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수도 장흥을 꿈꾸며

이대흠/시인

1. 남도 0번지 장흥

남도를 가로 세로로 나누면 그 중심에 장흥이 있다. 가로로 선을 긋고 +와 -사이의 중심에 다시 세로로 선을 긋고 만나는 지점을 보면, 그곳이 장흥이다. 이른바 제로의 그 점이다. 그런데 그 0의 지점이라는 말은 단순하게 지리적인 우연성만 나타내지는 않는다.

남도를 가로와 세로로 나눌 때, 그 가로축은 물질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세로축은 문화와 관련이 있다. 가로축의 극점이랄 수 있는 목포와 광양은 항구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목포가 부흥을 누렸다면, 그 이후는 광양이 새로운 부흥지로 떠오르고 있다.

또한 세로축의 극점이랄 수 있는 다도해의 여러 섬들과 광주 담양은 관광지로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장흥에서 가로축을 이용하여, 조금만 이동하면, 열차가 다니는 보성이 있고, 교통의 요지라는 순천이 있으며, 남도에서 가장 공업이 발달한 여천공단과 광양항이 있다. 경부선을 축으로 일기 시작한 경제개발의 붐이 광양과 여수, 순천까지 영향을 주었지만, 장흥은 당연하게(?) 거기에서 제외되었다.

뿐만 아니라, 남도 행정의 중심지인 광주는 장흥에서 두 시간 가까이 북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장흥은 행정력의 영향이나, 도청 소재지인 광주의 인구가 미치는 부가적인 혜택에서도 다시 벗어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장흥이 0일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군부 독재와 맞물려 시작된 물질만능주의 풍조 이후 일기 시작한 관광붐에서 해남 강진과 다도해가 떠오를 때, 장흥은 또 침묵 속에 놓인다. 계속되는 '해당없음'이 장흥의 현실이다.

그래서 지방 자치와 더불어 장흥이 내세운 궁색한 구호가 '문림의향'이다. 관광지도 아니고 전자나 자동차의 도시도 아닌, '문림의향'이라는 관념적인 단어. 그러나 장흥은 문림이나 의향으로서 변별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조선시대의 기봉 백광홍과 백광훈 형제, 그리고 현대 문학에서 송기숙 한승원 이청준으로 대변되는 장흥의 문학. 그들은 이미 억불산의 큰소나무처럼 거대하고 뿌리깊은 나무이다. 그러나 어찌 천연기념물에 가까운 거목 몇 그루 있다고해서 문림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문림이라고 부를려면 거목들과 어울려 수많은 나무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수많은 문인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올때, 그때서야 비로소 문림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며, 잡목 몇 그루쯤 있어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의향이라는 말은 더욱 궁색하기 그지없다.

나라가 떠들썩할 만큼 의로서 목숨을 거둔 자도 없고, 장흥이 중심이 되어 의기로 일어난 항쟁 또한 없었다. 그러나 장흥은 '문림의향'이다. 시가문학으로 유명한 담양에 못지않는 정자 문화가 있으며, 갑오농민전쟁 당시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던 농민군이 있다. 담양의 정자들이 정철이나 송순의 개인 소유 였다면, 장흥의 정자들은 대부분 '문중 사람들'의 것이었다. 전봉준 장군이나 김개남 장군에 비견되는 이방언 장군이 있지만, 장흥에서는 농민군들이 먼저 평가된다. 그렇다. 장흥의 문화는 '-들'의 것이다.

개인보다는 전체가 우선시 되는, 1이 아니라 0의 문화. 컴퓨터의 2진법이 아니더라도 문화의 흐름은 01의 반복이고 상호침투 속에서 발전한다. 거칠게 얘기하면 1은 남성성이고 0은 여성성이다. 강진에 가면 정약용의 다산 초당이 있고, 해남에 가면 초의 선사로 유명한 대흥사와 윤선도의 보길도가 있다. 하지만 장흥에는 누구의 무엇은 없다. 가사문학의 효시인 기봉 백광홍의 정자도 없으며, 장태장군 이방언의 생가도 없다.

문제는 이 '없음'이다. 없다는 것은 단순하게 마련하지 못했거나 보존하지 못했다는 차원은 아니다. 여기에서 '없음'은 굳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는 의미와 통한다. 기봉이 풍류를 몰라서 정자를 짓지 않은 것이 아니라, 기봉이 풍류를 즐길만큼, 장흥에는 이미 그런류의 정자들이 많았다는 의미이다.

