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정/한학자
▲ 김규정/한학자

[지난 호에 이어]

三日茶毘于終南之西麓。無夜不瑞氣放火。翌日三人獻夢。一門人懷瓊曰。靑龍從火裏出。乘雲登空。二本寺僧太裕曰。燒臺上懸一水瓶。而瓶破水懸。三護喪釋太密曰。明堂水器中明珠二顆。如蓮露團圓。衆猶未之信。逮薦香之夕。五色彩雲。集于燒臺上。作一化城。移時而後。分擁左右。自灰中神光亘天。晃朗如杲日。衆星奪耀。群峰慙容。滿庭緇白。欽仰唶唶。遠邇之人。咸覩異之。朝將拾骨徃視之。頂骨冒北幡超去。骨色純黃。明堂器中。果有靈珠一顆。人皆謂眞舍利也。始知密師之夢信不誣矣。靑龍登空者。師生甲辰化徃兜率之標歟。瓶破水懸者。色身謝落眞身不變之表歟。靈珠置壇。不燃燭而夜明。散骨山上。七夜放光。獨其處。雲霧晦冥。風雨大作者二度。人謂龍神來拾舍利也。遵師戒不用檀信之財。門弟子隨分合力。樹浮屠於全州松廣寺之東崖秋溪和尙塔右。可謂燈燈相續。識者論師一生曰。具體方面。秀眉應眞。超世之相。初年愽學。資粮位也。夢沐潭水。沾理水也。融通智力。起行向果也。遊化諸方。兼中至也。還歸本庵。兼中到也。懷瓊慧闕談鈍。安敢容喙而彷彿其萬一㦲。直取奇蹟異表之人所賛美者。爲師行狀。

[無竟集文稿] 卷之三

사흘 후에 종남산 서쪽 기슭에서 다비식을 거행하였는데 밤마다 상서로운 기운의 불을 지피지 않는 날이 없었다.

다음날 세 사람이 꿈 이야기를 하였으니 첫 번째로 문인 회경(懷瓊)이 말하기를, “청룡이 불속에서 나와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올랐다.”라고 하였고 두 번째로 본사 승려 태유(太裕)가 말하기를, “소대(燒臺, 위패를 불사르는 곳) 위에 물병 하나를 걸어놓았는데 병은 깨지고 물만 허공에 걸려 있었다.”고 하였으며 세 번째로 호상(護喪, 상례 전반을 주관하는 사람) 석자(釋子, 沙門) 태밀(太密)이 말하기를, “명당(明堂, 僧堂 정면에 明樓를 높이 세우는데 明樓의 좌우 빈 곳을 말함)의 물그릇 속에 빛이 나는 구슬(明珠) 2과가 연잎에 맺힌 둥그런 이슬과 같았다.”라고 하자 대중들은 외려 믿지를 않았다.

향을 올리는 저녁이 되자 오색 무지개 구름이 소대 위에 모여들어 하나의 화성(化城, 일시적으로 만든 城郭)이 되었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좌우로 나뉘어 옹위하다가 재속에서 신광이 하늘까지 뻗치면서 밝은 태양처럼 환하게 빛이 나자 뭇 별들은 빛을 잃어버리고 무리의 산봉우리들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뜰 가득한 치백(緇白, 僧俗)들은 존경하여 우러러 사모하고 찬탄하였으며(欽仰唶唶) 원근의 사람들은 모두 구경하고서 기이하게 여겼다.

아침에 유골을 수습하려고 가서 보았더니 정수리 뼈(頂骨)가 북쪽 깃발을 부딪치며 날아갔는데 뼈 색깔은 순수한 황색이었고 명당 그릇 속(明堂器中)에 과연 신령스런 구슬 1과가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진신 사리라고 말하며 비로소 태밀 대사(太密大師)의 꿈이 진실로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청룡이 공중으로 올랐다는 것은 대사가 갑진년(현종5년1664)에 태어나서 천화(遷化) 후에 도솔천에 왕생(往生)했다는 징표가 아니던가.

병은 깨졌는데 물만 걸려 있다고 한 것은 색신(色身)은 시들어 떨어졌으나 진신(眞身)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 아니던가.

영주(靈珠, 사리)를 단에 안치했는데(置壇) 촛불을 켜지 않아도 밤은 밝았고 뼈를 산에 뿌리자 이렛날 밤 동안 빛을 발했다.

