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정/한학자
▲ 김규정/한학자

[지난 호에 이어]

以歲辛亥 有牧庵大丈室 慈心所存 慧力自發 慨晬殿之未及黏彩悲 淨域之尙欠周莊 乃囑神足白朋法胤致浩與寺衆同心力 謨大役施重功 丹靑於佛殿與樓門 繪描於聖幀及先影 飛甍畫閣 噲噲其嚴 渥丹流金 森森其懿 是見玉林皆突 盍同珠岸不枯 嗟功業之盛休 誠古今之罕覩 若余者 緇林病槲 法海涓流 百家之文 謾咀嚼乎糟粕 五敎之學 徒鑚仰乎筌蹄 雖切酒變河水之心 奈乏箭穿鐵皷之力 五度出入栖息 固有因緣 六代先眞奉安 豈無情意 況此牧老 是我法嗣 雖曰他山 自同本寺 敢編先後名蹟 聯露多小奇功 詞曰

惟道之在天下 猶水之在地中 先蹟也後蹟也 一彼此無終始 不爲非不能 求之必可得 哿矣先後功 昭然今古蹟 彼蒼者以前 斯道也不滅

[無竟集文稿]卷之三

注)

日輪 - 중생의 업력으로 일어나는 바람에 의지하여 공중에 떠서 수미산의 허리를 돌면서 사대주(四大洲)를 비추는 태양. 

以石文之志能臻治道之功 - 당나라 양주(涼州) 산에서 나온 석문(石文)에 불자(佛字)가 있는 인연. <법원주림> 14권.

木鳬之戾止 - 신라시대 체징(體澄, 804~880) 대사는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날려 보낸 뒤 오리가 앉은 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聖幀(성탱) - 독성탱화(獨聖幀畵). 나반존자의 초상을 그린 탱화. 독성은 천태산(天台山)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독성(獨聖)ㆍ독수성(獨修聖)이라 불리는 나반존자(那畔尊者)를 일컫는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삼성각(三聖閣)에 수독성탱(修獨聖幀)인 나반존자도(那畔尊者圖)라는 독성탱화(獨聖幀畵)를 모신다.

鑚仰(찬앙) - 상대방의 도덕을 극찬할 때 쓰는 말이다. 안연(顔淵)이 스승인 공자의 덕에 대해서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다.〔仰之彌高 鑽之彌堅〕”라는 말이 <논어> 자한 편에 나온다.

筌蹄(전제) - 전(筌)은 물고기를 잡는 통발이고 제(蹄)는 토끼를 잡는 올무이다. 곧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잊어버리는 방편을 이른다.

신해년(영조7년1731)에 목암 방장실(牧庵大丈室)이 자애로운 마음을 지니자 지혜의 힘이 절로 우러나서 법전(晬殿, 수전)이 아름답게 꾸며지지 않은 것을 개탄하고 청정한 진리의 세계(淨域)가 오히려 두루 장엄하지 못함을 슬퍼하였다.

바로 신족제자 백붕(神足白朋)과 법제자 치호(法胤致浩)에게 부탁하고 사찰 대중(寺衆)과 심력을 함께하여 중창의 대역사를 도모하였다.

불전(佛殿)과 누각 문(樓門)을 단청하고 나서 독성 탱화(聖幀)와 선영(先影, 先師의 眞影)을 그려 안치하자 날아갈 듯한 용마루 누각의 그 엄숙함은 밝고 밝아서 또렷한 붉은 빛은 쇠를 녹일만하니 그 아름다움은 찬란하였다.

이는 옥 숲(玉林) 모두가 우뚝함을 보여주니 대체로 “옥이 산에 있으면 초목에 윤기가 나고, 못에 구슬이 나면 언덕이 마르지 않는다(玉在山而草木潤 淵生珠而岸不枯 <순자>, 권학 편)”는 일과 같았다.

아아, 공업이 성대하고 아름다워 진실로 고금에서는 직접 보기 드문 일이었다.

나 같은 사람은 치림(緇林, 佛家)에서는 병든 떡갈나무이고 법해(法海)의 작은 개울물(涓流)이라서 백가의 글(百家之文)에서 함부로 술지게미(糟粕)만 입에 넣어 씹었고 오교(五敎)의 학문은 한갓 성인(聖人)의 덕을 흠모하는 방편에 불과했다.

아무리 간절해도 술은 황하 수 같은 넓은 마음을 변하게 할 수는 있었으나 화살로 쇠북을 뚫는 힘이 부족한데 어찌하겠는가.

추월산 용추사(秋月山龍湫寺)는 다섯 번 출입하면서 거처했으니 진실로 인연이 있는 곳이고 6대 선사(先師)의 진영(眞影)을 봉안했으니 어찌 세속의 정의(情意, 관념)가 없겠는가. 