그렇다. 장흥에는 이미 많이 있었고, 많이 있다. 선사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이 가장 많이 있으며, 선교 9산의 시작인 보림사가 있다. 또한 명산이라고 할만한 산들이 여럿 있고, 넓은 들과 맑은 강이 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메산이가 생산되는 건강한 바다가 있다. 다 있어서 드러나지 않는 곳. 장흥을 여행하는 것은 처음과 끝을 동시에 가는 것이다.

2. 완결성과 정체성을 동시에 지닌 '장흥문화'

한반도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남도. 그 중에서도 장흥은 유독 큰물이나 높은 산에 싸여 있다. 어디에서건 장흥에 가기 위해서는 평탄한 길을 선택할 수 없다. 물길로 가려면, 배를 타고 남해를 지나거나 탐진강의 검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야 한다. 그래서 탐진강이라는 강의 이름도 탐라국 사람들이 닻을 내린 곳이라고 해서 지어졌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물길은 그만 두고라도 가장 흔한 이동 수단인 자동차를 이용하여 장흥에 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돈밧재나 피재, 곰치재를 넘어야 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기차역이 없는 장흥은, 이른바 장흥문화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해도 될 만큼, 독특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자체적인 완결성을 가진 장흥문화. 이미 다 있음. 그러나 문제는 완결성이라는 것이 걸림돌이 된다.

이진법으로 말하면, 0이 가지는 상징성인데 완결은 곧바로 정체성으로 이어진다. 그래서일까? 장흥이 지니는 풍토도 그러하고 문화의 속성도 그렇게 보인다. 이미 다 있어서 안주하고 있는 모습이랄까? 흔히 문화는 남성성이나 여성성이 두드러지면서 발전한다. 그런데 장흥은 '중성'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중성'은 무성(無性)은 아니다. 성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양성이 합쳐진 것이다. 어찌 보면 남녀가 잘 엉켜 있는 느낌. 영산강을 보면 남성의 이미지가 강하고 섬진강을 보면 여성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장흥의 탐진강을 보라.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강이 아니더라도 장흥의 여러 산들을 천천히 떠올려보라.

장흥에서 태어나 장흥에 주소를 두고 있으면서도 나는 장흥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 문화 유적 답사를 한답시고 이곳 저곳을 싸다닌 후에야 장흥에 대한 나의 인식은 바뀌게 되었다. 수준급의 문화 유산이 고향에 있었는데, 그것은 도외시하고 외부의 것에만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해 왔던 것이다.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그 동안 내가 의지해 왔던 대부분의 문화 유산 답사기를 들춰보면 그 내용이란 것이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대부분 답습하고 인정해 온 것에 대한 화사한 평가에 불과하다. 장흥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다. 가장 잘 팔렸다는 답사기에 장흥에 대해 언급된 것은 보림사 뿐이다. 또한 세부적으로 다루었다는 책을 보아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장흥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보림사와 방촌 마을 입구의 장승뿐이다.

물론 그것들의 가치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장흥 전체를 이야기하면서 그것만 거론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장흥은 복합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지역이다. 불교와 유교. 그리고 민속문화유산과 풍습 등 여타의 문화면에서 장흥은 너무나 풍부한 자산을 가지고 있다. 흔히 나는 외지인들과 장흥을 답사할 때면, 보림사에 가지 않는다. 오히려 약사사나 고산사. 그것도 아니면 탐진강 줄기를 따라가며 이어지는 동백정, 용호정, 부춘정. 독취정, 사인정 등 정자들을 소개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3. 탐진강변의 정자들

아름다운 물빛이 있는 강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정자이다. 탐진강이 온 들을 적시는 장흥도 예외는 아니어서 10여 개의 정자들이 요소 요소에 자리하고 있다. 장동 두룡의 용암정, 장항 호계의 용호정, 지와몰 용반리의 용호정, 부춘정 경호정 독취정 등 이름을 다 열거하기에도 벅찰 정도이다.



