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書院)은 조선중기 때 석학(碩學)이나 충절(忠節)의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講論)하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사설 교육기관을 말한다. 본 서원은 1519년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등의 사림세력이 몰락한 기묘사화의 여파로 일어났던 신사무옥(辛巳誣獄) 사건으로 17년간 장흥에 유배되어 민풍 순화에 영향을 미친 영천(靈川) 신 잠(申 潛)과 정암(靜庵)의 문인 월봉(月峯) 김광원(金光遠), 장흥 성리학의 선구자인 천방(天放) 유호인(劉好仁) 등의 학덕을 기리고자 향론이 제발하였다. 1612(壬子)년 정명열(丁鳴說), 이 승(李 昇), 선세기(宣世紀), 위정훈(魏廷勳), 김여규(金汝珪) 등이 주도하고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 축문을 지어 지금의 장흥읍 예양리 83-1번지에 창건하여 장흥지역 서원의 효시가 된다. 이후 1681(辛酉) 서원을 중수하면서 목은(牧隱) 이 색(李 穡),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을 추배하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고유문을 따랐다. 연대순에 따라 이 색, 남효온, 신 잠, 김광원, 유호인 등 5인을 연벽으로 모시고 향사해오다가 1869년(己巳) 서원이 훼철되어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1927년(丁卯) 강당을 중건하고 단(壇)으로 복설(復設)하였다. 1975년(乙卯) 신실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매년 음 9월 9일 지역유림의 주관으로 향사한다. 배향된 인물들의 행장을 살펴본다.

■ 이 색(李 穡 한산人 7세, 1328~1396) 선생 :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이다. 이제현(李齊賢)의 문하생으로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1341년 진사에 입격하고 1348년(충목왕 4) 원(元)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했다. 1351년(충정왕 3) 부친상으로 귀국하여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개혁, 국방강화, 교육진흥, 불교 억제 등 당면정책을 왕에게 건의했다. 1353년 을과(乙科) 1위로 장원 급제하고, 135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회시(會試)에 장원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 등을 지내다가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원나라의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1356년 귀국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 등 인사행정을 주관 정방(政房)을 폐지하였고 이듬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때는 3년상(三年喪)을 제도화했다.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의 남행(南幸)을 호종하고 일등공신이 된 후 좌승선(左承宣)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자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책봉된 후에는 신병으로 관직을 사퇴했으나 1375년 우왕의 청으로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했다. 1377년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鐵嶺衛) 사건에는 화평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이성계가 득세하자 장단(長湍), 함창(咸昌) 등지에 유배되었다. 1391년(공양왕 3)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책봉되었으나 다시 여흥(驪興) 등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조선 개국 후 인재를 아낀 태조가 1395년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사양하고 이듬해 여흥(驪興)으로 가던 중 타계했다. 문하에서 권근(權近 1352~1409), 변계량(卞季良 1369~1430) 등을 배출하여 조선 전기 성리학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 남효온(南孝溫 의령人 10세, 1454~1492) 선생 :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 행우(杏雨), 최락당(最樂堂), 벽사(碧沙)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영의정 남 재(南 在)의 5대손으로 父는 생원 남 전(南 恮)이며, 母는 도사 이 곡(李 谷)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며, 인물됨이 영욕을 초탈하고 지향이 고상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다. 주계정(朱溪正), 이심원(李深源), 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를 맺었다. 1478년(성종 9)성종이 자연 재난으로 여러 신하들에게 직언을 구하자, 25세의 나이로 문종의 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 등 장문의 소(疏)를 올렸다. 소릉 복위는 세조 즉위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명분을 직접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매우 모험적인 제안이었다. 이 때문에 훈구파의 심한 반발을 사서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등이 국문할 것을 주장했다. 이로 인하여 조정 대신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고 세상 사람들도 미친 선비로 지목하였다. 1480년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나 그 뒤 다시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당시는 세조를 옹립한 정난공신들이 집권하고 있어 소릉 복위 주장은 용납되지 않았고, 다른 명목으로 박해하려 하였다. 그 뒤 벼슬을 단념하고 세상을 흘겨보면서 가끔 바른말과 과격한 의론으로써 당시의 금기에 저촉하는 일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때로는 무악(毋岳)에 올라가 통곡하기도 하고 남포(南浦)에서 낚시질을 하기도 하였다. 산수를 좋아하여 국내의 명승지에 발자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당시의 금기에 속한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 개(李 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 6인이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실을 <六臣傳>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타계 후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고담궤설(高談詭說)로써 시국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그 아들을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때에는 소릉 복위를 상소한 것을 난신(亂臣)의 예로 규정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였다. 1511년(중종 6) 성 현(成 俔), 유효인(兪孝仁), 김시습(金時習) 등의 문집과 함께 비로소 간행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1513년 소릉 복위가 실현되자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1782년(정조 6)에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세상에서는 원 호(元 昊), 이맹전(李孟專), 김시습, 조 려(趙 旅), 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 고양시 문봉서원(文峰書院), 장흥군 예양서원(汭陽書院), 함안군 서산서원(西山書院), 영월군 창절사(彰節祠), 의령군 향사(鄕祠)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추강집(秋江集)>, <추강냉화(秋江冷話)>,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귀신론(鬼神論)> 등이 있다.

