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장흥읍 원도리 연곡서원(淵谷書院) <1>문화탐방/栢江 위성록 이야기 (41)
관리자  |  ch2300@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20.03.20  10:50:18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서원(書院)은 조선중기 때 석학(碩學)이나 충절(忠節)의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講論)하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사설 교육기관을 말한다.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 46번지에는 영조대왕이 사액(賜額)한 연곡서원(淵谷書院)이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1675년(숙종1) 남인들이 집권하자 서인을 배척하여 1679년 장흥으로 귀양 온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 유생들에게 강학하여 교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1698년(숙종 24) 노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향론이 제발하여 이민기(李敏琦), 김발지(金發地), 이시휘(李時輝), 백한익(白漢翊) 등 주도로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제문(祭文)은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지었다. 1665년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아우이자 숙종의 장인 둔촌(屯村) 민유중(閔維重)이 재임중, 유학진흥과 선정을 베풀어 사림들의 칭송이 지대하여 1716년(丙申) 추배하였다. 이후 유생 백후채(白後采), 임창수(林昌壽), 오대건(吳大建) 등이 청액소(請額疏)를 올려 1726년(丙午 영조 2) "연곡(淵谷)" 이라고 사액되었다. 1798년(戊午) 신실과 강당을 중수(重修)하였으며, 1861년(辛酉) 후손 장흥부사 민치서의 진력으로 강당을 중수하였다.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으며, 1873년(癸酉) 단(壇)으로 복설(復設)하여 향사하였다. 1904년(甲辰) 신실과 강당을 중건하고 유허비를 세웠다. 1974년(甲寅) 12월 26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었다.

현재의 신실은 3칸 맞배집으로 인천이씨 만수재종중에서 출연으로 1988년(戊辰) 2월 7일 상량하여 중건하면서 장흥향교 전교 문태열(文泰烈), 연곡서원 원장 김태경(金太璟) 등 지역 유림의 제발로 노봉의 수제자 만수재(晩守齋) 이민기(李敏琦)를 추배하였다. 매년 3월 3일 지역유림의 주관으로 여흥민씨, 인천이씨 후손과 장흥유림들이 참석하여 제향을 봉행한다. 본 서원은 영예로운 장흥 최초의 사액서원이면서 영조대왕과 노봉 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경내 건물로는 신실, 유허비, 내삼문, 강당, 어필각(御筆閣), 장판각(藏板閣), 협문(夾門), 외삼문, 관리사옥 등이 있다.

1.신실(神室) 배향인의 행장
■ 민정중(閔鼎重 여흥人 21세, 1628~1692) 선생 :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父는 강원도관찰사 민광훈(閔光勳), 母는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1648년(인조 26) 진사에 입격하고, 1649년(인조 27) 정시 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전적으로 벼슬에 나가 예조좌랑,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었다. 직언(直言)이 뛰어나 사간원정언ㆍ사간에 제수되고, 홍문관수찬ㆍ교리ㆍ응교, 사헌부집의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동래부사를 지냈으며, 전라도ㆍ충청도ㆍ경상도에 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하였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소(疏)를 올려 인조 때 역적으로 논죄되어 죽음을 당한 강빈(姜嬪)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왕도 그 충성을 알아주기 시작하였다. 그 뒤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성균관대사성, 이조참의, 이조참판, 함경도관찰사, 홍문관부제학,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1670년(현종 11) 이조ㆍ호조ㆍ공조의 판서, 한성부윤(漢城府尹),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등을 역임하였다. 1675년(숙종 1)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허 적(許 積), 윤 휴(尹 鑴) 등 남인이 집권하자 서인으로 배척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고 1679년 장흥(長興)으로 귀양갔다. 이듬해 경신환국으로 송시열 등과 함께 귀양에서 풀려 우의정과 이어 좌의정에 올라 4년을 지냈다. 1685년부터는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판사(判事)로 물러앉아 국왕을 보필하였다. 그러던 중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자 노론의 중진들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고 평안도 벽동(碧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타계하였다. 묘소는 여주시 여주읍 상거리이다. 현종의 묘정(廟庭)과 양주시 석실서원(石室書院), 충주시 누암서원(樓巖書院), 장흥군 연곡서원(淵谷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노봉집(老峯集)>, <노봉연중설화(老峯筵中說話)>, <임진유문(壬辰遺聞)> 등이 전한다.

■ 민유중(閔維重 여흥인 21세, 1630~1687) 선생 :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父는 강원도관찰사 민광훈(閔光勳), 母는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숙종의 계비(繼妃)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이며, 대사헌 민시중(閔蓍重)과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의 동생이다.

