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정/한학자
▲김규정/한학자

◆性情說

-無竟子秀大師(현종5년1664~영조13년1737)

循理盡性者 聖人也 縱欲肆情者 衆人也 循盡縱肆之間 是非得失之歸 相去遠矣 則豈朱子所謂毫釐之差 千里之謬耶 然理性外 無別有欲情 欲情乃理性中所不無 則豈楊氏所謂天理人欲 間不容髮耶 夫登唐虞之朝者 擧

目皆德政 陪洙泗之席者 入耳皆德音 縱橫交錯 無非此理 左顧右眄 亦無非此理 此非聖人循天理之明效耶 登

帝辛之朝者 擧目皆虐政 從盜跖之門者 滿耳皆惡音 縱橫交錯 無非此欲 左顧右眄 亦無非此欲 此非衆人縱人

欲之大驗耶 噫 人皆知好聖人之德 而不知效聖人之德 人皆知惡衆人之行 而不知改衆人之行 徒以爲聖人存天理 衆人縱人欲 聖人自聖人 衆人自衆人 蚩蚩乎自伏自屈之地 不識不滅之理 何其惜㦲 盖甞論之 亘古今通天下 未甞少須臾或滅者 理也 夫唐虞之德政 此一理也 孔子之德音 此一理也 帝辛之虐政 此一理也 盜跖之惡音 此一理也 故堯之命舜曰 允執厥中 舜之命禹 乃復益之以三言 孔子戒其徒曰 不恒其德 或承之羞 堯舜孔子之一理 盖可見也 帝辛託辭曰 我生不有命在天 盜跖詭辯曰 無適而無道 帝辛常與天違 而言天一言 忽生於託辭 盜跖常與道違 而言道一言 忽出於詭辯 帝辛盜跖之一理 亦可見也 然此約理一之謂也 非約人一之謂也 若約人一之謂也 則指帝辛爲堯舜可乎 指盜跖爲孔子可乎 是謂詭託非一 而所以詭託者一也 則朱子所謂千里之謬 楊氏所以間不容髮 果以此也歟 若有一人於此 遏人欲而存天理 兢兢業業 一日二日 無一日或間 則可與堯舜孔子同驅駕矣 帝辛盜跖 安敢拒轍也㦲

출전 [無竟集文稿]卷之二

◆성정설

이치(理)를 따르고 성(性)을 다하는 자는 성인(聖人)이고 마구 욕심을 부려 뜻대로 하는 자는 보통사람(衆人)이다.

이치와 성을 따르느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느냐의 차이 때문에 시비득실의 귀착점과 서로 간의 거리가 멀어지니 어찌 주자가 흔히 말하는 바대로 “털 끝 만큼의 차이가 천 리 만큼 어긋난다.(毫釐之差千里之謬耶)”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리(理)와 성(性)밖에 따로 욕심(欲)과 정(情)이 없으니 욕심과 정은 바로 리와 성 가운데 없지 않기 때문에(조금 있다) 어찌 양씨(楊氏. 楊時1053~1135)가 흔히 말하는 바대로 “천리와 인욕의 사이에 터럭 끝도 용납할 수가 없다(天理人欲間不容髮耶).”고 했던 것이다.

대저 요순(堯舜)의 조정에 오르는 자들은 눈을 들고 본 것(擧目)이 모두가 어질고 바른 정치(德政)이고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의 강석(講席)에서 공자와 맹자를 모신 자들은 귀에 들어 온 것이 모두가 좋은 말씀(德音, 善言)인지라 종횡으로 교차하는 것이 이 이치가 아님이 없고 이쪽저쪽을 돌아보아도 이 이치 아님이 없으니 이것은 성인(聖人)이 천리(天理)를 따른다는 뚜렷한 효험(明效)이 아니겠는가.

제신(帝辛, 紂王)의 조정에 오른 자는 눈을 들고 본 것이 모두가 혹독하고 포악한 정치(虐政)이고 도척(盜跖)의 무리를 따르는 자는 귀에 가득 들려오는 모든 것이 듣기 싫은 소리(惡音)라 종횡으로 교차하는 것이 이 욕심 아님이 없고 이쪽저쪽을 돌아보아도 이 욕심 아님이 없으니 이것은 보통사람이 인욕(人欲)을 따른다는 큰 징험(大驗)이 아니겠는가.

아아, 사람들은 모두가 성인의 덕을 좋아할 줄은 아나 성인의 덕을 본받을 줄은 모르며 사람들은 모두가 보통사람의 행실을 싫어할 줄은 알지만 보통사람의 행실을 고칠 줄은 모른다.

다만 성인은 천리를 보존하고 보통사람은 인욕을 따르니 성인은 절로 성인이고 보통사람은 절로 보통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어리석게도 스스로 복종하고 굴복하여 불멸의 이치를 알지 못하니 어쩌면 그렇게도 안타까운가.

한번 의논해 보자면 태곳적부터 천하를 통하여 일찍이 잠깐이라도 사라진 적이 없는 것은 ‘리(理)’이다.

대저 요순의 어질고 바른 정사(德政)는 이 하나의 ‘리(理)’이고 공자의 좋은 말씀(德音, 善言)도 이 하나의 ‘리(理)’이며 제신(帝辛, 紂王)의 혹독하고 포악한 정치(虐政)도 이 하나의 ‘리(理)’이고 도척(盜跖)의 듣기 싫은 소리(惡音)도 이 하나의 ‘리(理)’이다.

