예술거리와 왕부정거리를 갔다가 북경 서커스를 보러 가게 되었다.798예술거리는 원래는 공장지대였던 거리지만 예술가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798예술거리가 만들어 졌다고 한다. 공장이 예술이랑 어울려 신기한 곳이였다. 벽에는 특이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고 조각상도 많이 있었다.나는 그중에서 공룡 조각상이 마음에 들었고 카페에서 음료를 먹었는데 생각보다 가격이 있었다. 다 둘러보고
[1일차] 2020년 1월 9일 늦은 시간, 나는 무거운 짐을 끌고 집 밖을 나섰다. 비행기 타는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외국 가는 것은 처음인 나에게 이라는 기회가 찾아왔다.저녁 11시쯤 장흥에 도착해 부모님과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출발하고 몇 시간이 지났을까, 새벽 3시쯤 인천에 있는 식당에 도착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지금 내가 먹고 있는 게 밥인지 국인지 알지도 못한 채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먹는 밥이라 생각하고, 배는 안 고프지만 먹었던 것 같다.인천 공항에 도착하고 비행기 시간이 많
서원(書院)은 조선중기 때 석학(碩學)이나 충절(忠節)의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講論)하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사설 교육기관을 말한다. 본 서원은 1519년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등의 사림세력이 몰락한 기묘사화의 여파로 일어났던 신사무옥(辛巳誣獄) 사건으로 17년간 장흥에 유배되어 민풍 순화에 영향을 미친 영천(靈川) 신 잠(申 潛)과 정암(靜庵)의 문인 월봉(月峯) 김광원(金光遠), 장흥 성리학의 선구자인 천방(天放) 유호인(劉好仁) 등의 학덕을 기리고자 향론이 제발하였다. 1612(壬子)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