   
 

송시열, 송준길의 문인으로 1648년(인조 26) 진사에 입격하고, 1650년(효종 1)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대교, 봉교, 세자시강원설서, 성균관 전적을 거쳐 사헌부감찰, 예조좌랑, 병조좌랑을 지냈다. 이후 사간원정언과 세자시강원사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1656년 병조정랑이 되었다. 그 뒤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 등을 지내면서 대신들과 시폐(時弊)를 놓고 다툰 끝에 조정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 함경도 경성판관으로 나갔다. 이때 선정을 베풀어 7개 고을의 주민이 송덕비를 세웠다. 이듬해 중앙에 돌아와 예조정랑이 되었다가 1662년(현종 3) 잠시 여주로 물러나 앉기까지 홍문관부교리ㆍ교리, 사간원헌납, 경상우도염찰사, 이조정랑, 성균관직강 등을 지냈다. 1663년 이후 이조정랑, 홍문관교리ㆍ응교, 사간원사간, 사헌부집의, 제용감정(濟用監正), 사도시정(司도寺正), 의정부사인 등을 두루 역임하다가 1665년 전라도관찰사로 발탁되었다. 이어 장례원판결사, 사간원대사간, 승정원승지, 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668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다시 평안도관찰사로 나갔으며, 1671년부터 형조판서, 대사헌, 의정부우참찬, 한성부판윤, 호조판서 겸 총융사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벼슬을 내놓고 충주에 내려가 지내다가 지금의 포항 흥해(興海)로 유배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다시 조정에 들어와 공조판서, 호조판서겸 선혜청당상,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서인 정권을 주도하였다. 1681년 3월 딸이 숙종의 계비(繼妃 인현왕후)가 되자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지고 돈녕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었다. 이후 점차 외척으로서 정권을 오로지 한다는 비난이 일어 관직에서 물러난 후 타계하였다. 묘소는 여주시 여주읍 능현리 이다. 효종의 묘정과 장흥 연곡서원(淵谷書院)에 배향되었다. 경서에 밝아 <민문정유집(閔文貞遺集)> 10卷 10冊이 전한다.

■ 이민기(李敏琦 인천人 27세, 1646년~1704) 선생 : 자는 경징(景徵), 호는 만수재(晩守齋)이다. 父 이원욱(李元郁)이 일찍 별세하여 母 순창趙氏의 가르침 속에 자랐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나 우계(牛溪) 성 혼(成 渾)의 학문을 수학하였으며, 1679년 장흥에 유배 온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에게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배웠다. 1681년(숙종 7)에 식년시 생원(生員)에 입격하였다. 민정중이 유배가 풀려 한양으로 올라간 후 선생을 추천 및 과거 보기를 권유했지만 불응하고 용두산 아래 만수동에서 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듬해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를 황해도 연백 비봉서원(飛鳳書院)에 배향하는 것을 주도하였다. 1694년(숙종 20) 정읍 원재서원(元齋書院)을 세울 것을 상소하고 1698년(숙종 24) 노봉(老峯) 민정중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연곡서원(淵谷書院)을 세우는 일을 주도하였다. 1699년(숙종 25) 책문(策問)으로 동당시(東堂試)에 합격하고 이창명(李昌命), 위세직(魏世稷)과 <여지승람 장흥조(輿地勝覽 長興條> 편찬을 주도하였다. 학덕이 정수(精粹)하고 경세에 밝아 지방사정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민막소(民?疏), 진황소(賑荒疏), 개량소(改良疏) 등이 문집에 남아 있다. 묘소는 장동면 만년리 산 160-1번지 이다. 1901년 장흥군 금계사(金溪祠)와 1988년 연곡서원(淵谷書院)에 배향되었다.

2.유허비(遺墟碑)
1893년(癸巳) 장흥 유생 이교근(李敎根) 등 지역 유림들이 강당 등 중건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으로 서원에서 준비한 건축 자재 등이 큰 피해를 입어 뒤 늦게 1904년(甲辰) 7월 강당을 중건하면서 유허비를 신실 우측에 근수(謹竪)하였다.

   
 

전면 書는 淵谷書院遺墟碑라 새겼다.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議政 全義人 李根命(1840~1916) 서(書)하다.
음기(陰記) 崇政大夫判敦寧院事原任奎章閣學士 海平人 尹用求(1853~1939) 서(書)하다. 전자(篆字)는 후면 비신 상단에 淵谷書院遺墟碑라 새겼다.
通政大夫長興郡守前承政院右副承旨兼經筵參贊官成均館大司成 延安人 제 315대 장흥부사 李憙翼(1845~?) 전(篆)하다.
감동(監董) 유사로 장흥유림 김지현(金之鉉), 이교근(李敎根), 이화현(李華鉉), 김익용(金益瑢) 등이 참여하였다.

3.내삼문(內三門)
淵谷書院 崇禎尊丙午宣額이라 쓴 액호가 걸려 있다.

