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정/한학자
▲ 김규정/한학자

[지난 호에 이어]
至癸卯四月初吉 夜夢身投潭底 游泳自若 回旋湧中而出 神心快活 疑滯釋然 入於中道 若有驅策之者云 自後慧解自發 法說無碍 三禪三觀 向上一路 各當其機 提接不遺 至於異道殊俗之類 亦莫不逗機普濟 其無無障碍融通智力而能如是乎 若其華嚴中百一十孔網界 二十重廣大刹 其餘禪家 一家三王 五位偏正 三要玄四照用 古今佛祖一切異方便 皆爲自己上日用已陳之蒭狗 其無定力所發 亦若是乎 師甞戒徒 導師敎父 寧有種乎 人固有信庶幾㦲 又誡曰 壐雖出家 有親有君 爲人臣子者 不盡養親之道 不勤向君之誠 爲犯悖逆 不與同居云 故處門下者 莫不感化矣 視利如糞 信法爲寶 待賔接衆 親踈平等 凢所實行如此 人謂眞菩薩出世 心不好爲人師 諸寺掛塔 來徒或煩 則捲移他山而衆或追從 又不欲干名於世 如有士大夫之求見 固辭退避而名或自彰 至庚戌歲 還赴雙溪之請 學衆且蘩 至辛亥春 上足牧菴 依命敬繪靜觀任性圓應秋溪四和尙眞 奉安于龍湫寺 至壬子 避冠盖之推重 稱疾逃名 憇錫于龍湫寺 時牧菴在板殿 迎入上室 問決禪敎奧旨 仍授末後一偈 以傳宗旨 兼爲法眷 講說華嚴經 癸丑秋 還駐獅子山寂照庵寶鏡室 爲法侶講禪敎文 一話一言 莫非日用自己上本心事而已 甲寅春 命古鏡輩 繪自芙蓉至秋溪五代眞影 奉安于松廣寺 禪㝎暇 纂集佛祖禪格自己三宮寶鏡三昧 各一篇 直被俊機 兼撮理學類篇河洛註說 各集爲一編 一使利根 博覽無滯 一使鈍學 自邇陟遐 人謂二利之心 老而益勤也 少時所著詩若文 則門人古松古鏡 收拾散帙 成四篇 二篇即世俗文章 二篇出世法語 乙卯歲 以年老遊化事畢 謂徒曰 歸歟歸歟 何能忘本 雙溪庵是先師出入留跡之處 爲宗家本庵 吾將就彼而終 九月初十日還到雙溪 見殿宇傾斜 無復舊觀 甚憫焉 越丁巳春 養性船月輩出 重修不日 盖預知大限之在邇 趣令爲之也 至七月二十一日 示微疾 喚侍者命筆口 占二偈 一曰 刹海虛空都撲落 廓然天地未分前 欲識三空空處轉 越峰看取昫三千 又曰 一星揮破三眚夢 隻劒撞開大寂關 萬古堂堂眞面目 何時何處不相看 至二十二日巳時 集衆而訣曰 觀此無常 各自勉旃 聲盡坐滅 報年七十四 積夏五十八 于時枯旱 天無纎翳 忽於空中 瑞氣蟠渙 白雲盖其山 日暮甘雨 方百里田野普洽 人謂爲師滌塵雨 或云死猶濟物 前數日 終南山白晝大震聲動天地者 一餉間 居後夜三更 庵僧二人未眠寢 見中堂傾覆 二人同時大呼驚走 一塲衆大駭 執其僧而覽其堂 堂無傷而僧云夢也 盖亦先徵法樑之摧德山之頹歟 

계묘년(경종3년1723) 사월 초하룻날 밤 꿈에 몸이 연못에 빠져 자유롭게 수영하다가 선회하며 가운데서 솟아나오니 심신이 쾌활하고 의심하고 막혔던 것이 풀려 중도(中道)에 들어가는 것을 누군가가 뒤에서 채찍으로 휘몰아 주는 것과 같았다.

이후로 혜해(慧解, 지혜로 모든 사리를 잘 깨우치어 앎)가 절로 일어나 법설(法說, 불법에 합당한 말)에 걸림이 없어 삼선삼관(三禪三觀)과 향상일로(向上一路, 향상하는 유일한 길)가 각각 그 근기에 마땅하고 학인(學人)을 맞이함(提接)에 빠뜨리지 않았다.

