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정/한학자
▲ 김규정/한학자

述夫享嘉回運 可見天未喪斯文 休明啓瑞 果知人能弘此道 神化接武於先聖 大業增光於祖宗 惟吾道鶴國之元氣 實世尊象化之本源 崇文者 措天下於泰山 害道者 阽身世於累卵 上古以上 尙矣無以議爲 中古以來 昭乎可以鑑戒 夢徵佩日 漢有明帝之剏藍 心酣慧風 梁有武帝之臨寺 咸以石文之志 能臻治道之功 至若阿度度于羅 一國共休慧澤 曇始始之貊 萬民咸蘇玄風 肆草偃於風行 乃戶服而人化 伊龍象羣喆之輩作 寔佛祖道脉之大張 龍神歸欽 長使塔寺相望 人天合慶 爭捨國城無慳 巍乎功煥乎文 並驅三駕 立其本大其化 垂法千秋 有開士信揔與長老惠澄 共胥宇伽藍 遂歷銓基址 乾也大坤也廣 位㝎千年 山之高澤之深 氣通萬古 試占乾麓 爰設貧婆 金地豁開 雖曰湧出 玉田妥安 未若化城 久歷居諸 累逢灾變 終爲刼火煨燼 謾見丘墟藤葛 至麗季國師懶翁 偶憇錫菩提練若 忽回矚龍湫風光 欲占梵基 試木鳬之戾止 果見乙字寫蚪潭之波頭 知前剏之爲灾 果此龍之所害 拏其腰以鐵笻 藻彼血於金峙 潜身石窟 護心金沙 加以洞逕層危 僅通行履 觸境瀟洒 夐絕塵喧 塡虬壑而釦階 排鴈刹而結界 面离背坎 爽塏十分 將古況今 精神百倍 莊嚴地閣 互融天宮 然而物盛而衰 理固然也 時難久泰 道亦變乎 至萬曆壬辰歲 倭寇流毒 兵燹橫侵 幾百載金田鞠爲焚蕩 一朝間玉刹謾作灰丘 猿鳥聲兮含悲 山水色兮帶慘 粤庚午春 有逍遙老和尙 奮心復古 盡力重新 同志者爭趍 助緣輩坌集 有曰天覺大德玄淨上人 首創法堂 尾墍丹雘 智鑑師造像丈六 連珠師盖瓦晬宮 戒嚴禪和 建彌勒於白龍之夏 戒哲長老 樹大樓於赤虎之春 集散衆迎來人 設諸舍備法物 何其年深歲久 法界瀟條 上雨傍風 殿閣撲落 於是月峯大德 來自頭流 修寶界建法幢 設禪法開霧市 頭陀海雲之力 不啻大於當時 出身溪雲之功 亦有多於後日 安集若干衆 賴過數十年 鼠無穿墉之侵 燕有賀厦之慶 以至康熙己亥歲 信士柳大海 剏建冥司 苾蒭明信 繪畫各帖 柳也又與大衆同議 準擬法殿重修 願未成而夭亡 誰可代也 事不遂而中廢 尙忍言㦲 有智元禪師 與寺中鉅擘 矢匪石其心 期斷金其利 遍鳩檀貨 兼竭留財 蕆諸需聚衆工 革舊廢美新度 結構於己酉歲 盖瓦於庚戌春

◆추월산 용추사 사적사 인

기술하자면 형통하고 아름다운 운수가 돌아오니 하늘이 이 문화를 아직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가 있고 아름답고 밝은 서기가 열리니 과연 사람들이 이 도를 넓힐 수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신묘한 교화(神化)는 선성(先聖)의 자취를 접속했고 대업(大業)은 조종(祖宗)의 빛을 더하였으니 오직 우리 도(道)만은 학국(鶴國, 사찰)의 원기(元氣)이고 실로 세존(世尊)은 상화(象化, 교화)의 본원(本源)이다.

