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정/한학자
김규정/한학자

[지난 호에 이어]

丙申自寶盖之盤龍內翰申公最 出佐關北幕 行過德源 遣郵卒致書曰 由旬之地 未獲瞻仰 弟子緣薄 其欽重又若是 己亥初冬 以嵓老且病 歸侍 華嚴開 春正月嵓順寂 繇是居無㝎所 或南或北 專以敎詔爲己任誘迪學者 必以眞慈善導 不爲表襮激滯磨昏 少無忤色 人皆敬服 師之所詣 超今古絶依倚 駈山塞海 融會爲一味 深砭學者守株刻舟之病 醫門多疾 疑難鋒出 辨決如流 譬如鯤鯨蝘鼠 共飮河海 不過滿腹而已 虛而徃實而歸 憧憧不絶 坐曹溪道場前後一紀 寺有四大殿闕肖像 命工揑而塑之 四殿實六軀 從而繪畫者如之 凡諸駐札 繪若塑其數幾千 或難之何以有爲爲 必無爲爲 荅曰爾見獨足而行者乎 佛之爲佛 以福慧雙行而已 故稱兩足尊 其所守不偏大致類是 丙午施絳紗于九月之元淨 越明年 憇錫于黃岡之深源 節度使成公杙 別乘尹公遇甲 皆馥師之道 俄有疾 節度數以价問 遺之以藥 厥秋七月 遷席玅香 海衆駢趍 至數百餘指 先是閱禪門拈頌 至淨嚴遂禪師偈曰 承春高下盡嬋妍 雨過喬林呌杜鵑 如服一杯降氣湯 胸次灑然 乃掩卷曰 凡諸語言文字 盡爲糟粕 豈有餘味也 至是據猊座 談柄一揮 顓暢禪旨 門風峭峻一席皆瞪目聳聽曰 曾未之有 至有涕洟而慶法者 持蠡之徒 莫能闚其涯涘望洋而退者盖夥 次年春王正月 告衆曰 捨此一報身 必有所將歸 嶺北理杖屨 二月甲申 移入仲州五峰之三藏夏四月己巳 示微恙 府伯洪公錫龜數問之與成藥 師却之曰 死生有數安用藥爲 六月乙酉 靧浴更衣 鳴楗椎訣衆曰 從朝而行 及暮而息 未有長行而不息者 吾將息矣 汝等各信自心 勿外邊浪走 老僧生七十有九 坐六十有五 年非不耆 臘非不高 何所慊焉 毋懊惱 毋厚葬 毋封塔 求諸銘屈三指示之 有索辭世偈者 師曰吾常笑諸方所爲 况自爲之耶 幸勿聒撓㝎心 後三日丁亥日至禺中 喚侍僧曰 今日早齋齋罷 幼艾環擁丈室 令各籲無量壽佛盡十聲 結趺向西 合爪而坐化 經七日癸巳 遂闍維於寺之東麓六郡緇素畢集 頂門一骨 爆出香薪之外 門人覺屹等 奉歸雪峰山碧松臺 誦呪懇求三七日 獲舍利兩粒 即明年三月初七日也 起方墳度安者凡三所仲州之五峯 鶴城之雪峯 昇平之曹溪也 自易簀比 樹塔之日 瑞徵非一 不可殫記 初校理趙公重呂 自未釋褐 英聲振一世 與師結方外交 當世名公魁士之慕眞乘者鮮 不與善 唯東嶽李公安訥 澤堂李公植 相國金公堉 侍郞任公有後 最相厚 禪宴之隟 又善偈句有歌詩一卷 門弟子各得皮髓 爲人師範者 三十有二人 雪峯海蘭天冠敏機五峯喆照盤龍廣泐九月天訥爲之首或藏嵓穴而獨善 或委軀命以衛護者逮七十有奇 胚胎前光 彜範來蒙 大闡臨㴉宗風 垂四十載 果如休所誌 性聦早游先師之門 最承法施澒恩 樑木忽摧 德音永閟 一旦奄成千古悲 不勝懷摭其世人所共聞見之章章者 謹狀