하물며 이 목암 장로(牧庵長老)는 바로 나의 법사(法嗣, 법통을 이어받은 제자)이니 산문(山門)은 다를지라도 본사(本寺)는 절로 같기에 감히 선후의 이름난 사적을 엮어 다소의 기특한 공적을 잇달아 드러낸다.

글에 이르기를,

惟道之在天下 도가 천하에 있으니

猶水之在地中 물이 땅속에 있는 것과 같구나.

先蹟也後蹟也 선인의 자취와 후인의 자취가

一彼此無終始 한결같아 피차 처음과 끝이 없다네.

不爲非不能 하지 않는 것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니

求之必可得 구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으리라.

哿矣先後功 아름답구나, 선후의 공업이여!

昭然今古蹟 환하게 드러났구나, 고금의 사적이여!

彼蒼者以前 저 푸른 하늘 이전에도

斯道也不滅 이 도야 말로 사라지지 않았다오.

◆長寧詩卷小叙

-晴峯 沈東龜(1594~1660)

歲在甲申四月十三夜 有削職流竄之命 將配寧海 自上特命改配 金吾改于長興府 五月初三日 行到配所 府使吳退而迎接 館予於城東山麓老吏周億家 其年九月 丁內憂 十月初八日 五歲兒孫以疫而沒 噫 禍患之來 人或不免 而酷罰罪苦 寧有如孤纍者乎 時移歲改 覽物興感 古之遷客騷人 或發之於詩章 以宣其壹欝者多矣 至如孤纍抱至寃懷至痛 至今六年 其猶初扣心 泣血以度時日 其燻心之火證 入骨之沉痾 幾乎死域者數矣 廢書掩卷 瞑目降氣 時或良久而乃定 安有一分興况 可以詠物而托懷 排遣而忘憂乎哉 一年三百六十日 無非可憂之日 而未伸此寃之前 只恐長是抱憂之人也 浮生百年間 余年已過半百有六矣 隙駟光陰 所餘幾何 而何不能自寬 自不能忘憂也 孟郊詩云 出門卽有礙 誰謂天地寬 孟郊之憂 憂其命窮 而尙且如此 孤纍之憂 所憂者何憂 其見疑於君父也 懷石沉江 旣不可得 則略以觸於懷而發於情者 間所吟詠 無不畢錄 聊以自况於離騷之意云 歲次己丑三月二十一日 在長寧謫舍 書識于詩卷之首

출전 <晴峯集>卷之六 

◆장녕 시권 소서

지난 갑신년(인조22년1644) 사월 열 사흗날(4월 13일) 밤 삭탈관직(削職)하고 유배 보낸다(流竄)는 왕명으로 영해(寧海)로 유배(流配)가게 되었는데 성상(聖上)으로부터 특명(特命)으로 유배지가 바뀌어 금오(金吾, 義禁府)에서 장흥부로 바꾸었다.

오월 초사흗날(5월 3일) 행차가 배소(配所)에 이르자 오 부사가 퇴청하여 영접하였는데 나의 숙사는 성 동쪽 산기슭 늙은 아전(老吏) 주억(周億)의 집이었다.

그 해 9월 부친상을 당하고(丁內憂) 시월 초여드렛날(10월 8일) 아들과 손자가 돌림병으로 죽고 말았다.

아, 불행한 변고와 근심이 닥쳐도 사람들은 간혹 벗어날 수 없다면 혹독한 천벌과 죄악의 고통(酷罰罪苦)은 차라리 외로운 유배생활과 같은 것이 아닌가.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지나자 사물을 바라보면 감흥이 일어나는 것은 옛날의 귀양살이 나그네나 시인이라면 간혹 이것을 시문으로 발휘해 이로써 그들의 울적한 회포를 펼친 자들이 많았다.

귀양지의 회포(孤纍抱)ㆍ매우 억울한 생각(至寃懷)ㆍ깊은 통한(至痛) 같은 데 이르면 이제 여섯 해가 되었으니 어찌 처음 가슴 치는(扣心) 일 같겠는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덧없는 세월을 보내다 그 초조한 마음의 울화증이 뼛속까지 치밀어 고질병이 되고 거의 사경에 빠진 자들은 몇이던가.

서권(書卷)을 내던지고 눈을 감으면 기운이 내려가고 때로는 혹 한참 있으면 바로 마음이 안정이 되니 어찌 약간이라도 흥취가 일지 않겠는가.

더구나 경물을 읊조리며 소회를 의탁할 수 있다면 근심을 잊는데 있어서이겠는가.

일 년 삼백육십일을 근심하지 않는 날이 없었고 이 원한을 사람들 앞에서 펴지도 못했다.