글을 숭상하는 자는 천하를 태산같이 안정된 곳에 둘 것이고 도를 해치는 자는 누란(累卵)의 형국처럼 신세(身世)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상고 이상(上古以上)은 이미 아주 오래되어 의논할 수 없으나 중고 이후(中古以來)는 분명해서 거울삼아 경계할 수가 있다.

후한 명제(後漢明帝)가 일륜(日輪, 태양)을 두른 꿈을 징험하여 가람(伽藍)을 창건하였고 지혜의 바람에 마음이 흥기하자 양(梁)나라 무제(武帝)는 사찰에 행차하였으니 모두가 석문(石文, 부처님의 말씀을 적은 경문)의 뜻으로 치도(治道)의 공업(功業)에 이를 수가 있었다.

아도(阿度)가 신라에 건너온 때에 이르러 온 나라가 지혜의 연못에서 함께 쉬었고 담시(曇始)가 고구려에 처음 들어가자 백성들은 그윽하고 우아한 풍취(玄風)로 모두 되살아났다.

그러므로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지듯이(草偃於風行, 가르침이 크게 행해지자) 이에 집집마다 심복하고 사람마다 교화되었다.

저 용상대덕(龍象大德, 큰 불보살ㆍ대각도인ㆍ고승석덕)과 현인의 무리들(羣喆)이 나와 진실로 불조의 도맥(佛祖道脉)을 크게 펼치고 용신이 귀의하고 공경하여(龍神歸欽) 언제나 탑사(塔寺)를 서로 마주 바라보게 하고 인천에 경사스러운 일이 겹치자(人天合慶) 다투어 국성(國城, 都城)에 아낌없이 금품을 내놓았다.

공덕이 우뚝하고 문장이 빛나 삼가(三駕, 三車 성문승ㆍ연각승ㆍ보살승)를 함께 몰면서 그 근본을 세우고 그 교화를 크게 펴서 천추에 법을 전했다.

개사(開士, 보살) 신총(信揔)과 장로 혜징(長老惠澄)이 함께 집터를 잡아 가람을 세우고자 드디어 건물의 토대를 샅샅이 살피고 나서 하늘이 트이고 땅이 넓은 곳에 천년의 자리를 정하니 산은 높고 못은 깊어 만고토록 기운이 통하는 곳이었다.

점괘로 골라 뽑아 서북쪽 산기슭(乾麓)에 총림(貧婆那)을 설치하여 절집(金地)이 활짝 열리니 불쑥 튀어나왔다고 말하더라도 옥전(玉田, 왕릉)의 평안함이 안식의 성(化城, 法華七喩의 하나. 소승의 열반에 비유)만 같지는 못하였다.

세월이 오래 흐름에 따라 재해와 사변을 자주 만나 끝내는 전란의 불길로 잿더미가 되어 뜻밖에도 덩굴 풀 무성한 폐허만이 드러났다.

고려 말 국사 나옹(國師懶翁)에 이르자 우연히 보리연야(菩提練若, 보리암)에서 쉬다가 홀연 눈길을 돌려 용추의 풍광을 대하고서 절터를 정하고자 시험 삼아 나무오리(木鳬)를 날려 도착한 곳을 살펴보았다.

과연 을자(乙字, 龍)가 두담(蚪潭, 올챙이 못)의 물마루(波頭)를 부리는 것을 보았는데 옛날 사원이 과연 이 용의 재해(灾害)를 당하심을 아시고 그 허리를 철 지팡이(鐵笻)로 잡아채자 금치(金峙)는 그 피로 물들었다.

불가(金沙)를 수호하려는 마음은 석굴에 몸을 숨기자(潜身石窟) 더하여 굴의 좁은 길이 층층이 높아 겨우 발길이 통했지만 부딪치는 경계마다 맑고 깨끗해서 번잡한 속세를 멀리 떠날 수가 있었다.

골을 메워 섬돌로 금테를 두르고 안찰(鴈刹, 사찰)을 차례로 배치해 승려와 속인과의 자리를 구분하였다.