출전 [翠微大師集]

병신년(효종7년1656)에 보개산(寶盖山)으로부터 반룡사(盤龍寺)로 갔는데 내한(內翰, 翰林學士) 신공 최(申公最)가 관북(關北)지방의 좌막(佐幕, 감사ㆍ유수ㆍ병사ㆍ수사를 수행하던 막료)으로 나가면서 행선지가 덕원(德源, 함경남도 남단 동해 가의 고을)을 지나가게 되자 우졸(郵卒, 역참의 병졸)을 보내 서한을 전하며 말하기를, “유순(由旬. 40리 혹은 30리)의 땅에서도 우러러 볼 수 없으니 제자는 인연이 야박하기만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그가 대사를 공경하고 중시한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기해년(효종10년1659) 초겨울에 벽암대사가 늙고 병들었기 때문에 돌아가서 시봉하면서 화엄법회를 개설하였다. 신

다음 해 정월에 벽암대사가 순적(順寂)하자 이로부터 일정한 거소(居所)없이 혹은 남쪽으로 혹은 북쪽으로 운수 행각하며 오로지 가르침(敎詔)만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다.

배우는 자들을 유인해 교도할 적에는 반드시 참된 자애의 마음으로 선도하면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격려하고 어둠을 제거해 줄 때는 조금도 거스르는 낯빛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복종하였다.

대사의 조예(造詣)는 고금을 뛰어넘어 걸림이 전혀 없이 산을 몰고 바다를 막아 하나의 맛으로 융회관통(融會貫通)하였다. 

배우는 사람들의 수주대토(守株待兎)ㆍ각주구검(刻舟求劍) 같은 어리석은 병통에 깊게 돌 침을 놓아(深砭) 깨우치게 하였다.

의원의 문에는 환자가 많은 것처럼 의심나는 일이 벌 떼처럼 일어나더라도 물이 흐르듯이 분별하여 틔워 주었다.

비유하자면 두 마리의 큰 물고기와 두더지가 함께 하해(河海)의 물을 마시더라도 각자 자신의 배를 채우는데 불과한 것과 같았으며 텅 비어서 왔다가 꽉 채워서 돌아갔으므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조계 도량에 좌정(坐停)한 햇수가 전후로 열두 해(一紀)였기에 사찰 사대 전(四大殿, 第一四王ㆍ第二圓通ㆍ第三大延壽ㆍ第四空相)에 초상이 빠진 것을 보고 공날(工揑, 工匠)에게 명하여 소상(塑像)을 빚도록 하고 나서 사대 전(四大殿)에 여섯 구를 봉안하였으며 회화(繪畫)도 그와 같이 하였는데 모든 주찰(駐札, 駐箚. 임지에 머물러 일을 처리함)의 회화는 그와 같이 소상을 빚도록 하였으니 거의 수천이었다.

혹인(或人)이 비난하기를, “어찌하여 유위의 일을 하는가. 반드시 무위로 해야 한다.”라고 하자, 대사가 답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외발로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는가. 부처가 부처 된 이유는 복혜(福慧, 복덕과 지혜) 두 가지를 아울러 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족존(兩足尊, 세존. 두 다리를 가진 유정 중에 제일 존귀하다는 의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사가 지키는 것은 대체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병오년(현종7년1666)에 황해도 구월산 원정사(元淨寺)에서 법석(法席, 絳紗帳)을 베풀고 그다음 해(越明年) 합천 황강의 심원사(深源寺)에서 석장을 세웠다.

절도사 성공 익(節度使成公杙)과 별승 윤공 우갑(別乘尹公遇甲) 모두가 대사의 불도와 덕화에 귀의하였다.

갑자기 대사가 병에 걸리니 절도사는 자주 사자를 시켜 문안하고 약을 보내왔다.

그해 가을 칠월에 묘향산으로 자리를 옮기자 한꺼번에 달려간 바닷가 대중이 수백 여인을 가리켰다.