신 잠(申 潛 고령人 11세, 1491~1554) 선생 :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이다.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이며, 신종호(申從護)의 아들이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으나, 같은 해에 기묘사화로 인하여 파방되었다. 1521년 신사무옥 때 안처겸(安處謙 1486~1521) 사건에 연루되어 장흥(長興)으로 17년간 귀양 갔다가 다시 양주(楊州)로 이배된 후에 풀려났다. 그 뒤 20여 년간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에만 몰두하다가, 인종 때에 다시 복직되어 태인과 간성의 목사를 역임하고 상주목사로 재임 중 타계하였다. <병진정사록>에 의하면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하여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고 하였으며,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특히 묵죽(墨竹)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연려실기술>에는 묵죽과 더불어 포도그림도 잘 그렸다고 하였다. 현재 선생의 진작(眞作)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 작품은 남아 있지 않으나, 국립중앙박물관의 <심매도(尋梅圖)>와 <화조도>가 선생의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다.

김광원(金光遠 영광人 6세, 1478~1550) 선생 : 자는 언명(彦明), 호는 월봉(月峯), 평강현감 김경의(金敬義)의 증손으로 祖는 이조참판 김 필(金  潷), 父는 헌납 김 괴(金 塊)이며, 母는 참의 우효신(禹孝新)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조광조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1519년(중종 14) 생원·진사 양시에 입격하였으나 이해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화를 당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고향인 장흥(長興)으로 돌아왔다. 그 뒤 1521년(중종 16) 이문습독관(吏文習讀官)으로 있으면서 안처겸(安處謙 1486~1521)의 옥사에 연루되어 해남(海南)에 유배되었다. 당시 기묘사화로 조정은 사람들을 몰아내고 오로지 남 곤(南 袞 1471~1527), 심 정(沈 貞 1471~1531) 등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안처겸은 시산부정(詩山副正) 정 숙(鄭 潚), 권 전(權磌 1490~1521) 등과 함께 간신들을 제거하여 국세를 바로잡아 볼 것을 논의하였다. 이때 송사련(宋祀連 1496~1575) 등이 이를 듣고 밀고하여 일은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송사련의 밀고 문서에 습독관 김광원도 들어 있었으나 당시 조광조를 구하려하였던 정광필(鄭光弼)의 구원으로 해남에 유배되는 것으로 그쳤다. 그 뒤 1533년 유배에서 풀려나 벼슬을 그만두고 장흥으로 돌아와 후진교육에 힘썼다. 묘소는 부산면 내안리 옆 당곡등 이다. 사후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장흥의 예양서원(汭陽書院)에 배향되었다.