이교도나 풍속이 다른 무리에 이르기까지도 중생의 근기에 걸맞게 널리 제도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그의 장애 없는 융통한 지혜의 힘이 없었다면 능히 이와 같았겠는가.

그 화엄중(華嚴中)의 백 일십 공 망계(百一十孔網界)와 이십 중의 넓고 큰 찰토(二十重廣大刹), 그 나머지 선가(禪家)의 일가 삼왕(一家三王), 오위편정(五位偏正), 삼요 현 사조용(三要玄四照用)과 옛날과 오늘 불조의 일체 기이한 방편과 같은 것들을 다 자신의 일상생활에서는 이미 묵은 추구(蒭狗, 쓸데없이 되어버린 물건)가 되었으니 그의 정력(定力, 선정의 힘)이 발한 바가 아니라면 이와 같았겠는가.

대사는 승도들을 단속할 적에는 “도사(導師)와 교부(敎父)에 어찌 종자가 따로 있겠느냐. 사람은 진실한 믿음이 있다면 거의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너희들이 출가를 했더라도 어버이가 있고 임금이 있다. 신하되고 자식 된 자가 어버이 봉양하는 도리를 다하지 않고 임금에 대한 정성을 힘쓰지 않는다면 패역을 범하는 것이 되니 함께 살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문하에서 거처하는 자들이 감화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끗보기를 분토(糞土, 더러운 흙)처럼 했고 불법을 보배로 삼고 믿었으며 손님과 대중을 대접할 적에도 멀고 가까움이 없었다.

대체로 실제의 행동이 이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은 참 보살이 세상에 출현했다고 말하였다.

마음속으로는 남의 스승 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여러 절집에 괘탑(掛塔, 승당에 들어가 오래 머무르며 수행생활을 하는 것)할 때 찾아오는 승도들이 혹 번거로우면 이름을 거두고 다른 산으로 옮겼어도 대중들이 그래도 추종하였다.

다시 세상에서 명예를 구하고 싶지도 않아서 사대부들이 만나보기를 요구하면 진실로 사양하고 물러나 피하였으나 명성은 저절로 드러났다.

경술년(영조6년1730) 쌍계사의 요청에 응하여 돌아가자 배우려는 무리(學衆)는 더욱 많아졌다.

신해년(영조7년1731) 봄에 상족제자 목암(牧菴)이 대사의 명에 의하여 정관(靜觀)ㆍ임성(任性)ㆍ원응(圓應)ㆍ추계(秋溪) 네 화상의 진영을 공경하게 그려 용추사(龍湫寺)에 봉안하였다.

임자년(영조8년1732)에는 높은 벼슬아치들의 추중(推重, 높이 받들어 중요하게 여김)을 피하여 병을 핑계대고 명예를 마다하며 용추사에 석장을 세웠다.

당시에 목암(牧菴)이 판전(板殿, 경판을 보관하는 전각)에 있으면서 대사를 윗방(上室)으로 맞아들이고 선교의 매우 깊은 뜻을 묻자 오히려 최후의 게송 한 수(末後一偈)를 주며 이로써 종지(宗旨)를 전하고서 겸하여 법제자(法眷)로 삼고는 화엄경을 강설하였다.

계축년(영조9년1733) 가을에 사자산 적조암 보경실로 돌아와 머물며 불법을 같이 닦는 벗들(法侶)을 위하여 선교의 글을 강의하였으니 대화 한마디 말씀 한마디가 일상생활 자신의 본심 사(本心事) 아님이 없었다.

갑인년(영조10년1734) 봄에는 고경(古鏡)의 무리에게 명하여 부용 영관대사로부터 추계 유문대사에 이르기까지 5대의 진영을 그려 종남산 전주 송광사에 봉안하게 하였다.

