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정/한학자
 김규정/한학자

上帝降衷 下民禀賦 最貴乎萬物者 以其有五倫 至聖垂誥 大士弘闡 最尊乎衆庶者 以其修三學 偏行尙難 雙修豈易 間氣斯來 妙軌圓現 豈異人哉 是我師也 乾隆丁亥四月十一日 即我英庙朝四十四年 和尙示生于湖南茂長縣 姓李氏 貫全州 派出璿源 以德興大君爲十一代祖 諱亘璇 號白坡 法嗣正宗於淸虛禪師 爲二五世孫 祖諱亨三 考諱宗煥 伯諱天柱 承前裕後 三世不替孝 母金海金氏 亦能孝舅姑以配其夫也 和尙以孝家之子 懷胎不動 襁褓不啼 令萱堂 勞未有貽 昏晨定省 出入告面 於家庭訓若畫一眞 所謂孝順還生孝順子 簷水不差 實信乎斯矣 然有不常之事 合無方之道 至癸卯乾隆五十年正庙朝七年 於禪雲 課誦鄒經 間閱竺典 忽一日愕且唶曰 目連救母於極苦 玄沙度父於永樂 此眞孝之遠者 而其奈父母拘於俗愛執留不許何 於是躡踰城古事 不告出家甲辰四月初八日 恩老諱詩憲 戒師號蓮谷 自是不留意於俗典 直下手於正法 歷叅講肆 霧市讓價 深窮義叢 盤根迎刃 庚戌秋乾隆五十七年正宗十四年 受具於雪坡和尙 未及數語 箭鋒相投 和尙大悅曰 東國指南 在乎爾躬 勤而行之 居無何 和尙化去 受具於庚戌九月晦 翌年正月初三日 師入寂 雖墨巾罹首 實師言在耳 豈自喜無負 年至冠六 把茅住庵 接待方來 悟解高明 辨論決穴 然自謂虛浮狂慧 汨沒於文義之海 僞巧情見 纒繞於名相之叢 何暇澄禪靜慮得入於忘機之域乎 是以行年四十有五嘉慶十六年辛未純宗十一年也 悟徃不諫 知來可追 勇撤講案 結茆於楚山龍門洞 習定均慧矣 八表龍象以爲義 欲明決學 且師安于于而來 若其敎文 不無問處 至於禪旨 將至掃地 胡不可悶 傳法流通 是報佛恩 師其深思焉 辭不獲已 重振玄門龍門五年安居 復於雲門 大揚禪旨 更欲貽謀 先以臨濟三句 括盡一代禪敎 以爲禪文手鏡 而拖照諸家章䟽 言言無不昭著 句句自然打合 仍畫蛇足 文字雖喩於蜂牎 水母猶待乎蝦目 是以廣釋拈頌 密顯數百則 了沒巴鼻 羚羊掛角之本分眞如 要解壇經 的示卅三祖直指人心見性成佛之世傳家業 金剛五解 發揚即敎明宗之難能手段 高峰禪要 明示奮志透關之直截宗眼 又作法節次之重編 起信䟽記之校刊 無非即世諦之莊嚴 成妙法之供養也 

▲순창 구암사 백파대율사 비
▲순창 구암사 백파대율사 비

◆백파 강사 행장

위대하신 상제(上帝)께서 충을 내려주어(降衷) 하민(下民)들이 품부(禀賦) 받았으니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이 오륜(五倫)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지극한 성인(聖人)이 가르침을 내리시어 대보살(大士)이 크게 선양하니 많은 사람 중에 가장 존귀한 이유는 이 삼학(三學, 戒ㆍ定ㆍ慧)을 잘 닦아 아직도 어렵게 두루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혜쌍수(定慧雙修)가 어찌 쉽겠는가마는 간기(間氣, 걸출한 인재)들이 모여들고 오묘한 법의 궤도가 원만하게 나타나니 이 어찌 재주가 신통하고 비범한 사람이 아닌가. 바로 우리의 선사이시다.

