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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면 조양리 남평문씨 강성서원(江城書院) <1>문화탐방/栢江 위성록 이야기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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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2.13  09:3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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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본 서원은 삼우당(三憂堂) 문익점 선생과 풍암(楓菴) 문위세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옛 이름은 月川祠(楓菴書院)라 하였다. 원래는 임진왜란 때 창의한 문위세의 공덕을 흠모하여 전라도 유생들이 1644년(인조 22)에 옛 풍암서당에 제단을 설단하고 월천사 또는 풍암서원이라 하고 향사 봉행과 청소년을 교육한 것에서 비롯한다. 이후 1700년(숙종 26) 춘절에 문위세의 현손 天斗가 고조의 행장을 작성하고 스승 갈암 선생이 北關(지금의 함경도)에 유배되시고 다시 晞陽(지금의 광양시)의 이배지에서 사면되어 진양의 청원리(지금의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에 우거하신 곳을 천리 길을 멀다 여기지 않고 달려가 배알하고 고조의 묘갈명의 찬술(撰述)을 부탁하였다. 이조판서를 지낸 갈암(葛庵) 이현일(1627~1704) 선생이 문위세의 묘갈명을 찬(撰)하였다. 그 비문으로 신도비를 늑룡마을 입구에 세웠다. 그러나 당시에 세운 신도비는 남인들의 정치적 몰락과 연관되어 매몰되는 파란을 겪었다. 2년 후에 태학의 유생들과 영호남의 유생 수백명이 天斗 등 후손들과 풍암 선생의 덕행을 누소하였다. 1702년(숙종 28) 사우를 건립하고 사우로서 절차와 규모를 새로 마련하고, 1734년(영조 10) 三憂堂 文益漸 선생을 주벽으로 추배하여 함께 모시고 매년 향사하였다. 또한 1785년(정조 9) 전라도 유생 金相樞와 후손 就光, 史漢 등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유생 600여명이 兩賢의 공덕을 흠모하여 사액할 것을 請하는 청액소를 수회 올렸다. 이에 조정으로부터 예조좌랑 정계충(진양人)을 예관으로 치제하게 하고 "江城"이라는 액호를 하사하였다. 이에 예성 집사관으로 禮官 예조좌랑 정계충(진양人), 大祝 경양찰방 문찬규(남평人), 贊者 능주목사 임충원(나주人), 謁者 장흥부사 이 심(덕수人), 齋郞 보성군수 이적오(전주人), 祝史 화순현감 임성운(평택人)을 예관으로 분정하고 致祭하였다. 초대 강성서원 원장에 병조판서 번암(樊巖) 채제공(1720~1799)을 추대하였다. 1798년(戊午) 채제공 선생이 문위세의 행장을 찬(撰)하였다. 1799년(己未 정조 23) 8월 유생 任五源 등의 3道 유생들이 상소하여 풍암 선생에게 병조참판의 증직이 내려지면서 不遷之位로 사당에 영구하게 제사를 모시도록 不祧廟를 허락하였다. 오늘의 강성서원의 액호를 받기까지 141년간 월천사에서 향사하였다. 1821년 이조판서 黃景源(1709~1787)이 찬(撰)하고, 柳運濟가 쓴(書) 문위세의 개수한 신도비가 강성서원에 세워져 현재까지 보존해 오고 있다. 1868년(고종 5) 훼철되고 제토전답이 養士齋에 귀속되었다. 1894년(고종 31) 후손 貞源, 郁浩 등에 의해 설단하고 귀속된 전답 일부인 답 7두락을 환속받고 향사하였다. 1905년(乙巳) 강당을 중건하였다. 1929(己巳)년 신실 숭덕사를 중건하였다. 1977년(丁巳) 강당을 중수하였다.
본 서원의 위치는 장흥군 유치면 늑룡리 655번지이었는데 장흥댐의 건설로 수몰 예정지역으로 편입되어 부득이 이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남평문씨 풍암공파종중회에서는 종중 총회 결의로 "강성서원보존위원회"를 조직하여 이건 준비를 시작하였다. 전라남도와 장흥군 등 협조 하에 강성서원 이건공사를 5년여의 기간에 걸쳐 완공하였다. 이건 부지를 장흥군 유치면 조양리 677-5번지로 확정하고 2003년 4월 25일~2004년 4월 30일까지 이건공사를 일부 완공하여 兩位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향사는 매년 3월과 9월에 향사해오다 최근 음 9월 9일 중양절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이후 2004년 풍암 선생의 제각과 종택을 중건하였다. 보존위원회에서는 부조묘를 신축하기로 하고 2007년 11월 착공하여 2008년 준공 및 기타 부대공사 등을 완공하였다. 2010년 8월 3일 강성서원종합안내도와 안내문, 설명판을 설치하고 풍암선생의 신도비를 보수하였다. 2015년 풍암선생의 유허비를, 2017년 헌성비를 후손들의 헌성금으로 건립하였다.<재단법인강성서원보존위원회>

서원(書院)은 조선중기 이후 석학(碩學)이나 충절(忠節)의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講論)하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사설 교육기관을 말한다. 장흥군 내에는 임금이 액호을 명명하고 하사한 연곡서원(1726년), 강성서원(1785년), 충렬서원(1786년) 등 영예스런 3곳의 사액(賜額)서원이 위치하고 있다. 이중 유치면 조양리 677-5번지(유치로 70)에 위치한 강성서원을 소개하고자 한다.