이보다 앞서 대사가 〚禪門拈頌선문염송〛을 열람하다 정엄 수수(淨嚴守遂)선사가 게송을 읊은 대목 “봄을 맞아 위아래가 다 곱고 고운데, 비 지나간 우거진 산림에 두견새 부르짖네(承春高下盡嬋妍 雨過喬林呌杜鵑).”라는 데 이르자 한잔의 강기탕(降氣湯)을 복용한 것 같이 가슴속이 시원하였으므로 이에 책을 덮고 말하기를, “무릇 모든 언어 문자는 다 술지게미일 따름이니 어찌 남은 맛이 있겠는가(凡諸語言文字 盡爲糟粕 豈有餘味也).”라고 하였다.

이때 이르러 예좌(猊座, 獅子座. 고승이 앉는 자리)에 앉아 담론하고 불자(拂子)를 한번 휘두르며 선지(禪旨)를 전단(專斷)하여 펼쳐 나가니 문풍(門風)이 뛰어나고 기품이 있으니(峭峻) 온 좌중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귀 기울이며 말하기를,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曾未之有).”라고 하였으며 심지어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울고 법을 축하하는 자도 있었다.

어리석은 무리들(持蠡之徒)은 그 한계(涯涘)를 엿볼 수 없었으므로 탄식하며 물러나는 자도 대개 많았다.

다음 해(현종9년1668) 봄 정월에 대중에게 고하며 말하기를, “이 하나의 보신(報身)을 버리고 반드시 장차 돌아갈 곳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영북(嶺北, 대관령 북쪽)으로 행장(行裝, 장구杖屨. 지팡이와 짚신)을 차리도록 하였다.

2월 갑신 일에 북관(北關) 중주(仲州) 오봉산의 삼장사(三藏寺)로 옮겨 들어가 여름 4월 기사 일에 조금 편찮은 기색을 보이시자 부백(府伯) 홍공 석구(洪公錫龜)가 자주 문안을 드리며 조제한 약(成藥)을 보내왔는데 대사가 물리치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일(死生)은 운수인데 어찌 약을 써서 무엇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6월 을유 일에 세수하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서 범종을 울려 대중과 결별하며 말하기를, “아침부터 일어나 걷다가 저녁 먹을 때가 되면 쉬는 법이다. 항상 걸어 다니기만 하고 쉬지 않는 경우는 있지 않으니 내 이제는 쉬려고 한다. 그대들은 각자 자신의 마음을 밝히고 바깥으로 마구 내달리지 말라. 노승은 태어난 지 79년이 되었고 안거는 65번을 동참했으니 늙지 않은 것이 아니요 법랍이 높지 않은 것이 아니니 부족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괴로워하지 말고 후하게 장례도 치르지 말고 탑을 세우지도 말라.”라고 하였다.

명을 청하니 세 손가락을 굽혀 보여주었고 또 어떤 이가 임종 게를 구하자 대사는 말하기를, “나는 항상 사방에서 하는 것을 비웃었는데 하물며 스스로 그렇게 하겠는가. 행여나 떠들썩하고 어지럽게 하지 말고 선정의 마음에 머물라.”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사흘 뒤 정해일 오전 10시경(禺中, 巳時)에 이르자 시자 승을 불러 말하기를, “오늘은 재를 빨리 지내도록 하라.”고 하여 재가 파하고 대중들이 방장실을 둘러싸자 각자 무량수불을 열 번씩 소리쳐 부르짖게 한 뒤에 결가부좌를 틀고 서쪽을 향하여 깍지를 끼고 앉아 입적하였다.

이레가 지난 계사 일에 드디어 절의 동쪽 기슭에서 다비식을 행할 적에는 여섯 고을 승속(緇素) 모두가 운집하였다.

정문의 뼈 한 조각이 향탄 목(香薪, 화장 섶나무) 밖으로 튀어나왔으므로 문인 각흘(覺屹) 등이 수습해서 설봉산 벽송대로 돌아가 봉안하고 주문을 암송하며 간절하게 구한 지 삼칠 일(21일)만에 사리 두 과(二顆)를 얻었으니 바로 다음 해 삼월 초칠일이었다.