선정(禪㝎)에 드는 틈틈이 글을 모아 〚불조선격佛祖禪格〛과 〚자기삼궁보경삼매自己三宮寶鏡三昧〛 각 1편씩을 책으로 엮어 바로 우뚝한 기봉(俊機)을 보여주었고 아울러 〚이학류편理學類篇〛과 〚하락주설河洛註說〛을 취하여 각 1편으로 모으고 한편으로는 예리하고 영리한 자질을 지닌 자들(利根)로 하여금 폭넓게 많이 읽어 막힘이 없게 하고 한편으로는 학문에 노둔한 사람들로 하여금 가까운 곳에서 먼 곳까지 가도록 했으니 사람들은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마음(二利之心)을 늙어서도 더욱 힘쓴다.”라고 말하였다.

젊었을 적에 지은 시문 같은 것들은 문인 고송 회경(古松懷瓊)과 고경(古鏡)이 흩어져 없어진 것들을 수습하여 4편으로 완성했으니 2편은 세속의 문장이고 2편은 출세간의 법어이다.

을묘년(영조11년1735)에는 나이가 들어가자 지방을 돌아다니며 교화하는 일을 마치고 문도들에게 이르며 말하기를, “돌아가자 구나, 돌아가자 구나. 어찌 근본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쌍계암(雙溪庵)은 바로 선사(先師, 돌아가신 스승)께서 출입하며 자취를 남기신 곳이라 종가의 본암(宗家本庵)이 되니 내 장차 그곳에 나아가 마치리라.”라고 하였다.

구월 열흘날 다시 쌍계암으로 돌아와서는 전우(殿宇)가 기울어 옛 모습으로 복구할 수 없음을 보고는 몹시 민망해 하였다.

정사년(영조13년1737) 봄을 넘기고 양성(養性)과 선월(船月)의 무리가 나와 며칠이 걸리지 않는 동안에 중수(重修)했으니 대한(大限,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대개 미리 알고 재촉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칠월 스무하룻날 가벼운 질병을 앓으시더니 시자를 불러 붓을 잡게 하고는 입으로 두 게송을 불렀다. 첫 번째는,

刹海虛空都撲落 육지와 바다 허공 다 쳐서 떨궈버리니

廓然天地未分前 확연한 천지가 나누어지기 전이로다.

欲識三空空處轉 삼공의 공이 流轉하는 곳을 알고자 하느냐

越峰看取昫三千 저 봉우리 너머 해 돋아 따뜻한   삼천대천세계를 보고 알아차리라.      

 

또 읊기를,

一星揮破三眚夢 별 하나가 세 봉사의 꿈을 휘저어 깨뜨리고

隻劒撞開大寂關 한 자루 검으로 대적 관을 밀어 젖히네.

萬古堂堂眞面目 만고에 당당한 진면목이 드러나니

何時何處不相看 어느 때 어느 곳에 선들 만나지 않으랴.

스무 이튼 날 사시에 대중을 모아놓고 영결하며 말하기를, “이 무상한 몸을 보고 각자 힘쓸지어다.”라고 했다.

소리가 끊어지고 앉은 채로 입적하였으니 보년(報年)이 74세고 적하(積夏)는 58년이었다.

당시에 가뭄으로 식물이 말라죽고 하늘에 티끌 한 점이 없었는데 갑자기 공중에 서기가 어리면서 빛이 나고 흰 구름이 그 산을 뒤덮더니 날이 저물 때에는 단비가 내려 사방 백리 들판을 두루 적셨다.

사람들은 “대사께서 속세의 티끌을 씻어 내리는 비를 뿌렸다.”라고 하였으며 혹자는 “죽어서도 외려 만물을 구제하셨다.”라고 말하였다.

여러 날 전에도 종남산에서는 대낮인데도 큰 우렛소리가 잠깐사이에 천지를 진동시켰다.

그 다음 날밤 삼경에 암자에서 승려 두 사람이 잠들지 않고 누워만 있었는데 중당이 뒤집어엎어지는(中堂傾覆) 것을 보고 두 사람이 동시에 크게 소리를 지르고 놀라 달아났다.

한바탕 대중들이 크게 놀라면서 그 승려들을 붙들고 그 당을 살펴보자 당은 손상된 곳이 없고 승려들은 “꿈이었다.”고 말하였다.

이는 또한 법의 대들보가 부러지고 덕산이 무너지는 앞선 조짐이 아니었던가(盖亦先徵法樑之摧德山之頹歟).

[다음 호에 계속]
 

▲해강 김규진 글씨 
▲해강 김규진 글씨 
▲전주 종남산 송광사
▲전주 종남산 송광사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