유독 그 곳만 구름과 안개에 가려 어두컴컴하고 비바람이 크게 일어난 것이 두 번이나 되었다.

사람들은 “용신이 와서 사리를 수습한다(龍神來拾舍利也).”고 하였다. 대사의 훈계를 준행(遵行)해 신도들의 재물을 쓰지 않고 문하제자들의 분수에 따라 힘을 합쳐 전주 송광사 동쪽 언덕 추계화상 탑 오른쪽에 부도 탑을 세웠으니 “진리의 등불이 서로 이어졌다(燈燈相續).”고 말할 만하다.

학식과 견문이 있는 사람들이 대사 일생의 도리(道理)를 말하기를, “네모난 얼굴과 빼어난 눈썹을 갖추었으니 응진(應眞,아라한)이 세상을 초탈한 상이다.”라고 하였다.

초년에 박학(愽學, 널리 배움)한 것은 자량위(資粮位, 보살의 수행과정인 5위중에서 제1위)고 꿈에 연못물에 목욕한 일은 이치의 물을 얻어 젖은 것(沾理水)이며 융통한 지혜의 힘(融通智力)은 인지 행(因地行, 法性)을 일으켜서 과위(果位)로 향하는(向果) 것이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중생을 교화하는 일은 겸중지(兼中至)이고 본암(本庵)에 다시 돌아온 것은 겸중도(兼中到)이다.

회경(懷瓊)은 지혜가 모자라고 말이 노둔하니 어찌 감히 입을 놀려 그 만분의 하나라도 비슷하게 그려낼 수 있겠는가.

다만 사람들이 찬미(賛美)하는 기이한 자취(奇蹟)와 출중한 의표(異表)를 취하여 대사의 행장을 찬술하였다.

注)

三禪 - 색계의 네 가지 단계 중 세 번째 해당하는 세계로 물질세계는 존재하나 감각의 욕망에서 벗어난 청정한 세계를 말한다.

三觀 - 진리를 관찰하는 세 가지 방법인 공관ㆍ가관ㆍ중관을 이르는 말.

三空 - 아공(我空)은 우리가 오온으로 이루어진 몸뚱이를 <나>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나>가 아니라 이것은 공하여 없는 것(空無)이란 진리를 체득한 것을 말하며, 

법공(法空)은 물질적인 현상이나 객관을 대상으로 한 상대적 정신 작용은 다 인연으로 모인 거짓 존재로서 만유의 본체(나와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가 항상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미집迷執)가 본래 공무(空無)한 것이란 진리를 말하며, 구공(俱空)은 아공‧법공을 다 초월하여 공(空)했다는 생각까지도 없어져서 비로소 마음자리의 본성에 계합(契合)한 것을 말한다. 혜명수보리(慧命須菩提)는 구공(俱空)의 경지인 실상반야(實相般若)를 가장 잘 체득한 분이기에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부른다.

三眚夢(삼생몽) - 세 봉사의 꿈. 잘못된 견해인 常見과 斷見과 大空에 집착하는 견해.

❖무경 자수無竟子秀(현종5년1664~영조13년1737)

자수(子秀)는 이름이고 자는 고송(孤松)이며 법호는 무경(無竟)이다. 남양 홍씨(洪氏)로 전주에서 태어났다. 숙종 원년(1675)인 12세에 문식 장로(文式長老)에게 출가하여 16세에 구족계를 받고 운문사의 추계 유문대사를 찾아 법을 이었다.

자수는 숙종 때 전국의 승려 49인을 뽑아 사나사(舍那寺)에서 대법회를 열었을 때 참석하여 설법하였고 영조13년(1737)에 입적했다. 세수는 74세이고 법랍은 58년이다.

자수의 승탑은 완주 송광사에 세워졌고 제자로는 설영(雪瑛)ㆍ처우(處愚)ㆍ영봉(靈峰) 등이 있다. 

저서로는 1738년에 임실 신흥사에서 간행한 〚무경집無竟集〛과 〚불조선격佛祖禪格〛 등이 있다.