   
   
 

본 서원은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0호로 지정되었다. 규모는 대지 2,158평에 신실 숭덕사 1동, 강당 1동, 전사청 1동, 내삼문 1동, 외삼문 1동, 협문 5동, 화장실 2동, 협문 1동, 신도비, 유허비, 방화시설, 주차장 등으로 조성되었다. 별도로 좌측에는 풍암 선생의 제각 영모재(永慕齋)와 종택(14대 종손 문석주, 1964년생), 부조묘(不祧廟)가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규모와 구조는 장흥 유림의 산실 장흥향교와 견줄만하여 주요 건물을 살펴본다.

1. 숭덕사(崇德祠) 내 배향 인물과 내용
■ 三憂堂 문익점(남평人 10세, 1331~1400) 선생 : 字는 일신(日新), 號는 삼우당(三憂堂), 초명은 익첨(益瞻)이다.

   
 

진주(晉州) 강성현(江城縣, 지금의 경남 산청) 출신으로 아버지 문숙선(文淑宣)은 과거 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하지는 않았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으로 임명되었으며, 성균관(成均館)의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1363년(공민왕 12)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육품(從六品) 벼슬인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
특히 사간원 좌정언(司諫院左正言)으로 있을 때 서장관이 되어 계품사(啓禀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때마침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고려 사람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와 있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실제로 원나라는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하였고, 최유는 원나라의 군사 1만 명을 얻어 요동(遼東)까지 진군해 왔으나 1364년 1월 최영(崔瑩) 등에게 패하였다.
정치적 격동기에 원나라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은 덕흥군이 패배하자 1366년 2월 고려로 귀국하였다. 公은 귀국할 때 목화 씨앗을 붓대 속에 감추어 들어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시험 재배에 성공하여 우리나라에 목화가 전해져 衣생활 변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公은 곧 전의주부(典儀主簿)가 되었다. 창왕 때는 좌사의(左司議)로 왕 앞에서 강론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준(李遵) 등이 사전(私田)을 다시 세우도록 함은 옳지 않다고 상소한 바 있는데 公은 병을 핑계로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1389년(공양왕1) 문익점은 이색(李穡), 이림(李琳), 우현보(禹玄寶) 등과 더불어 사전 혁파를 비롯한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귀향하였다. 公은 사후 조선 태종 때 참지정부사(參知政府事) 강성군(江城君)에 추증(追贈)되고, 1440년(세종 22)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고향 경남 산청군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전남 장흥군 강성서원(江城書院)에 배향되었다.

■ 楓菴 문위세(남평人 19세, 1534~1600) 선생 : 字는 숙장(叔章), 號는 풍암(楓庵)이다.

   
 

三憂堂 문익점의 9대손으로 유희춘(柳希春),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7년(명종22) 정묘(丁卯) 식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당대 月川 조목, 艮齋 이덕홍, 西崖 류성룡, 鶴峯 김성일, 栗谷 이이, 寒岡 정구, 高峯 기대승 선생 등과 도의교(道義交)를 맺고 학연에 전념하니 학덕이 날로 높아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박광전(朴光前) 임계영(任啓英) 선생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미 조달 등의 큰 功을 세워 1595년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임명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읍민을 동원,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많은 왜적을 무찔렀다. 1600년 파주목사(坡州牧使)에 임명되나, 신병(身病)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67세에 타계하였다.

   
 

묘소는 유치면 늑룡리 산 32-8번지 墳山嶝이다.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고 장흥군 강성서원(江城書院)에 배향되었다.

   
 

숭덕사(崇德祠)는 3칸 맞배집으로 三憂堂 문익점 선생과 楓菴 문위세 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고 陰 9월 9일 중양절에 향사를 봉행한다. 2003년 5월 16일 상량 신축하였으며, 사당 숭덕사 액호 글쓴이는 알 수 없다.

   
 

①江城書院崇德祠移建上樑文은 2003년 여름 후학 풍산人 류영하(1925~2014, 서애 류성룡 선생의 14대 종손) 근찬(謹撰)하다.

   
 

②江城書院重建上樑文은 2003년 8월 진성人 이동은(1909~2010, 퇴계 이 황 선생의 15대 종손) 근찬(謹撰), 인천人 春史 이영숙(1932년생, 용산면 접정 거주) 근서(謹書)하다.

2. 내삼문은 존현문(尊賢門)으로 2004년 1월(孟春) 綠洋 박경래(1946년생, 장평면 녹양리 태생) 고문연구원장 근서(謹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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