   
 

1726년(丙午) 사액(賜額)됨을 알 수 있으며, 신실과 강당 사이 중간에 위치한다. 신실, 강당과 함께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선생 위패 봉안 제문(祭文)
작자인 농암(農巖) 김창협 선생의 나이 48세 때인 1698년(숙종 24)에 지었다.

   
 

爲政幾何 / 정사를 담당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遽休以疾 / 갑자기 병으로 물러나게 되었네
尙賴喬嶽 / 그래도 교악 같은 공에게 의지하여
瞻望嶻嶭 / 드높으신 학덕을 우러러보았건만
嗚呼己巳 / 아, 기사년의 참화
禍慘甲乙 / 갑을년보다 심하여
坤極傾圮 / 왕비가 폐위되고
士林蕩折 / 사림이 꺾이었네
逖矣西垂 / 선생은 먼 서쪽 변방
栫棘錮鐍 / 가시 울에 안치되어
刀俎魚肉 / 도마 위에 놓여진 어육 같은 신세로
命懸絲髮 / 목숨이 한 올 실에 매달린 듯하여도
浩然以處 / 호연히 대처하여
曾靡危慄 / 두려움이 없더니만
鵩鳥止舍 / 올빼미가 집에 앉아
告讖庚日 / 죽음을 예고했네
殄瘁之痛 / 현인 떠난 슬픔에
久益酸噎 / 날로 더욱 목메었으니
不有天定 / 천도(天道)가 바로 서지 않았더라면
幽憤曷洩 / 깊은 울분 그 어찌 풀었으리까
睠此下邑 / 생각하면 선생은 이곳 하읍에
曾辱珮玦 / 일찍이 유배되어 내려왔는데
甡甡南士 / 많고 많은 남쪽 선비
爭操篲𥬒 / 앞 다투어 모시었네
獎引誘掖 / 장려하여 인도하고 이끌어서 도와주어
俾不迷轍 /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해 주시니
德音在人 / 훌륭한 선생 말씀 아직도 기억하네
孰敢墜失 / 누가 감히 그 가르침 실추할 수 있으리까
菉竹之猗 / 무성하고 아름다운 푸른 대 모습 보며
永懷僩瑟 / 엄밀하신 선생 기풍 가슴에 길이 품었으니
曷不尸祝 / 어찌 제사 아니 올려
以揭遺烈 / 공적 아니 기리리요
詢謀僉同 / 사류 의견 일치하여
衆力齊一 / 힘을 한데 모아서
冠山之側 / 관산의 산기슭에
新廟載屹 / 새 사당이 우뚝 서니
治主以升 / 신주 깎아 올릴 제
月日之吉 / 달과 날도 길하다네
念昔潮陽 / 저 옛날 조양현(潮陽縣)은
實惟百越 / 실로 백월 땅이건만
猶祀韓子 / 한유(韓愈)를 향사하여
永久靡歇 / 길이 아니 폐했다네
矧茲雖陋 / 이곳 비록 누추하나
亦有芬苾 / 향기로운 제물 있으니
仰惟明靈 / 밝으신 영령께서
豈我遐絶 / 어찌 우릴 멀리하리
尙冀啓佑 / 부디 우리 도우시어
克有始卒 / 끝까지 돌보소서      <출처 : 농암집>

- 김창협(金昌協 안동人, 1651~1708) :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曾祖는 좌의정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祖는 동지중추부사 운수거사(雲水居士) 김광찬(金光燦), 父는 영의정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母는 안정 나씨(安定羅氏)로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영의정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의 동생이며 조선 말기 형제 영의정으로 유명한 김병학(金炳學), 김병국(金炳國)의 6대 조부이다. 1669년(己酉 현종 10) 진사에 입격하고, 1682년(壬戌 숙종 8) 갑과 장원으로 급제 후 대사성과 청풍부사에 이르렀다.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사약을 받고 죽자 벼슬을 내놓고 산중에 들어가서 살았다. 1694년(甲戌) 아버지의 누명이 풀리고 예조참판, 이조참판, 대제학, 예조판서, 지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노론 가문이었지만 이 황의 사상에 심취해 평생 연구하였다. 숙종 묘정과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농암집> 등이 있다.

자문 : 민동환(여흥人 33세, 삼방파종중 노봉선생 13대 종손, 1951년생, 서울시 강동구 명일동 거주), 연곡서원 총무 月谷 이제흠(인천人 36세, 만수재 선생 9대손, 1946년생, 장흥읍 건산리 거주)
 

관리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가장 많이 본 기사
여백
여백
칼럼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주)장흥신문  |  전남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470-1  |  농협 657-01-073148(장흥신문)  |  문의전화 061-864-3721  |  청소년보호책임자 최정옥
Copyright © 2013 (주)장흥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