650이쯤에서 여담 한마디하고 가자. 장흥의 정자들을 소개한 자료들을 뒤지다보니, 누군가가 장흥의 정자들을 소개하면서 남산 공원 꼭대기의 팔각정을 거론해 놓았다. 물론 팔각정도 정자이기는 하지만 장흥의 정자 문화권이라는 단어 속에 들어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는지, 그 발상이 우스울 뿐이다. 최근에 와서 많은 지자체들이 정자들을 짓고 있다. 그런데 국책 사업의 일환으로 지어지고 있는 마을 앞 정자들을 빼고, 공원 같은데 세워지는 정자들을 보면 한 가지 생각이 든다. 그런 정자들은 한사코 산꼭대기를 차지한다. 자연과 사람을 내려다보겠다는 오만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 정자는 치적 사업이므로 '민중들은 이 정자를 볼 때마다, 수장의 노고를 되새겨라!'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오만 방자한 현대인들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장흥에서도 그러하다. 남산 위의 팔각정은 이전의 장흥의 정자들이 지니고 있는 문화적 의미를 배반한다. 가만히 장흥의 정자들을 생각해 보라. 어느 정자가 산꼭대기를 넘보던가. 장흥의 모든 정자는 산(자연)에게 미안하다는 듯이 앉아있다.

'지가 여그 조깐 자리하고 앙거도 되겄습니까?'라고 묻는 듯 하다.
이야기의 폭을 정자로 한정해야 할 것 같다. 보림사, 약사사, 고산사를 비롯한 절들과 서원들에 대해서도 할 말은 많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발제의 주제 또한 '탐진강변의 정자 문화'이기 때문이다.

탐진강변의 정자라고 해도 좋고 장흥에 있는 정자라고 해도 좋다. 이상하게도 탐진강변의 모든 정자는 장흥 땅에 있기 때문에 두 표현이 엇갈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자라는 것이 어떤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과 함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탐진강변의 정자'라는 표현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탐진강변의 정자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탐진강변의 정자들은 물과 바위와 산이 함께 한 곳에 있다. 탐진강의 상류에서부터 내려가면, 바위가 아름다운 곳에는 꼭 정자가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꼭 보가 있어서 검푸른 물빛을 볼 수가 있다. 어느 정자도 예외는 아니다.

둘째 어느 정자도 산꼭대기에 있지 않고 중턱에 있다. 정자의 위치가 산꼭대기냐 중턱이냐가 무어 대수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중요하다. 정자가 산 중턱에 있는 이유는 자연과의 공생을 뜻하고 산꼭대기에 있다는 것은 자연을 지배하겠다는 욕구의 표현이다. 탐진의 모든 정자들은 산 중턱에 있는데, 이것은 그 작은 자리를 차지하면서도 자연(산)에 미안해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다. 언젠가 한 때 나는 환경문제를 고민하면서 인간만 사라지면 된다는 극단의 생각을 가진 적이 있다. 사실 지상에서 인간만 없다면 자연보호니 뭐니 들먹일 이유가 없다. 그 많은 생물 중에서 쓰레기를 만드는 생물은 오직 인간뿐이다. 그러니 인간이 없다면 환경문제를 거론할 필요도 없겠지만, 인간이 살아야하기 때문에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지난 세기의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게 된 것에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많은 것을 착취하고, 인간의 편리를 위해 새로운 물건들을 만들 때마다 인간은 더 오염된 세계에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래서 대두된 것이 환경문제이다. 그리고 환경을 위한다는 사람이 매우 많아진 것도 요즈음의 일이다. 하지만 환경 문제를 생각했을 때, 가장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은 자연을 지배하겠다는 오만이다.

자연을 지배하겠다는 오만을 버리고 자연을 대하면, 가장 먼저 미안한 마음이 들 것이다. 우리가 길을 걷고 음식을 먹고 하는 모든 행위가 사실은 자연에게 빚진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이 가장 잘 담긴 곳이 탐진강변의 정자들이다.



'지가 여그 잠시 머물다 갈랍니다. 산님. 강님.'하는 듯이 중턱에 조심스레 자리한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영귀정 상량문에 이렇게 적혀 있다.

"옛 사람 思亭 지은 마음을 따랐으니 꽃 하나 돌 하나라도 훼손하면 내 아름다운 자손이 아니다'

셋째 탐진강변의 정자들은 인공으로 정원을 만들지 않았다. 아니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용호정에 가면 괴석들이 몇 개 있고, 사인정이나 부춘정, 용호정에도 몇 그루의 나무가 심어져 있다. 하지만 그 정도를 정원이라 부르기에는 궁색하다. 그저 빈터에 누군가가 심어 둔 나무들이 자란 것이지, 작정하고 심은 나무들은 아닌 것이다.

인공 정원이 없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고 본다. 인공으로 정원을 꾸밀 필요가 없는 곳에 정자들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자를 가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이 준 원림들이 더 이상의 정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거기다가 산 중턱에 정자를 짓는 마음이 깃들었으니 무엇 때문에 바꾸어 꾸미겠는가.