유호인(강릉人 11세, 1502~1584) 선생 : 자는 극기(克己), 호는 천방(天放)이다. 父는 참봉 유선보(劉善寶), 母는 낙안김씨로 지금의 장흥읍 건산리 태생이다.
어려서 천품이 순수하고 용모가 크고 훌륭하며 부모 섬김에 극진하였다. 나이 七, 八세적에 여름 더위에 어버이가 누워 계실때 부채질하여 드리고 밖에 나갔다가 과일을 얻으면 가지고 돌아와서 어버이에게 드리는 정성이 천성적이여서 이웃 사람들이 효동(孝童)이라 지칭하였다. 1534년(甲午 중종29) 식년시 진사에 입격하였다. 退溪 이 황, 南冥 조 식 등 거물급 석학들과 교유하였다. 70세 무렵 34세 연하인 栗谷 이 이 선생을 찾아가 문인 되기를 자처하고 학문 탐구에 전념하여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통달했고, 문장(文章)에 뛰어났으며, 학문에 열중하여 후진 양성에 진력했다. 장흥지역에서 종유(從遊)했던 사람들은 玉峰 백광훈, 楓菴 문위세, 魁峰 위대용 竹谷 임 회, 雲谷 김귀명 등이다. 문인으로는 思周堂 백문린, 聽溪 위덕의, 盤谷 정경달, 龍湖 문희개, 昻之 김지주, 仲亢 이 섬, 守靜堂 위홍주, 월암(月巖) 조장일 등이 있다. 이러한 선생의 학풍은 장흥지역 각 성씨 가문과 후학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1574년(선조7) 여름, 나라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제단(祭壇)을 쌓고 살신기우(殺身祇雨) 할 결심으로 높이 쌓아 올린 장작더미 위에 정좌하여 기원하며 나무에 불을 지르자 갑자기 큰 비가 내렸다고 한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천방(天放)이라는 호(號)를 하사하였다. 선생은 일생을 안빈낙도하며 낙천적으로 살았는데 장동면 하산리 연하동 마을에 유처사산정(劉處士山亭)을 짓고 장수소로 사용하였다. 천방유고집(天放遺稿集)의 연하동서당도(煙霞洞書堂圖)에는 자기가 사는 마을 이름을 연하동(煙霞洞), 거처를 정정당(定靜堂) 사랑채를 불우당(不憂軒), 집 앞에 정자 양호정(養浩亭)과 못 완묘지(玩妙池)를 조성하여 이름하고 학문을 강구하며 풍류로 일생을 살았다. 선생의 묘소는 장동면 하산리 산 60-2번지 제암산 자락이다. 장흥군 예양서원(汭陽書院), 장성군 송계사(松溪祠), 순천시 월계사(月溪祠)에 배향되었다.

신실 숭현묘(崇賢廟)에는 오현(五賢)의 위패가 연벽으로 봉안되어 있다.

3칸 맞배집으로 1975년(乙卯) 2월 10일 상량하여 중건하였다.

신실 좌측 후방에는 汭陽書院遺墟碑가 위치한다.

음기(陰記)에는
牧隱李先生諱穡字潁叔韓山人封韓山伯諡文靖
秋江南先生諱孝溫字伯恭宜寧人贈左承旨諡文貞
靈川申先生諱潛字元亮高靈人官至丞旨
月峯金先生諱光遠字彦明靈光人贈吏曹判書兼祭酒
天放劉先生諱好人字克己江陵人進士參奉이라 새겼다.

숭정(崇禎) 242년 후 1869년(己巳) 12월  有司  운포(雲圃) 김 석(1821~1870), 원강(圓崗) 김주현(1819~1882), 연암(淵庵) 김한성(1816~1874), 비문은 見哉 김한용(1845~1914) 근서(謹書)하였다.

예양서원(汭陽書院) 강당(講堂)은 4칸으로 1927년(丁卯) 중건하였다.

예양서원기(汭陽書院記)는 2015년(乙未) 겨울 인천人 치인(痴人) 이봉준(1949년생, 장동면 만수마을 태생) 근기(謹記)하다.
- 예양서원기의 銘
汭陽江上皐崇院 /예양강 위에 숭고한 언덕의 예양서원은
五賢遺風有志墟 /다섯 성현의 遺風과 有志가 깃든 곳이라
飛鳥簷堂儒學溢 /날듯 한 처마의 강당엔 유학들이 넘치고
詩書禮樂講論餘 /시경 서경과 禮와 樂의 강론이 남아도네
五老峰下何盛道 /五老峰 아래 朱子 道義만 어찌 성대할까
壯元峰隅正節居 /壯元峰 기슭에 文節과 正學도 함께 한다네
堅觀三山長汭碧 /三山이 굳건하고 예양강이 길게 푸르다면
千秋承祭永芳舒 /천년에 이을 祭享 향기는 영원히 펴리라.
 

액호는 1944(甲申) 9월 경암(敬菴) 김한희(영광人 1890~1945, 장성군 황룡면 수산리 태생)가 썼다.

지난날 장흥의 유생들은 진산(鎭山) 사자산(제암)과 억불산이 조망되는 이곳 서원에서 예양강

을 내려다보면서 학문을 닦고 시가(詩歌)를 서로 주고받아 부르면서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예양서원은 대지 199평 위에 신실, 강당이 위치한다. 관리사옥은 관리인이 거주하지 않아 근래 철거하였다. 재원(財源)은 논 16.5두락, 임야 1,532평, 잡종지 240평으로 영광김씨 당곡종중과 강릉유씨 천방공종중에서 각 2인 등 4인 이름으로 등기되어 공동 소유로 관리되고 있다.

끝으로 본 서원 탐방에서 평소 향토문화에 큰 관심을 가져온 장흥군의회 백광철 의원님과 신암(新菴) 유동종(천방선생 12대손)님, 월천(月泉) 김우경(월봉선생 14대손, 제37대 장흥군유도회장)님의 협조에 깊이 감사드린다.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