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정/한학자
김규정/한학자

諱德眞 號虛舟 姓金 父失 母朴氏嘉慶二十 純廟十五 乙亥三月十三日生 光緖十四年 李太王二十五 戊子十月十二日 或十一月十七日 化壽七十四 夏六十三 驅烏之年 俱喪怙恃 無强近之族 轉乞千門 圖生一命 抵曹溪之慈應房 掛口於居禪十匙之飡矣 十一歲乙酉 有一褸褐首座見而喜曰 汝來何暮 與吾結師 佐緣於佛門可乎 曰然 座曰 吾無立錐之地 汝亦錐也無 其於生活何如 曰千村萬落 誰非吾之粮 南市北鄽 何無我之衣乎 衣粮不足畏 唯願善噵指歸 仍以剃零受具於三日佛前 猶蓮花之出泥 似鰌魚之成龍 於是肘掛鉢囊鈴動村閭 張三李四之隨喜捨施 不能枚擧 由是師佐衣粮 從此豊稔矣 隨節遊方 恩坐禪房 自歸講肆 叅枕溟而學經 禮印坡而得禪 不求甚解文字糟粕 只究所詮了義 人莫測其意 恩傅於三日庵結臈次 見盜粮金 甚痛切之 師曰 執金者 猶緊用 何足爲憂 更乞非難 乃踏雪宿霜 未十日 更辦九旬粮奉呈 無障安居 難忍能忍 凡如此也 三十竪幢隱寂 得法於靜潭堂下住本庵 學者坌集 講授答難 必瞑目而如斬釘截銕焉 一日學徒遊山 師以大書佛字於房中 隱坐方丈 試其知否諸生會見唱曰 遮佛字誰書云 師出曰 君等旣知佛字 吾筆亦足云 衆各歸本之際 祈地藏七日 夢得甑餅一甌 自是慈德滿身 聰慧過人 得不忘念智禪風遠播 東方名勝 無所處而不靡然物欲剝落 所住無定 八影之西佛 高山之花嵓 求禮之五山 谷城之吉祥 結夏之院 士女成市 以普光明智說了 莫不嗟咜曰 面謁百倍乎耳聞云 住厲山深谷寺 一日就庭彷徨 飮盥水一口 有信女見而驚曰 此汙水師何吸 師曰 其味則一也 臨機法語 槩此類焉 戊子秋赴請 入城於東別宮 設普光會七日祈祝 貴妣重臣 無不拈香 事師禮 會畢 師曰 紅塵紫陌 是縉紳之所捿 碧砌朱宮 何褸褐之久居 願許山鳥海龍之微忱 乃以東門外大原寺 爲下山所 使中舍陪行 輿至興國 追後臣僚宮屬 絡繹十許里 至十月十日示微疾 尙宮千氏 親自侍湯 邀醫點藥師却曰 生而死 死而生 若海漚之起沒 來而去 去而來 似嶺雲之聚散 湼槃路頭 現在足下 藥安用爲 連絕湯飮 至二日晨 浴衣說偈已 奄然而化貴妃臣妾 聞而痛悼云 舟楫先折 吾儕誰渡 香燈紙燭 布帛氈幣 若霧市雲衢 未叅宮妃婦女 與欲淸淨 投香望叅 人物注泊 國城震傾 時今上恠而問之 黃門奏曰 虛舟僧死故也 上曰 僧葬 便同因山云云 但庸紙燭香火而茶毘 火尙熾燃而洞宵 一道祥光亘空洞城 人天廓信也 弟子退雲孝等 收靈骨塔于寶石曹溪云尒

출전 [曺溪高僧傳]

◆조계종사 허주 선사 전

휘는 덕진(德眞)이고 호는 허주(虛舟)이며 성은 김씨(金氏)이고 태어날 때 아버지는 안 계셨으며(遺腹子) 어머니는 박씨(朴氏)이다.

가경 20년(순조15년1815) 을해년 삼월 열 사흗날 태어나 광서 14년(고종25년1888) 무자년 시월 열 이튿날 (혹자는 11월 17일)에 입적하였다. 세수는 74세이고 하랍은 63년이다.