넷째 탐진강변의 모든 정자는 담장이 없다. 담장이 없다는 것은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하나가 되어 드나든다는 것이다. 드나든다는 것은 함께 한다는 것이다. 들에 일하러 나간 농부가 낮잠을 취하러 정자에 가기도 하고, 마을의 대소사를 논하기 위해 정자에 모여 앉기도 한다. 그래서 탐진강변의 정자들은 마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 토론하고 고민하는 열린 공간이었다.

그래서 대개의 정자들은 단순히 시문을 읊기 위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곳은 서당이었고 사당이었으며 쉼터였다. 마을에서 학식이 높은 사람이 아이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치고, 그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논밭을 가는 농부들. 위아래의 구분보다는 '함께'라는 말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다섯째 탐진강변의 정자들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정자들은 문중의 소유이거나, 여러 사람의 것이었다. 개인의 집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나 어느 때나 드나들 수가 있었다. 생각해 보라. 어느 누가 불쑥 찾아들지도 모르는 담도 없는 곳에서, 기생첩을 옆에 끼고 술 마시고 노래할 수 있었겠는가.

거기에는 오직 벽오동 가지에 봉황 들 날을 기다리며, 학문에 애쓰고 정진하는 모습만 있었을 것이다. 요즈음 대안 학교라는 것이 많이 생기고 있는데, 참고삼아도 좋을 듯하다.


4. 우리는 이미 아름다운 자손이 아니다.


정자 한 채 산 중턱에 지으면서, '꽃 하나 돌 하나라도 훼손하면 내 아름다운 자손이 아니다.'고 했거늘, 그 상량문이 적혀 있던 영귀정은 이미 뜯긴 채 방치되고 있다.

유치 단산 앞에 있었던 영귀정이 탐진댐 건설로 말미암아 수몰될 처지에 놓인 것이다. 탐진댐 건설은 많은 문화재를 위협하였는데, 그 중 영귀정은 치명타를 입었다. 1년여 전에 아예 뜯긴 것이다. 영귀정이 뜯기 현장에 가 보았더니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미 뜯긴 영귀정은 온데간데없는데, 바닥에 남은 무수한 기왓장과 서까래들을 보니 어떻게 뜯었다는 것이 짐작하고도 남을 만 했다.


수자원 공사측에서 보상을 끝낸 영귀정은 지금은 행원리 어느 집 앞마당에 있다.
행원리에 재건을 할 참이라는데, 이건 도무지 상식에서 어긋나는 일이다. 원래 있었던 자리가 단산리 앞산인 만큼 재건축을 하려면 그 부근에다 해야하지 않을까? 하지만 국가나 도의 지정 문화재가 아닌 영귀정의 경우에는 그것을 감시하고 책임질 사람이 하나도 없다.

보상을 받은 개인이나 문중이 어디에 어떻게 짓건 상관할 기관이나 단체가 없다는 말이다. 작년 이쯤에 이미 사라진 영귀정이 어떻게 복원될는지, 생각하면 끔찍하다.

원래의 영귀정에서 가져온 나무들은 이미 썩었을 것이고, 기왓장들도 거의 방치되어 있는 상황에서 무슨 기대를 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곳에서는 후손들이 서둘러서 가치 있는 건축물들을 복원하고 증축하는 마당에, 보상까지 받고도 무책임한 영귀정 관계자들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영귀정에서 머물지 않는다. 내가 가장 즐겨찾았던 용호정의 경우에도 댐 건설의 피해는 막심하다. 용호정 맞은편 기역산 쪽으로 새 도로가 뚫리는 바람에, 아름다운 용호정 앞 풍광은 작두로 잘린 듯 망쳐져 버렸다. 최근에 용호정에 갔던 나는 내 눈을 누군가가 면도날로 자르고 지나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규모도 거대한 도로가 눈높이를 베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영귀정 용호정은 댐건설로 인해 피해를 입었지만, 창랑정 독취정은 이미 버린 곳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창랑정 앞에는 정처를 알 수 없는 광인(狂人)이 살고 있어서 일반인들은 출입마저 꺼려 하였다. 백림소를 굽어보고 자리한 창랑정 앞은 우거진 잡목들이 눈을 가려서 은어떼인 듯 반짝이는 백림소의 물낯은 벽 뒤의 풍경이었다. 끊어진 전기 배선과 널브러진 쓰레기들. 삐딱하게 매달린 '第一江山'이라는 현판이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

독취정은 더욱 심하다. 지붕은 거의 무너졌으며, 흙벽이 있던 자리는 바람이 차지한 지 오래이다. 물소리처럼 흘렀을 시문은 간데 없고 검고 단단한 염소 똥만 즐비하다. 정자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는 장소'라거나, '불의에 응하지 않은 선비들이 은거하며 울분을 달래고 새 시대를 기다렸던 장소'라는 본래의 의미를 내세우기에는 염치없고 자발 없다.