이제 막 사리탑을 세워 봉안한 곳이 모두 세 곳이니 중주의 오봉산ㆍ학성의 설봉산ㆍ승평의 조계산이다.

역책(易簀,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으로부터 탑을 세우는 날까지 편집하면 상서로운 징조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두루 기록할 수가 없다.

지난번 교리(校理) 조공 중려(趙公重呂)가 처음 벼슬(釋褐)하지 아니할 때부터 훌륭한 명성으로 한세상을 울렸는데 대사와 방외의 교분을 맺었다.

그 당시 세상에 훌륭한 재상이나 뛰어난 선비로서 진실한 가르침(眞乘)을 흠모하는 자는 대사와 잘 함께하지 않는 이가 드물었는데 다만 동악 이공 안눌ㆍ택당 이공 식ㆍ상국 김공 육ㆍ시랑 임공 유후와 가장 사이좋게 지냈다.

선연(禪宴, 坐禪)의 틈에 또 게구(偈句, 게송)를 잘 지어서 가시(歌詩) 1권이 남아있다.

문하 제자 중에 대사의 가죽과 골수를 각자 얻어서 다른 사람의 사범(師範)이 된 자가 32인인데 그중 설봉산의 해란(雪峯海蘭)ㆍ천관산의 민기(天冠敏機)ㆍ오봉산의 철조(五峯喆照)ㆍ반룡산의 광륵(盤龍廣泐)ㆍ구월산의 천눌(九月天訥)이 첫손에 꼽힌다.

혹은 암혈에 몸을 감추고 독선기신(獨善其身, 홀로 자기 몸을 선하게 한다)하는 자도 있고 혹은 몸과 목숨을 맡겨 불법을 위호(衛護)하는 자도 있는데 70여 인 남짓하다.

앞사람의 빛이 발단(胚胎)이 되어 뒷사람의 몽매함을 일깨우며 이범(彜範,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법칙)을  세우고 임제의 종풍을 크게 천명한 것이 거의 40년이었으니 과연 부휴선수대사가 표지(標識)한 것과 같았다.

필자 성총은 어려서부터 선사(先師)의 문하에 유학하여 법보시의 잇단 은혜를 가장 많이 입었다.

태산양목(泰山樑木)이 갑자기 꺾이고 덕음이 영원히 사라져 하루아침에 갑자기 천고의 비통함을 맛보게 되었으니 가슴을 열 수가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함께 보고 들어 생각한 것을 삼가 진술하였다. 

注)

逕莛 - “逕庭”이 맞다. 원문을 바로 잡아 번역한다. 경(逕)은 문밖의 좁은 길을 말하고 정(庭)은 방 아래의 뜰을 말하는데 전하여 서로 현격하게 다른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너무나도 현격하게 차이가 나서, 상식에 가깝지 않다.[大有逕庭, 不近人情.]”라는 말이 있다.

由旬之地 - 범어(梵語)의 음역(音譯)으로서 제왕(帝王)의 하루 행군 길을 이르던 말. 40ㆍ50ㆍ60리라는 말이 있고, 80ㆍ60ㆍ40리라는 말이 있음.

守株待兎 -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을 적에 토끼 한 마리가 달아나다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서 목이 부러져 죽자 이때부터 일손을 놓고는 그 그루터기만 지켜보며 토끼가 다시 오기를 기다렸으나 토끼는 끝내 다시 오지 않았다는 고사가 《한비자(韓非子)》 〈오두(五蠹)〉에 나온다.

刻舟求劍 - 《여씨춘추(呂氏春秋)》 찰금(察今) 편에 보이는 말로 배를 타고 가다 칼을 물속에 떨어뜨리고 뱃전에다 칼이 떨어진 자리를 표시해 두어 배가 정박한 뒤에 그 표시한 자리의 물속에서 칼을 찾는다는 뜻이다.

絳紗 - 강사장絳紗帳. 후한後漢 마융馬融이 붉은 비단 휘장을 쳐 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후세에 제자를 가르친다는 뜻으로 이 말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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