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 이민기(李敏琦 인천人 27세, 1646년~1704) 선생 : 자는 경징(景徵), 호는 만수재(晩守齋)이다. 父 이원욱(李元郁)이 일찍 별세하여 母 순창조씨의 가르침 속에 자랐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나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학문을 수학하였으며, 1679년 장흥에 유배 온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에게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배웠다. 1681년(숙종 7)에 식년시 생원(生員)에 입격하였다. 민정중이 유배가 풀려 한양으로 올라간 후 선생을 추천 및 과거 보기를 권유했지만 불응하고 용두산 아래 만수동에서 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듬해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를 황해도 연백 비봉서원(飛鳳書院)에 배향하는 것을 주도하였다. 1694년(숙종 20) 정읍 원재서원(元齋書院)을 세울 것을 상소하고 1698년(숙종 24) 노봉(老峯) 민정중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연곡서원(淵谷書院)을 세우는 일을 주도하였다. 1699년(숙종 25) 책문(策問)으로 동당시(東堂試)에 합격하고 세인헌(世忍軒) 이창명(李昌命 1647~1721), 수우옹(守愚翁) 위세직(魏世稷 1655~1721)과 <여지승람 장흥조(輿地勝覽 長興條)> 편찬을 주도하였다. 학덕이 정수(精粹)하고 경세에 밝아 지방사정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민막소(民瘼疏), 진황소(賑荒疏), 개량소(改良疏) 등이 문집에 남아 있다. 묘소는 장동면 만년리 산 116-1번지이다. 1901년 장흥군 금계사(金溪祠)와 1988년 연곡서원(淵谷書院)에 배향되었다.

成均生員李公墓誌銘 幷序(성균 생원 이공 묘지명 병서)

<국역> 노봉(老峯) 민 선생(閔先生 민정중(閔鼎重))이 장흥(長興)에서 귀양살이할 때 빈객(賓客)들과 왕래하지 않고 사람들의 방문을 가볍게 허락하지도 않았다. 선생에게 접견을 허락받은 사람들은 등용문(登龍門)의 소망이 있었는데, 당시 만수재(晩守齋) 이공(李公 이민기(李敏琦))이 폐백을 올리고 가르침을 청하니, 민 선생이 곧 허락하여 주자(朱子)의 글과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위학지방(爲學之方)》을 가르치며, 항상 남쪽 선비 중에 뛰어난 선비로 지목하였다. 일찍이 공에게 말하기를 “과거 시험 과목이 생겨나고부터 선비가 이것을 버리고는 임금을 섬길 수 없으니, 어찌하여 정문(程文 과거 문장)과 겸하여 익히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마침내 과거 문장을 지어 바로잡아 주기를 청하니, 노봉이 말하기를 “이만하면 충분하다.”라고 하였다.

신유년(1681, 숙종7)에 셋째 동생 민장(敏璋)과 함께 소과(小科)에 합격하자, 노봉이 한양에서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진사(進士)는 그대의 영광으로 삼기에 부족하지만, 늙은 어머님이 계시는데 동생과 동시에 소과에 합격한 것은 축하할 일이네. 잘 다스려지는 때에 혼자서만 선(善)을 닦는 것은 선비의 본래 뜻이 아니니, 마땅히 와서 태학(太學 성균관)에서 공부하여 일찍이 가슴속에 품은 포부를 펼쳐야 할 것이네.”라고 하였으니, 공에게 기대한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의 휘(諱)는 민기(敏琦)이고, 자(字)는 경징(敬徵)이다. 소성 이씨(邵城李氏)는 본래 금관 허씨(金官許氏 김해 허씨(金海許氏))인데, 당(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조회하여 성(姓)을 하사받았다. 휘 허겸(許謙)에 이르러 비로소 소성 백(邵城伯)에 봉해졌다.그 후 어진 공경(公卿)이 많이 배출되어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대대로 기록될 수 있었다. 우리 왕조의 태종(太宗) 때 이름난 신하 이문화(李文和)가 있었는데,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을 지냈고, 윤리강상을 밝히는 데 공훈이 있었으며,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공도공의 넷째 아들인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효지(孝智)는 실로 장흥파(長興派)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는데, 공은 바로 그 후손이다.