이러한 실태는 정자에 한정된 것은 아니라, '문림의향'이라는 장흥의 모든 문화재가 처한 상황이다. 폐허가 된 문화 유산. 하지만 이것은 정부 당국이나 몇몇 관계자만 책임질 문제는 아니다. 그것을 보존하고 가꿀 의무는 여기에 있는 여러분과 나,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다.

고산사를 가 보았는가? 약사사를, 미륵사를 가 보았는가? 아니, 그 절들을 아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집 주위에 흔히 뒹굴고 있는 고인돌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우리는 이미 아름다운 자손이 아니다.

5. 문화의 수도 장흥을 꿈꾼다.

얼마 전에 나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분은 어느 대학의 관광학과 교수였는데, 장흥을 한마디로 나타낼만한 말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가령 담양은 대나무와 시가문화권. 보성은 녹차와 판소리, 화순은 운주사와 온천, 이런 식으로 가닥을 잡을 수가 있는데, 장흥은 도대체 무어라고 해야하는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실학의 존재 위백규 선생이 있고 동학농민군과 이방언 장군이 있고, 문학에서도 기봉 백광홍과 현대문학의 거봉들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아우를만한 용어가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농담 삼아 던진 말이 '문화의 수도'라는 말이었다.

그러자 그분의 대답은 '욕심도 많다는 것'이었다. (그 많은 것을 가지고도 '문화의 수도'라는 말까지 독점하려 하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정말이지 장흥을 아우를만한 용어는 마땅하지 않다. '문림 의향'이라는 아름다운 용어가 있기는 하지만, 어딘지 석연치 않고, 구호로만 여겨질 뿐이다. 그 말에 대한 오해도 많아서 어지간한 일간지들은 장흥을 소개하면서 '문림의 향'으로 표기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장흥 출신의 문인들이 많다보니 지레짐작으로 썼다가 실수를 하는 것이다. '문림의 향'이라는 오기를 보면서 나는 오히려 장흥의 현실은 '유림의 향'이 마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그 '유림의 향'이라는 말마저도 답답하기 그지없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만수재 이민기(晩守齋 李敏琦)라는 분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대개의 사람들이 잘 모르는 그분은 지금 연곡 서원에 배향되어 있는데, 노봉 민정중의 수제자로 연곡서원 건립에 앞장 섰던 분이다. 하지만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당시 당파 싸움에 환멸을 느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동백정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며, 한편으로는 대동계를 만들고 주도하는데 힘을 쓴다. 뿐만 아니라 경호정에서는 이 고을의 지식인이었던 김세장, 백계체 등과 어울려 학문을 교류하였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그는 많은 저서를 남기기도 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민막소, 진황소, 개량소 등의 문집을 남겼다고 한다. 정자에 관심이 많은 나는 그의 저서를 보는 것이 탐진강변의 정자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여기저기 그의 문집이 있는 곳을 수소문하였다. 인천 이씨 문중에 문의를 하였지만, 책임있는 사람들마저 그의 문집의 존재 여부를 알지 못했다. 유림마저도 답답하다고 말했던 이유는 이것으로 설명이 되는 셈이다. 그의 문집은 부산면 유량리 석곡 마을에 있는 금계사(金溪祠)에 보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문집은 1981년 홍수로 인해 유실되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 영귀정 독취정 뿐만 아니라, 선조의 소중한 문집류마저 정처를 모른다.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디 여기에 거론된 그런 것들뿐이겠는가. 1913년의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서편제는 보성 소리로 인식되고 있는 현실이다. 서편제의 고향이 보성이냐, 장흥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문화란 어느 동네의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이 정도는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서편제의 고향은 장흥이었다는 점이다. 장흥 출신들이 서편제를 이루었고, 그들이 노는 판 또한 장흥이었다. 단지 장흥 땅이었던 웅치 회천 등이 보성에 편입이 되면서 서편제의 고장이 보성이라는 주장이 먹혀든 것이다.