다만 오랫동안 우환을 보듬고 사는 사람으로서 평생을 떠도는 인생에서 나의 나이는 이미 일백의 절반이 지난 여섯 살(56세)이다.

극사(隙駟) 같은 세월 남은 날은 얼마나 되겠는가. 어찌하여 스스로 위로할 수 없고 스스로 근심을 잊을 수 없는가.

맹교(孟郊)의 시에 이르기를, “문을 나서자 곧 길 막히니(出門卽有碍) 누가 천지가 넓다고 말했던가.(誰謂天地寬)”라고 읊었으니 맹교의 근심은 자신의 운명이 곤궁함(命窮)을 근심한 것이지 오히려 또 이와 같았겠는가.

유배객(孤纍)의 근심은 근심하는 것이 어떤 근심인가는 자신의 군부(君父)를 의심하는 데서 드러난다.

굴원이 돌을 품고 상강에 빠져 죽은 것(懷石沉江)은 본디 알 수 없지만 대략 회포가 일어나 뜻으로 발휘되니 한가한 시간에 음영하면서(間所吟詠) 모두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렵게도 이소경(離騷經)의 생각을 나와 비교하였다.

세차 기축년(인조27년1649) 3월 21일 장녕 귀양살이하는 집에서 시권의 첫머리 글자를 기록하다. 

注)

隙駟光陰 - 사(駟)는 틈새를 지나는 사마(駟馬)란 뜻으로 매우 빠름을 의미한다. <묵자墨子> 겸애兼愛에 “사람이 땅 위에서 사는 기간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이, 비유하자면 마치 사마가 달려서 틈새를 지나기와 같은 것이다.(人之生乎地上之無幾何也 譬之猶駟馳而過隙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자 注)

저자가 모역옥사(謀逆獄事)에 연루되어 全羅道 長興府에 유배 중이던 인조22년(1644)부터 효종1년(1650)까지 지은 시를 모은 詩卷에 쓴 自序로 유배의 명을 받고 길을 떠나게 된 경위와 7년간 유배지에 머물러 있는 심정을 피력하는 내용이다.

인조21년(1643) 9월 서장관으로 심양(瀋陽)에 다녀와서 인조22년(1644) 2월 사간에 올랐다가 같은 해 3월 심기원(沈器遠)의 모역옥사에 친척으로 연루되어 장흥부에 유배되었다.여러 신하들의 신원이 있었으나 7년간 금고 상태로 있다 효종1년(1650)에 사면되었다가 晴峯死後 현종2년(1661) 4월 沈之源, 鄭太和, 宋浚吉, 趙復陽 등의 청에 힘입어 직첩을 돌려받았다.

장흥유배 생활 중에 <장녕시권長寧詩卷>을 발행했는데 이 전질은 별도로 전하지는 않고 <晴峯集>에 합철 된 것 같다.

小序 내용 일부는 “인조22년(甲申1644) 4월 13일 밤 삭직되고 유배의 명이 있어 영해로 귀양 갔으나 임금 특명으로 다시 장흥부로 옮겼다.

5월 3일 배소에 이르니 오 부사吳暹(癸未1643년8月到任~甲申1644년8月遞職)가 퇴청해 영접했다.

내 숙사는 성 동쪽 산록 늙은 아전 주억(周億)의 집이다.”라고 했다.

유배 6년째 되던 해인 56세 때(인조27년1649) <長寧詩卷> 머리말을 썼다.

영천자 신잠(1491~1554)의 <冠山錄>과 비교되는 적소(謫所) 장흥 관련 시문을 다수 남겼다.

晴峯의 둘째 아들 오탄梧灘 심유沈攸(1620~1688)는 23세 때 인조20년(1642) 진사시에 합격하고 부친의 유배가 풀리던 해인 31세 때 효종1년(1650) 증광문과에 병과로 합격했는데 문집에 이 고을에서 읊은 시가 많은 걸로 보아 귀양지에서 아버지를 모시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유배생활 두 해째 되던 인조23년(1645) 여름에 큰아들 심창沈敞이 모친과 함께 적소로 내려와 사면되던 해 큰아들은 병으로 죽고 7월에 모친상을 당했다.

노론의 적통 계열 두 부자가 상당한 기간 장흥부에 머물렀는데도 서원이나 각 씨족의 사우에서 배향한 흔적이 없다는 점은 역모에 걸린 중죄인이라서 그렇지 않았던가 추측해 본다.

영천자와 청봉은 문과에 급제한 진신 대부들로서 수준 높은 장흥 관련 시문을 남겨 이 고을에서는 풍성한 문화자산을 확보한 셈이다.

▲담양 추월산 용추사 천불전
▲담양 추월산 용추사 천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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