공은 체격이 우람했으며, 덕성이 순수하고 고상했다. 어려서 부모님의 뜻을 어기지 않았으며, 글 읽기를 좋아해서 15세 이전에 경서(經書)와 예설(禮說)을 거의 다 섭렵하여 그 대략적인 뜻에 통달하였다.
19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슬픔에 몸이 상해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이었는데, 상복을 벗은 지 수년 만에야 정상을 회복하였다. 공이 이미 소과에 합격한 후 노봉이 편지로 권유한 내용을 어머니께 아뢰니, 모부인이 말하기를 “네가 세 번 만에 합격한 것이 내 예전 꿈과 들어맞으니, 운명이다. 운명을 알지 못하고서 바삐 뛰어다녀 봐야 지조만 상실할 뿐이다. 또 내가 늘그막에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도 견디지 못하겠다.”라고 하니, 공이 절하고 명을 받아 벼슬길에 나아가려는 뜻을 단념하였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만수동(萬壽洞) 선영 아래에 집을 옮겨 짓고 편액을 걸어 ‘만수(晩守)’라고 하였으니, 동(洞)의 이름을 빌려 늙도록 지조를 지킨다는 뜻을 기록한 것이다. 산밭에서 수확한 곡식이 적어 보잘것없는 끼니마저 여러 번 거르면서도 제사를 지내는 데 정성을 다하고 부모를 봉양하는 데 마음을 다하였다. 남동생과 누이 집안 식솔 수십여 명과 함께 밥을 지어 먹으며 지내니, 다른 사람들은 그 걱정을 감당하지 못했으나 공은 눈살을 찌푸린 적 없이 단정히 앉아 종일토록 글을 읽었다. 노비라고 하더라도 도리에 어긋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원근의 배우려는 선비들로 공에게 폐백을 바치고 제자가 되려는 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는데, 모두 정성스럽게 올바른 행실을 우선으로 삼았으니, 문하생들은 이 선생에게서 배운 자들임을 묻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병인년(1686, 숙종12) 모친상을 당했을 때 장흥 부사(長興府使)가 수의( 襚衣)를 보내 장례 치르는 일을 돕기에 이르렀는데, 공과 친구였기 때문에 이를 받으면서 사양하지 않았다. 고을 사람들이 노봉을 위해 사당을 세우자, 이를 좋지 않게 여긴 사람들이 태학생(太學生)들을 꾀어 감사(監司)를 속여서 고을 사또를 위협하고 고을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니,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헤아릴 수 없었다. 공이 고을 사또를 만나 보니 고을 사또가 몹시 화를 내며 공을 대했는데, 공의 말이 명확하고 행동거지가 차분하자 고을 사또가 존경하고 승복하여 감히 도리에 어긋난 일을 더하지 못했고 끝내 딴말이 먹혀들지 못했으니, 도내(道內)의 선비들 모두 공의 풍채를 우러러보았다.
공은 인조(仁祖) 병술년(1646, 인조24) 3월 12일에 태어났고, 숙종 갑신년(1704, 숙종30) 9월 7일에 세상을 떠나, 다음 해 2월 9일 만수재(晩守齋) 뒤 선영(先塋)의 임좌(壬坐 북서향) 언덕에 장사 지내니, 향년 59세였다. 아아, 공은 바로 선비의 계책도 있고 지조도 있는 사람이었는데, 다만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으니, 애석하도다.
전에 도적 수십 명이 집 안에 침입한 적이 있었는데, 공이 침착하게 나와 가솔들을 데리고 집 뒤의 높은 곳에 앉아 호통을 치며 말하기를 “도포(道袍)는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고 서책(書冊)은 잠시라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나머지 물건은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라고 하였다. 도적들이 놀라 돌아보며 서로 수군거리더니 이윽고 말하기를 “다만 마을이 외따로 떨어져 있어서 온 것이지 감히 죄를 지으려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물러갔다. 공이 집으로 돌아와 살펴보는데, 모든 물건들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으니, 덕스러운 모습으로 사람을 감복시킴이 이와 같았다.