그러므로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명하여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그 중도를 잡아야 한다(允執厥中).”라고 했고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명하면서 마침내 세 마디를 다시 더했으며(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미세하니, 오직 정밀하고 일관되게 하여 그 중도中道를 진실로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공자는 자신의 문도들에게 경계하며 말씀하시기를 “그 덕이 항구하지 않은지라 혹 부끄러움으로 이어지리라(不恒其德或承之羞).”고 했으니 요ㆍ순ㆍ공자가 하나의 ‘리(理)’임을 대체로 알 수가 있다.

제신(帝辛, 紂王)은 핑계 대며 말하기를, “나의 생애는 그 운명이 하늘에 달려 있지 않은가(我生不有命在天).”라고 하였고 도척(盜跖)은 궤변을 늘어놓기를 “어디를 가더라도 도가 없는 곳은 없다(無適而無道).”라고 하였다.

제신(帝辛, 紂王)은 항상 하늘과 어긋나면서 한마디로 하늘을 말할 때는 갑자기 핑계 대는 말을 하고 도척(盜跖)은 항상 도와 어긋나면서 한마디로 도를 말할 때는 갑자기 궤변이 튀어나오니 제신과 도척도 하나의 ‘리(理)’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리 하나(理一)’로 묶어서 말한 것이지 ‘사람을 하나(人一)’로 묶어서 말한 것이 아니다.

만약 사람을 하나로 묶어 말한다면서 제신을 가리켜서 요임금 순임금이라고 한다면 옳겠는가.

도척을 가리키면서 공자라고 하면 옳겠는가.

이것은 궤변과 핑계로서 한둘이 아니지만 궤변과 핑계 대는 말을 하는 이유는 하나이니 주자가 흔히 말하는 바대로 “천리의 어긋남(千里之謬)”과 양씨(楊氏)가 “천리와 인욕의 사이에 터럭 끝도 용납할 수가 없다(天理人欲間不容髮耶).”고 한 이유도 과연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여기에서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고자 날마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하루도 그침이 없다면 요순 공자와 함께 수레를 몰수 있을 것이니 제신과 도척이라도 어찌 감히 수레를 막을 수 있겠는가.

◆松坡覺暄大師碑文(1686~1764) 

-世子 翊衛司 副率 桐岡 李毅敬 撰

大師法名覺暄 堂號松坡 俗姓金氏 世居靈巖 母朴氏 平生奉菩薩行 以丙寅二月初五日生 髫齔與羣兒遊戲 或聚石爲塔 或搏土作刹宇 自能游於佛事 中及慈母棄背 投美黃寺雪峰大師 大師卽西山五世孫 禪家嫡傳也 雪峰見師骨相超凡 深以得人 傳法爲喜 師時年十三 十五剃染 才識通敏 三藏經敎之外 亦能旁通子史 逮入室領衆 游徧諸山者四十餘年 晩來捨衆 深入海島 結跏習定四五載 本寺請歸至懇 乃返錫于明寂 一日忽喚侍子謂曰 界有成住壞空 身有生死病老 有始者必有終 此無常之體也 因作偈曰 幻身夢宅歟 水月空花也 請君試但看 何處有來去 放筆端坐 泊然而逝 時八月初七日也

출전<萬德寺志>卷之四

◆송파 각훤대사 비문(1686~1764) 

-세자익위사 부솔 동강 이의경 지음

대사의 법명은 각훤이고 당호는 송파이다. 속성은 김씨로 대대로 영암고을에서 살았다. 어머니 박씨는 평소 보살행을 받든 분으로 병인년(숙종12년1686) 이월 초닷새 날 대사를 낳았다.

여덟아홉 살 무렵 여러 아이들과 장난치고 놀 때는 간혹 돌을 모아 탑을 쌓거나 흙을 뭉개서 절집을 만들거나 하면서 스스로 불사를 하며 놀았다.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미황사 설봉대사에게 의탁하였는데 대사는 바로 서산의 5세손으로 선가의 적전이었다. 

설봉은 대사의 골상이 비범한 것을 보고 인재를 얻었다고 깊게 생각하고는 법을 전하며 기뻐하였다. 

당시 대사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고 열다섯 살에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는데 재주와 식견이 명민하여 삼장과 불경의 가르침 외에도 제자서와 역사서를 분명하고 자세하게 알았다.

입실하여 대중을 거느린 이후로 여러 명산을 두루 유람한 햇수가 사십여 년이다. 말년에는 중생을 물리치고 해도로 깊이 들어가 결가부좌하며 사오년 동안 습정 균혜를 닦았다.

본사에서 돌아오기를 지극히 간절한 정성으로 요청하자 비로소 명적암으로 돌아와 주석하였다. 하루는 갑자기 시자를 불러 이르기를,

界有成住壞空 이 세계는 성주괴공의 4대 겁이 있고

身有生死病老 마음에 생주이멸이 있어 몸에 생로병사가 있다.

有始者必有終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으니

此無常之體也 이것이 무상의 체라네.

이어서 게송을 지어 부르기를,

幻身夢宅歟 덧없는 몸은 꿈같은 것인가

水月空花也 물에 비친 달과 허공의 꽃이니라.

請君試但看 그대는 다만 한 번 보라

何處有來去 어느 곳에 오고 감이 있는가.

하고는 붓을 놓고 단정히 앉아 욕심 없고 마음이 평정(平靜)한 모습으로 서거하니 때는 팔월 초이레(8월 7일)였다.  

역자 注)

송파 각훤(松坡覺暄)대사는 1686년(숙종12) 2월 5일 출생하고 1764년(영조40) 8월 7일 입적했다고 완주 송광사에서 1764년(영조40년) 사암 채영(獅巖采永)이 간행한 [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에서 언급. 출처 [현대불교신문].

▲강진 만덕사 대웅보전
▲강진 만덕사 대웅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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