문화란 지자체의 논리대로 되지는 않는다. 행정구역상의 선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소리의 고장이 어디냐를 따지려면, 그 판이 어디냐를 분석하고 권역을 묶어야지, 보성이니 장흥이니 하는 것은 지역이기주의에 다름 아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문제점은 이 정도로 지적을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대안이 없는 비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청사진만 한없이 그려댄들 실현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얼마 전에 탐진댐 내의 인공섬 문제가 불거진 적이 있다. 인공섬에 대한 나의 입장을 피력하면 나는 당연히 반대이다. 나의 이 입장을 두고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반대는 조건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아직까지 예를 들었듯이 장흥을 이끄는 사람들의 문화 마인드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있는 문화재마저 훼손을 하고, 있는 관광 자원마저 버려 두는 마당에 새로운 어떤 것을 세운들 그 결과는 치적일 뿐이다. 이름 넣고 비석 세우기 위한 것이라면 어떤 새로운 것도 장흥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거기다가 물 부족이니, 수질오염이니 말이 많은 마당에 댐 안에 인공섬을 만들어 관광지로 만든다는 발상은 이치에 맞지가 않다. 나는 댐 위주의 물 관리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기왕에 만들어진 댐을 오염시키는 것은 더욱 반대이다. 광주호 동복호도 몸살을 앓고 있는 마당이다. 그 댐들이 모조리 오염되면, 또 물 부족을 이유로 새로운 댐을 만들 것인가?

거기다가 인공 섬 관광단지는 발상부터가 틀렸다. 수몰 지역에서 나오는 그 많은 고인돌과 문화재마저 버려두면서 무슨 인공섬이며 관광단지라는 말인가.

새로운 무엇을 만들기에 앞서 지금 밖으로 새나가고 있는 문화재 유출부터 막아라.
그리고 활용 가능한 자원을 최대한 이용하여, 지금 있는 것만이라도 제대로 가꾸어라.
요즈음 공공근로 사업이라는 것이 있다. 그 사람들을 길가의 잡초 제거에 쓰는 것도 좋겠지만, 나는 기왕에 공공근로 사업을 한다면, 장흥에 산재되어 있는 문화재들에 걸레질 한 번이라도 더 하게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시피 덕실보 너머의 독취정은 접근조차 용이하지 않다. 보위에 작은 다리라도 하나 놓는다면, 무너지는 정자나마 가까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화 정책이란 좌충우돌하면서 해 나갈 성질의 것이 아니다. 큰 틀을 가지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나가야 한다. 가령 탐진강변의 정자 문화권을 하나의 틀로 잡고, 그것에 대한 책자를 내서 홍보하는 방법도 좋을 것이다. 물론 비슷한 책자는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런 주먹구구식의 책자는 일반인들에게 읽히지도 않을뿐더러 소중한 국고만 낭비하게 마련이다. 단돈 백 원을 쓰더라도 효과 있게 쓰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것뿐이 아니다. 장흥 출신의 문인들이 많다고 떠들지만 말고, 당장 장흥 도서관에 향토 작가의 코너라도 만들어라. 최근에 장흥 출신 문인들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

그들의 등단작이 있는 잡지나 발표 잡지를 모으고 자랑하는 것도 큰 돈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문화사업이다.

아까는 농담처럼 이야기하였지만, 나는 정말 문화의 수도를 꿈꾼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조그만 관심과 노력이 없이는 가망택도 없는 일이다. 언제까지 남의 탓만 하는 것처럼 미련한 것도 없다. 여기 계신 분들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자기가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문화재에 대한 관심도 많지만, 아무래도 토속어에 대한 관심이 더 많다. 사라지는 우리의 토속어를 모아서 '장흥의 토속어 사전'을 만들면 어떨까? 그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어른들이 쓰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적어두면 된다. 우리 각자가 메모해 둔 그것을 모았을 때 그것이 바로 '토속어 사전'이 되는 것이다. 무슨 대규모의 행사를 하여 사람들을 끌어 들이는 것보다, 다른 곳에는 없는 토속어 사전 하나 만드는 것. 정자 문화권에 대한 이야기를 묶어 책 하나 내는 것. 그것이 장흥다운 것이다.


필요하다면 독취정 앞의 독실보에 줄배 하나 놓아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오늘 이 자리는 '장흥 문화 마당'의 창립을 위해 준비된 자리이다. 장흥 문화 마당은 남을 탓하기에 앞서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모임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아무도 관심 보이지 않는 버려지고 훼손되는 문화재들을 감시하고 알리는 역할도 곁들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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