건륭 정해년(영조43년1767) 사월 열하룻날(四月十一日) 곧 우리 영묘 조(英庙朝) 44년(?) 화상은 호남 무장 현(湖南茂長縣)에서 태어났다.

성은 이씨(李氏)이고 본관은 전주(全州)로 왕의 집안(璿源)에서 갈려나와 덕흥대군(德興大君)을 11대조로 삼았으니 법휘는 긍선(亘璇)이고 호는 백파(白坡)이다.

정종(正宗, 정통) 청허선사(淸虛禪師)의 법사(法嗣, 법통을 이어받은 제자)로 7세손이 되고 속가(俗家) 할아버지의 휘는 형삼(亨三)이고 아버지의 휘는 종환(宗煥)이고 큰아버지의 휘는 천주(天柱)이니 전세의 아름다움을 이어 후세에게까지 덕행을 남겨 주어 3세가 효성이 변함없었으니 어머니 김해 김씨도 시부모(舅姑)에게 효도를 잘하여 그 지아비에 걸맞았다.

화상(和尙)은 충효가문의 자제로서 태아였을 때도 어머니 뱃속에서 얌전했고 강보에 싸여 있을 때도 울지를 않았다. 

훤당(萱堂,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을 힘들게 하고자 하지 않아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리며 집밖에 나가고 들어올 때는 얼굴을 보이니 가정에서의 가르침은 참으로 한결같아서 이른바 “착하고 효성스러운 사람은 착하고 효성스러운 아들을 낳을 것이니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면 어긋남이 없다(孝順還生孝順子簷水不差).”라고 하는 말은 진실로 여기에서도 믿을 만하다.

그러나 늘 있지 않은 일이 있으면 끝없는 도에 계합하니 (然有不常之事 合無方之道) 계묘년 건륭55년(?건륭48년) 정묘7년(1783) 선운사에서 <맹자鄒經>를 일과로 외우면서 불경(竺典)을 한가로이 펼쳐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놀라 탄식하며 말하기를, “목련 비구(目連比丘)가 지극한 고통에 처한 어머니를 구원하고 현사선사(玄沙禪師)는 영원한 낙원(永樂)으로 아버지를 천도했으니 이들은 참으로 효가 깊은 사람들(孝之遠者)이지만 이 어찌 세속의 사랑에 묶여 허락하지 않는다고 부모에게 구애될 일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에 성(城)을 밟고 뛰어넘어(躡踰) 아뢰지도 않고 출가했던 옛날 일(古事)을 본받아 갑진년(정조8년1784) 사월 초파일 은로(恩老) 법휘(法諱) 시헌(詩憲)의 제자가 되고 법호(法號) 연곡(蓮谷)을 계사(戒師)로 하여 사미계를 받았다.

이로부터 속전(俗典, 세속의 전적)의 뜻에 머물지 않고 곧바로 정법(正法, 불교) 공부에 착수하여 성시(盛市)를 이룬 강사(講肆, 講席)를 차례대로 찾아다니고 값어치를 사양하는 강의총서(講義叢書)를 깊게 궁구하니 서린 뿌리들이 칼을 들이대는 대로(盤根迎刃) 곧장 쪼개졌다.

경술년(정조14년1790) 가을 건륭57년(?건륭55년) 정종14년 설파화상(雪坡和尙)에게 구족계를 받고 몇 마디가 떨어지지도 않아서 화살과 칼끝이 허공에서 서로 부딪치자(箭鋒相投) 화상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동국의 나침반이 네 몸에 있구나. 부지런히 행하라(東國指南 在乎爾躬 勤而行之).”라고 하고는 얼마 안 되어 설파화상은 교화를 펼치고 떠나갔다. 

경술년 구월 그믐날 구족계를 받고 다음 해(정조15년ㆍ신해년1791) 정월 초사흗날 설파대사(雪坡大師)가 입적했다.