남쪽을 향하고 북쪽을 등지자 십분 지세가 높아 앞이 확 트이고 더구나 고금을 비교하면 정신이 백배 장엄한 지상의 전각이 천궁(天宮)과 서로 융합했다. 

그러나 성하면 쇠하는 것이 만물의 진실한 이치이고 오래도록 편안하기가 어려운 때라 천도(天道)도 변하지 않겠는가.

만력 임진년(선조25년1592)에 이르러 왜구가 해독을 끼치면서 전화가 마구 행패를 부리자(兵燹橫侵) 몇 백 년을 사랑한 금전(金田, 절집)이 분탕(焚蕩)이 되어 하루아침에 속절없이 옥찰(玉刹)이 재 무덤(灰丘)이 되니 산짐승과 새소리도 슬픔을 머금었고 산수도 참담한 안색을 둘렀다.

이에 경오년(인조8년1630) 봄에 소요 노화상(逍遙老和尙)이 분발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옛 모습을 복원하려고 힘을 다하여 새롭게 중수하였다.

뜻을 함께 하는 자가 다투어 찾아오고 보조적인 인연이 무리를 지어 모여 들었다.

천각 대덕(天覺大德)과 현정 상인(玄淨上人)이란 분이 있어 법당을 창건하고 나중에는 화려한 단청을 입혔다.

지감대사(智鑑大師)는 장륙불상을 조성하고 연주대사(連珠大師)는 법당에 기와를 덮었다.

계엄선화(戒嚴禪和)가 백룡의 해(경진년, 인조8년1640) 여름에 미륵 전(彌勒殿)을 건립하고 계철장로(戒哲長老)는 적호의 해(赤虎, 병인년, 숙종12년1680) 봄에 큰 누각을 세웠다.

흩어진 무리를 모으고 찾아오는 사람을 맞이하여 여러 건물을 짓고 법물을 갖추었다.

얼마나 해가 깊어가고 세월이 오래되자 법계가 쓸쓸해져(法界瀟條) 위에서는 비가 새고 곁에서는 바람이 몰아쳐 전각이 떨어져 나갔다.

이때에 월봉대덕(月峯大德)이 두류산(頭流山)으로부터 와서 보배로운 터전(寶界)을 수리하고 법의 깃발을 세우고(建法幢) 선법(禪法)을 개설하자 성시(盛市)를 이루었는데 당시의 두타 해운(頭陀海雲)의 공력보다는 컷을 뿐만이 아니라 훗날의 출신(出身, 문무文武ㆍ잡과雜科에 합격한 자) 계운(溪雲)의 공업보다도 많았다.

약간의 대중들을 안정시키고(安集) 수십 년을 의지하며 살아가니 쥐가 담을 뚫어 침입하는 일이 없었고 제비들이 큰집 짓는 일을 축하하는 경사는 있었다.

강희 기해년(숙종45년1719)에 이르러 신사(信士, 재가불자) 류대해(柳大海)가 명부전(冥司)을 창건하고 비구(苾蒭, 필추) 명신(明信)이 각각의 표제를 수록해 그림으로 그렸다.

류대해는 또 대중과 함께 의논하여 법전(法殿)을 중수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젊어서 죽으니 누가 대신할 만하며 일은 완수하지도 못하고 중도에 폐기되었으니 어찌 차마 말을 하겠는가.

지원 선사(智元禪師)가 사중의 큰 인물(寺中鉅擘)과 마음을 같이하면서 돌이 아닌 그 마음을 맹세하니 그 날카로움은 쇠도 자를 수 있다고 기대하였다.

두루 시주의 재화(檀貨)를 모으고 아울러 남겨둔 재물과 돈(留財錢)을 다 소모하여 여러 쓰이는 것들을 갖추고서 많은 공인들을 모았다. 

묵은 것을 폐하여 혁신하고 새로운 제도를 아름답게 하여 기유년(영조5년1729)에 얼개를 만들고 경술년(영조6년1730) 봄에 기와로 지붕을 얹었다./ [다음 호에 계속]

▲담양 추월산 용추사 유허지
▲담양 추월산 용추사 유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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