구오의 나이(驅烏之年, 7~13세)에 부모를 다 여의고 도움이 될 만한 매우 가까운 친척(强近之族)도 없어 많은 집들을 전전걸식(轉轉乞食)하며 한 목숨만 살아갈 길을 도모하다(圖生一命) 조계산의 자응방(曹溪之慈應房)에 이르러 선방에 우거(寓居)하며 십시일반 간식(間食)을 입에 올렸다(掛口).

열한 살 을유년(순조25년1825)에 한 벌의 누더기를 걸친 수좌(首座)가 선사를 보고 기쁘게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이리도 늦게 왔느냐. 나와 사제(師弟)의 인연을 맺어 불문에서 구도의 길벗이 되지 않겠느냐.”라고 하자 선사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수좌가 말하기를, “나는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다. 그런데 그대는 송곳조차 없구나. 그러니 어떻게 생활하면 좋겠는가.”라고 하자 선사가 말하기를, “수없이 많은 시골마을에서 그 누군가는 제 먹을 양식은 주지 않겠습니까. 남북 시장 가게에 어찌 제 입을 옷이 없겠습니까. 옷과 양식은 두려워 할 것이 없지만 오직 바라는 것은 지귀(指歸, 귀착점)로 잘 인도해 달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인하여 삼일선원 불전(佛殿) 앞에서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연꽃이 진흙 속에서 피어난 것 같았고 미꾸라지가 용이 된 것 같았다.

이때에 팔꿈치에 바랑과 방울을 걸고 마을의 가옥을 돌아다니자 평범한 사람들이 따라다니며 희사보시(喜捨布施)하는데 낱낱이 들어 말할 수가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선사를 도울 옷과 양식이 풍요롭게 쌓이게 되었다. 계절 따라 사방을 유력하다 선방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은혜를 얻었다. 스스로 경전을 강론하는 곳(講肆)으로 돌아가서 침명대사(枕溟大師)를 참방해 불경을 배우고 인파선사(印坡禪師)를 참례하고서 선을 배웠다.

문자를 술지게미 같이 여겨 불구심해(不求甚解, 독서 할 때 요지를 이해할 뿐 字句를 지나치게 따지지 아니함)할 뿐이고 다만 소전(所詮, 문자에 의해 나타나는 뜻)의 요의(了義, 불법의 이치)만을 궁구하였는데 사람들은 선사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은부(恩傅, 처음 중이 된 후 길러 준 스승)가 삼일암(三日庵)에서 동안거를 나던 차에 도적이 양식과 금전을 훔쳐갔는데 그것을 심히 통절해 하는 모습을 보고 선사가 말하기를, “금전을 훔쳐간 자는 외려 긴급히 쓸데가 있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다시 구걸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곧 눈길을 걷고 서리를 맞고 자면서 열흘이 안 되어 석 달의 양식을 다시 준비하여 받들어 올리자 안거하는데 장애가 없었으니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는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서른에 은적암(隱寂庵)에서 깃대를 세우고(竪幢) 정담당(靜潭堂)에게서 법을 얻어 은적암 아래 주석하니 배우려는 자들이 무더기로 모여들었다.

강학할 때 곤란한 대답에는 반드시 눈을 감고 못을 끊고 쇠를 자르듯 하는 과단성이 있었다(사람들이 우유부단하고 어물어물할까 두려웠기 때문).

하루는 학도들이 산에 유람을 갔을 때 선사가 승가대중의 방에다 크게 ‶불(佛)″자를 써 놓고 방장실에 편안히 앉아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시험하였다.

모든 학도들이 모여 보고 소리 내어 말하기를, “저 ‘불(佛)’자를 누가 쓴 것인가.”라고 하자 대사가 나와서 말하기를, “그대들은 이미 ‘불(佛)’자를 알았으니 내 글씨도 만족한다.”라고 하였다.

대중들이 각자 본래자리로 돌아갈 즈음에 이레 동안 지장기도를 하여 꿈에 시루떡 한 사발을 얻었다.

이로부터 자애로운 은덕이 몸에 가득 찼고 총명한 지혜가 남보다 뛰어났으며 불망염지(不忘念智, 한번 보기만 하면 모두 다 외운다. Photographic memory)를 터득해 선풍이 멀리까지 전파되자 동방의 명승지마다 관심을 갖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물욕이 박락(剝落, 깎여서 떨어져 나감)되자 머무르는 곳이 일정하지가 않았다.

팔영산의 서불암ㆍ고산의 화암사ㆍ구례의 오산암ㆍ곡성의 길상암 등은 하안거를 난 선원이다.