❍秋月山菩提庵記

-無竟子秀 大師(현종5년1664~영조13년1737)    

辛卯春。有出身申公。踵門而徵余記曰。秋月山之菩提庵。眞所謂證菩提處。而國師無學所胥宇草創者也。剏以來多易穀燧。香火之緣。初不曾廢也。粤萬歷丁酉歲。倭寇隳突。毒流山林。萬古福地。一朝丘墟。空爲麋鹿之場。逮丙午歲。苾蒭信賛。矢心奮出。召般倕斮大章。權輿於春。斷手於秋。功由鳩僝。勢若翬飛。歲月旣久。杗閣蠹朽。風雨漂橈。赭堊漫漶。老拙是山下人。見且惜之。重修於庚寅春。丹雘於壬辰秋。廑無患墉鼠之穿。廈燕之去。拙之功不敢云。而知名寶坊。不可無文。願得一言而記諸壁以示於後人。可乎。余敬諾曰噫。昔蘇太宰。乃戒師之後身。出已俸創伽藍。不一其所。則士夫之歸心佛道成就大事者。盖以宿勳之所使然也。今申公以山西巨擘。盡心力於空門而幹事若是。則果信其亦必有宿勳。而第未知前身之是誰耶。然有成有毁。物之常也。此庵也。唯有無學之草剏。而不有信賛之重修。唯有信賛之重修。而又不有申公之又重修。則焉有今日。而申公出於信賛之後。立功不趐如信賛之出於無學之後。則宜其成復毁毁復成。歷萬祀長新也。何患乎昭琴之皷不皷㦲。申公名溪雲。以修善名於世云。

[無竟集文稿]卷之二

❍추월산 보리암 기문

신묘년(숙종37년1711) 봄에 출신(出身, 문무ㆍ잡과에 합격한 자) 신공(申公)이 몸소 찾아와 나에게 기문(記文)을 구하면서 말하기를, “추월산 보리암은 진실로 이른바 보리의 처소임이 입증되자 국사 무학(國師無學)이 집터를 보고 처음 창건한 곳입니다. 

창건한 이래로 많은 시간이 바뀌어도 향화의 인연(香火之緣)은 처음부터 폐한 적이 없습니다. 

이에 만력 정유년(선조30년1597)에 왜구가 날뛰자 해독이 산림에 미쳐 만고의 복지가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고 부질없이 고라니와 사슴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병오년(현종7년1666)에 미쳐 비구 신찬(信賛)이 마음으로 맹세하고 힘을 내어 유명한 목수인 노반(魯般)과 공수(工倕)를 불러들여 큰 나무를 베었습니다. 

봄에 시작하여 가을에 손을 놓고 나서 재물을 갖추어 일을 이루고 나니 형세는 새가 날개를 편 듯하였습니다.

세월이 오래되자 들보와 문설주가 좀먹어 썩고 비바람에 쓸모없게 휘어지면서 붉은 흙과 백토가 희미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바로 산 아래 사람으로서 이를 바라보면서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경인년(숙종36년1710) 봄에 중수하여 임진년(숙종38년1712) 가을에 단청을 하니 조금은 쥐가 담을 뚫고 제비가 떠나가는 근심은 없게 되었습니다. 

나의 공은 감히 말하지 않지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찰에 기문이 없을 수 없으므로 바라건대 한마디 말을 얻어 벽에 기록하여 후인에게 보여주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내가 “예”라고 대답하며 말하기를, “아아, 옛날 소 태재(蘇太宰, 소동파)는 바로 계 대사(戒師)의 후신으로 자신의 녹봉을 출연해 가람을 창건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는데 사대부가 마음을 불도에 귀의하여 큰일을 성취한 자는 대체로 전생의 공(宿勳)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지금 신공(申公)은 산서지방의 거벽(山西巨擘)으로 공문(空門)에 심력을 다하여 이와 같이 일을 주간하니 과연 미덥지만 그도 반드시 전생의 공이 있었을 것이나 다만 전신(前身)이 바로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루어진 것은 반드시 허물어지는 것이 중물의 상정(衆物之常情)이지만 이 암자는 오직 무학의 초창(草剏)만 있고 신찬(信賛)의 중수(重修)가 없으며 오직 신찬의 중수만 있고 또 신공이 다시 중수하지 않았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신공은 신찬의 뒤에 나왔지만 공을 세운 것은 신찬이 무학의 뒤에 나온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의당 암자가 이루어지면 다시 허물어지고 허물어지면 다시 이루어지는 것이 일 만년을 거쳐도 언제나 새로운 법입니다.

어떻게 소문(昭文, 거문고의 명수)이 거문고를 타다가 타지 않는다고 근심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신공의 이름은 계운(溪雲)으로 공덕을 쌓아(修善) 세상에 이름이 났다.

▲담양 추월산 보리암 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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