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인/서울대 명예교수ㆍ사회학 
▲전상인/서울대 명예교수ㆍ사회학 

벨 에포크(Belle Epoque)란 한 나라의 ‘아름다운 시절’을 회고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전쟁 없는 평화기에 국민 대다수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 문화적 융성을 구가하던 일종의 ‘태평성대’다. 주로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까지의 프랑스를 지칭하나 그 무렵 많은 서유럽 국가들이 포함되기도 한다. 상대적이긴 하나 모든 나라 역사에는 나름의 벨 에포크가 있다. 인생으로 치면 삶이 꽃이 되어 빛나는 순간, 곧 ‘화양연화’(花樣年華)라고나 할까.

개인적 생각에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벨 에포크는 1987년부터 1997년까지의 10년 정도다. 우선 탈냉전 시대 남북한 국력 격차 심화와 함께 전쟁 공포가 크게 줄었다.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돌파하며 고도 대중소비 시대가 시작되었고, 6·29선언 이후 민주주의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았다. 88올림픽을 전후하여 세계화의 빗장 또한 활짝 열렸다. ‘3당 통합’이나 ‘DJP 연합’ 등을 통해 ‘가능성의 예술’이라는 정치 본연의 존재 이유가 돋보이기도 했다.

그 무렵 정부는 OECD 가입을 통해 대망의 선진국 진입을 대내외에 자랑했고, 35년간 이어지던 ‘5개년 계획’ 또한 보란 듯 버렸다. 학계에서도 자화자찬이 유행했다. 소위 ‘아시아적 가치’ 담론은 유교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전통 속에 자본주의 발전과 민주주의 이행의 인자(因子)가 본래 들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세계화가 결코 서구 문명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뜻으로, 한국사의 오랜 열등감까지 떨쳐낼 기세였다. 하지만 축배는 독배가 되었다. IMF 국가부도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때 우리의 전무후무한 호(好)시절은 민본주의와 실용 정신의 개가였다. 신생 분단국가로서 살아남는 것만큼 간절한 희망은 없었고, 먹고사는 것만큼 절박한 소망도 없었다. 이에 이승만ㆍ박정희 시대는 조선조의 공리공론 정치와 해방정국의 이념전쟁에서 벗어나 국정의 방점을 부국강병 및 민생ㆍ민부(民富)에 확실히 찍었다. 국민 대다수는 일이 곧 삶이던 열정의 시대에 동참했고, 개인보다는 나라, 현재보다는 미래를 더 중시하는 희생의 미덕을 감수했다. 산업현장에서는 물론 학생운동도 그러하였다.

그러던 사이 한국인의 ‘마음의 습속’이 달라졌다. 어떤 의미에서 이 땅의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은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이었다. 근면한 한국인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한국인을 합리적ㆍ경제적 인간으로 만든 것이다. ‘코리안 타임’이라는 악습의 소멸이 이를 웅변한다. 정직한 노동을 통해 ‘밥벌이의 무거움’을 감내하는 자립적ㆍ주체적 개인이 성장했으며, 이는 시민의식의 태동과 민주주의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근대 국제질서와 글로벌 경제에 가담하면서 한국인들은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닌 세계인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물론 그 이면의 사회구조적 적폐(積弊)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새로운 시대정신은 그 이전 대한민국의 성취를 통째 부정하며 ‘목욕물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리는’ 우를 범했다. 이른바 386 집단의 정치권력화와 더불어 한국 사회에는 이념의 시대가 도래했고 그 절정이 바로 지난 정부 때였다. 좌파ㆍ진보 이념은 포퓰리즘과 결합하면서 우리 사회의 ‘디폴트’(default, 기본값)로 굳어졌다. 사실 문재인의 평화와 조국의 정의, 이재명의 민주는 사전상의 본래 뜻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과 원칙, 맞고 틀림에 대한 상식과 과학이 거의 무너진 상태다.

그렇다고 해서 집권 3년 차에 다가서는 윤석열 정부가 언제까지나 과거 탓, 야당 탓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대통령의 발언에 이념이나 가치 관련 언급이 부쩍 많아지는 모습은 한편으로 이해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려스럽다. 자유주의든 시장주의든 애국주의든 말인즉슨 다 옳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거나 국민이 다시 뛰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래도 민생이고 경제이며, 각자 삶이다. 필요하다면 ‘악마’의 손도 빌리고 ‘지옥’까지도 발품을 파는 실용주의만이 지지율 1%라도 올리고 총선에서 의석 하나라도 늘린다. 강대강 이념 프레임은 자충수가 될 수도 있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가 더 무섭다. 통상 좌파는 말로 일하고, 우파는 일로 말한다. 우리의 추억 속 벨 에포크가 그렇게 만들어졌듯이 말이다.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기는 정치

윤석열 정부는 출범 때부터 노동ㆍ교육ㆍ연금 개혁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했다. 공공ㆍ재정ㆍ산업구조 개혁도 절실하다. 이는 우리가 저성장 고착화를 막아 일본식 ‘잃어버린 20년’에 빠지지 않게 할 필수적인 과제다. 이 국가적 과제를 이루려면 국회에서 최소한의 의석을 확보해야 한다. 그게 안 되면 개혁은 시작도 할 수 없다. 단순히 여야 선거 승패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결과를 보면 이 중대 국가 개혁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득표율 차이가 17%로 벌어졌고 2030 세대와 중도층도 윤 정부에 등을 돌렸다고 한다.

윤 정부와 여당에 대한 실망감이 누적된 결과일 것이다. 이재명 대표의 각종 불법 비리 혐의와 민주당의 입법 폭주, 괴담ㆍ가짜 뉴스 선동에도 불구하고 윤 정권 심판론이 더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이다. 대통령실은 “결과를 엄중하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관건은 앞으로 윤 대통령의 국정 스타일이 바뀌느냐일 것이다. 국정 방향은 대체로 옳지만 그 방식과 태도가 문제라고 여기는 국민이 많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생각을 의식하지 않다 보니 민심과 괴리가 생기고 이 간극이 자꾸 더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이 눈치를 살피라는 의미가 아니다. 인사와 정책에서 좀 더 소통하고 설득해야 한다. 지금은 매사에 일방적으로 밀어 붙인다는 느낌을 준다. 여당의 강서구청장 후보 선정도 주위 시선을 일절 무시하고 밀어붙였다.

윤 정부가 성공하려면 국민 마음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국정 운영에 필요한 의석을 얻고 개혁 과제도 이룰 수 있다. 국민은 대통령의 겸허하고 진솔한 자세를 인사를 통해 보고 느낀다. 그런데 정치에선 취임 이후 지금까지 누구를 내치고 배척하는 기류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통령은 국정 책임자로서 배척하기보다는 사람을 모아가야 국민의 지지를 받는다.

대통령실과 여당이 지나친 상하 관계가 되면 꼭 필요한 정치가 작동하지 않게 된다. 지금이 그런 상태다. 대통령실과 정부에서 잘못 하는 일이 있으면 여당에서 여론을 전달해 수정하는 시스템이 거의 작동하지 않고 있다. 지나친 상하 관계가 되다 보니 지금 국민 눈에 여당은 보이지도 않고 있다. 강서구청장 선거 현장에서 여당 의원들이 이를 실감했다고 한다.

주식 의혹과 인사청문회 퇴장 논란을 빚은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자진 사퇴한 것을 시작으로 윤 정부는 더 적극적으로 민심을 살펴야 한다. 국민은 선거로 의사 표시를 한다. 대통령과 여당이 이에 응답하면 지지한다. 응답하지 않으면 완전히 등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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