사내들과 여인네들(士女)까지 문전성시를 이루어 넓은 광명의 지혜(普光明智)로써 설법을 하였는데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이 말하기를, “직접 얼굴을 뵙고 나니 귀로 듣는 것보다 백배 낫구나.”라고 하였다.

여산 심곡사에 주석할 때 하루는 뜰에서 어정거리다가 세숫대야의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어떤 청신녀(淸信女,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여자)가 보고 놀라며 말하기를, “이 더러운 물을 선사께서는 어떻게 마신단 말입니까.”라고 하자 선사가 말하기를, “그 맛은 똑같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선사의 임기응변하는 법어는 대개 이런 종류이다.

무자년(고종25년1888) 가을에 재가자의 초청을 받고(赴請) 한양성 동 별궁에 들어가 보광법회를 개설하여 이레 동안 기도축원을 하였다.

귀비와 중신들은 향을 피우고 선사를 섬기며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법회를 마치자 선사가 말하기를, “흙먼지 뿌연 도성 거리는 바로 진신사대부들이 사는 곳입니다. 푸른 섬돌과 붉은 궁전이 어찌 누더기를 걸치고 오랫동안 기거할 곳이겠습니까. 바라건대 새는 산으로 돌아가고 용은 바다로 돌아가도록 자그마한 정성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고 이에 동대문 밖의 대원사를 하산할 장소로 삼자 중사인(中舍人, 동궁에 딸린 정5품 벼슬)으로 하여금 수레가 흥국사에 당도할 때까지 배행하게 하고 신료와 궁속이 뒤를 따랐는데 계속 이어져 십여 리에 이르렀다.

그해 시월 열흘날이 되어 경미한 질병을 앓으시자 상궁 천씨가 직접 시탕하면서 의원을 맞이하고 약을 달이자 선사가 물리치며 말하기를, “태어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나는 것입니다. 바다의 물거품같이 일어났다 잠기고  왔다 가고, 가고 왔다하면서 고갯마루의 구름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열반으로 가는 길이 현재 발아래 있는데 약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하고는 이어서 탕약 마시는 일을 끊었다.

이틀 지난 새벽에 이르러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게송을 설하고 매우 급작스럽게 입적하였다.

귀비와 신첩들이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며 “배와 삿대(舟楫, 세상을 구제하는 인물)가 먼저 꺾였으니 우리를 누가 건네주겠는가.”라고 말하였다.

향등과 지촉과 포백과 전폐가 저자 네거리에 구름안개처럼 쌓여 있는 것 같았다. 참석하지 못한 궁비와 부녀자들은 함께 청정한 향화결사(香火結社)에 투신하고자 삭망참례(朔望參禮, 초하루와 보름에 올리는 간단한 제사)하였다. 사람과 재물이 몰려들어 국성이 진동해 기울 정도였다.

당시 금상 고종이 괴이하게 여기고 묻자 황문시랑이 아뢰기를, “허주라는 중이 입적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자 금상이 말하기를, “중의 장례식인데 바로 인산(因山, 임금의 장례식)과 똑같다.”라고 하였다.

다만 지촉과 향화만을 써서 다비식을 거행하였는데 불길이 너무 세차게 타올라 하늘을 꿰뚫고 한줄기 상서로운 빛은 허공까지 뻗쳐 한양성을 환하게 비추자 인간계와 천상계(모든 중생)가 큰 신앙심을 일으켰다. 그의 제자인 퇴운(退雲)과 효오(孝) 등이 영골을 수습하여 보석사와 조계사에 부도 탑을 세웠다.

역자 注)

전라도 완도 태생인 범해 각안(1820~1896)이 저술한 〚東師列傳〛은 전라도 서부 해남 대흥사ㆍ강진 만덕사 주변의 청허 휴정 문파의 선승들 전기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전라도 곡성 출신인 금명 보정(1861~1930)이 상재한 〚曺溪高僧傳〛은 송광사ㆍ선암사ㆍ화엄사ㆍ쌍계사를 중심으로 전라도 동부지역의 부휴선수 종문의 종사들 일대기가 거의 전부다.

두 저서는 해동 불교사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사료이고 정신문화사전개에 있어서도 중요한 주춧돌이다.
 

고흥 팔영산 원경
고흥 팔영산 원경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