젊었을 때 여러 벗과 함께 산사(山寺)에서 문회(文會 시문을 짓는 모임)를 가졌는데, 한양의 선비로 이틀 밤을 머문 사람이 있자 여러 벗이 앞다투어 사귀며 시문(詩文)을 서로 주고받았다. 공이 그 사람과 다정하게 이야기하지도 않고 통성명하지도 않자, 여러 벗이 공을 나무라기를 “시골 선비가 한양의 귀한 선비와 사귈 수 있으니, 이 또한 다행스러운 기회인데, 그대는 어찌 고루하고 졸렬한가.”라고 하였다. 공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는데, 그해에 한양의 선비가 도리에 어긋난 일로 죽게 되자 사람들이 비로소 탄복하였다. 공은 이처럼 젊어서부터 지조를 지키더니 만년에는 더욱 힘을 써서 지켰다. 만약 하늘이 공을 장수하게 했다면 공의 조예가 얼마나 깊어졌을지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일찍이 과거 시험 원고를 열람해 보고 탄식하기를 “한 글자를 잘못 사용하여 내가 낙방했구나.”라고 했으며, 이윽고 또 탄식하기를 “시험 감독관이 만약 이 한 글자를 지우고 그 시권(試券 시험 답안지) 전체를 취한다면 식견이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시권이 도착했는데 과연 한 글자를 지웠으니, 문장에 대한 공의 식견 또한 오묘한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공의 할아버지는 휘(諱) 세웅(世雄)이고, 아버지는 휘 원욱(元郁)인데 문장과 행실로 성대한 명망이 있었지만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순창 조씨(淳昌趙氏)로, 조계룡(趙季龍)의 딸이다. 부인은 완산(完山) 최명리(崔明履)의 딸이다. 대를 이은 아들은 창(淐)이고, 손자는 규정(奎精)·규태(奎泰)·규화(奎華)이다. 규정은 밀양(密陽) 박정범(朴廷範)의 딸에게 장가들어 몽일(夢日)·몽계(夢桂)를 낳았고, 규태는 죽산(竹山) 안중석(安重錫)의 딸에게 장가들어 몽택(夢澤)·몽성(夢成)을 낳았으며, 규화는 원성(原城) 김광언(金光彦)의 딸에게 장가들어 몽직(夢稷)을 낳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누가 글을 읽지 않으리오마는 / 孰不讀書
글은 글일 뿐 제 몸으로 삼지 않네 / 書爾匪身
누가 학문을 말하지 않으리오마는 / 孰不曰學
남을 따르다가 남을 잃게 되네 / 徇人喪人
자신을 이기고 남을 이기는 일 / 克身克人
진실로 유학자의 참모습이라 / 寔儒之眞
대대로 쌓아 온 덕이 씨를 뿌려 / 世德所種
훌륭한 자질 하늘에서 얻어 / 得姿于天
효성과 우애 마음에서 발현되니 / 孝友因心
힘쓰지 않고도 온전히 실천했네 / 不勉而全
주자 글의 올바른 취지를 / 朱文正旨
현명한 스승에게 전수받았으니 / 賢師是傳
천명을 알아 이에 머무르며 / 知命爰止
늘그막에 지조 더욱 굳게 지켰네 / 晩守益堅
좌우에 도서를 쌓아 놓고 / 左圖右書
맑은 낮 화로에 향을 피움에 / 淸晝爐烟
배우려는 많은 선비가 /兟兟學子
모두 충분히 터득했지 / 咸得充然
산과 바다 깊숙한 곳에 /山海之隩
은자의 삶을 살면서 / 有泌其泉
간직한 채 팔지 않으니 / 守而不衒
누가 그대의 보배 사겠는가 / 誰沽爾珍
몸가짐에 순수함 있었으니 / 顧言有粹
후세에 인을 물려주었도다 / 錫後以仁
날 타고났지만 명성 없었으니 /厚畀嗇章
하늘이 어찌 그리했는가 / 天曷故焉
만수동 선영 아래 / 萬壽之楸
석 자 무덤이여 / 三尺其阡
연문에 명을 넣어 /納銘羡門
후세 현인에게 고하노라 / 紹告來賢
 숭정백육십일년무신계동상현(1788년 12월 7일) 위백규 근찬
출처 : 존재집 제2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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