검은 두건(墨巾)을 머리에 쓰고 있어도(服喪, 상을 당하여 상복을 입음) 진실한 대사의 말씀은 귓전에 남았는데 어찌 홀로 기뻐하다 잊을 수가 있겠는가.

나이가 스물여섯에 이르자 한줌 띠 풀을 얹은 암자에 살면서 멀리서 찾아드는 선객을 접대하며 고명한 깨달음(悟解)과 변론(辨論)으로 결단하고 실행했다. 

그러나 스스로 이르기를, “허탄한 광혜(狂慧, 학문을 통한 이해)라는 것은 문의(文義, 문장 뜻)의 바다에 빠져 거짓으로 꾸민 정견(情見)에 불과하다.

명칭과 모양의 떨기에 속박되다가 어느 겨를에 세속을 잊은 영역에서 고요히 생각하여 선을 맑게 하고 여래에 들 수 있겠는가.”라고 했으니 이때 나이는 마흔다섯으로 가경16년 신미년 순종11년(1811년)이다.

이미 지나간 일은 어찌 할 수가 없음을 깨달았고 앞으로 올 일은 따라갈 수가 있다(悟徃不諫知來可追)고 용감하게 강안(講案, 강회 참석자 명단)을 거두고 초산(정읍) 용문동(楚山龍門洞)에 띳집을 엮고 습정균혜(習定均慧)를 닦았다.

전국의 고승대덕(八表龍象)들이 의롭게 여기기도 하고 자신의 배움을 밝게 결단하고자 하자 얼마간은 스승께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달라고 학인들이 줄지어 찾아와 청하며 말하기를, “만약 그 교문(敎文)에 물을 곳이 없지 않은데 선지(禪旨, 선을 나타내는 뜻)에 이르러서 장차 완전히 사라진다면(將至掃地) 어떻게 번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법(傳法, 교법의 계통을 전하여 줌)의 유통(流通)은 부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되니 스승께서는 이점을 깊이 생각하여 

주십시오.”라고 했다. 

사양하고 부득이하게 용문사에서 5년간 안거하다 현문(玄門, 山門)을 다시 떨치고 운문사로 돌아가서 선지(禪旨)를 크게 선양했다.

다시 좋은 계책을 남기고자 먼저 임제 3구(臨濟三句)로 일대의 선교를 모두 담아서 <선문수경禪文手鏡>이라 이름하고 제가(諸家, 여러 대가)의 장소(章䟽, 文章과 注䟽)를 끌어와서 이리저리 대조하니(拖照, 타조) 한마디 한마디가 밝게 드러나지 않음이 없었고 글귀마다 자연스럽게 타합(打合)해서 오히려 뱀을 그리려다 발을 더했다고 했다.

문자가 비록 봉창(蜂牎,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몸부림)을 깨우치더라도 수모(水母, 해파리의 종류)는 오히려 새우의 눈을 필요로 한다(水母目蝦).

이 때문에 자세하게 풀이한 염송(廣釋拈頌)이 수백의 공안을 세밀하게 나타내더라도 선이란 틀어잡을 코가 끝내 없는 것(了沒巴鼻)이니 마치 영양이 본분진여本分眞如라는 뿔을 나뭇가지에 걸어놓고(羚羊掛角) 잠자는 것과 같다.

<요해단경要解壇經>은 33불조의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의 대대로 전하여 내려오는 가업(世傳家業)을 적시(的示)하여 알렸고 <금강오해金剛五解>는 바로 가르침으로 종지(宗旨)를 밝히기 어려운 수단들을 발양했다.

<고봉선요高峰禪要>는 뜻을 분발하여 거리낌 없이 종안(宗眼)의 관문을 뚫어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고 또 <작법절차作法節次>를 거듭하여 편찬하고 <기신소기起信䟽記>를 교정하여 간행하니 바로 장엄한 세간의 진리 아님이 없어서 묘법 공양을 이루어냈다고 말할 만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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