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정/한학자
▲ 김규정/한학자

和尙諱子秀 字孤松 號無竟 全州人 姓南陽洪氏 父諱世昌 母金氏 金夢石佛化僧而來告曰 願爲母子 仍有身 以庚熙甲辰二月十三日亥時生 幼而淸美 十餘歲時 有相者曰 方面秀眉 應眞其像 術者曰 空手去來 自祿萬鍾 眞空門立身之命 年及十二 請出家 父母礭不許 乃託辤曰 學業宜在山 父母不拒 遂投於終南山松廣寺文式長老 凢所學 通大義 勤讀誦 人稱奇童 至十六歲 祝髮受戒於澄波大德 來少于父母 則母始言曩日之夢 誡之曰 海旣出家 勤修佛道 拔我苦聚 其付囑如此 心益激發 遂訪秋溪有文大師於崷崒山雲門寺 修出家業 恐不效父母之付托 勤勤日課 處其門十餘載 學盡禪敎文 蒙印可而傳法法胤 以芙容靈觀爲六世祖焉六世者 淸虛休靜 靜觀一禪 任性冲彥 圓應智根 秋溪有文 至于師 自爾退處私室讀盡群籍 愽其知見 粤在肅宗朝 摺選八道高僧四十九人 設大佛事於舍那寺 時秋溪和尙與其選 師以沙彌從會中 七七大德 見師才氣 皆賀秋溪得大法器 稱羨不已 然後更擬遠遊叅決 先於湖嶺兩路 訪高門大家 扣決其旨趣 自九疇十翼河洛圖書 以至老莊玄談秘訣 莫不通其文而達其理 有時著述 詩之衆體 文之諸格 皆得其妙焉 旣還從秋溪 諸山學衆咸服其三敎之具通 文章之獨步 唯恐親炙之居後也 以歲戊辰 奉和尙 還駐於崷崒山雙溪庵 庵師之學業成功地也 至己巳九月初二日 哭和尙喪 收歛纔罷 又遭嚴親訃 哭奔家庭 哀毁如禮 殯事方畢 即還于山 和尙闍維 一依僧禮 與性冾長老 奉超骨 乞舍利 樹浮屠於松廣寺之坎麓 後移建于東峯之崖 至於親喪 親無期功 力藉諸侶 壽封於先山 人稱能人所難 兩家孝子 闋服後 遠叅慕雲大知識於佛靈山 請益華嚴圓覺鈔與起信論 又聞震虛敬淨在德裕山 方工禪文 徃叅一夏 機鋒未契 遂反故山 過于崷崒山崇岩寺 爲寺僧所挽 始開堂於寺之白蓮社 即歲癸酉 師年三十 遠近學侶稍集焉 其秋移駐於山之內院庵 藹然爲一大講市 至乙丙大無 家兄貧 不能供母 扶慈堂入深院洞 乞粟採蔬 竭誠奉養 人謂反哺之誠至矣 至丁丑歲 從慈命 奉還于兄家 師歸于雙溪庵 至己卯迫於化緣 移錫于獅子山龍華庵 自其遍遊母岳之長佛庵 淸凉之瑞雲 崷崒之西窟 秋月之龍湫 雲住之龍藏 廣德之諸蘭若 隨所駐 設講禪敎文 學衆寔蘩 庚寅還赴龍湫之請 栖息此寺 盖四度 可謂有緣 辛卯五月初十日 遭慈母喪 權厝近地 以先山不利 將欲新卜 以誠求之 至壬辰秋 赴淸凉山圓岩寺之請 學衆盛且盈百 自此徃于終南 至乙卯三月十四日 遭恩乎喪茶毘已 移錫於威鳳寺 轉遊於崷崒獅子之中 至辛丑春 駐新興寺之寂照庵 偶於數節峰底 占得一地 壬寅春 遷前後喪而同窆焉 人謂至誠所感 能得吉兆也 庵去墳山牛鳴間 時時省護 若儒家廬墓之禮 自此頓不赴諸山之請 乃於庵之乾隅 架室數間 扁曰寶鏡 居此以來 專精法界觀 廢寢忘味

◆무경당 대사 행장
- 문인 회경 기록

화상의 휘는 자수(子秀)이고 자는 고송(孤松)이며 호는 무경(無竟)으로 전주사람(全州人)이다.

성은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부의 휘는 세창(世昌)이고 모는 김씨(金氏)이니 김씨의 꿈에 석불(石佛)이 중(僧)으로 변해 찾아와서 고하기를, “어머니와 자식사이가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곧 임신을 하였으니 강희 갑진년(현종5년1664) 이월 열 사흔 날 해시에 태어났다.

어려서는 맑고 아름다웠다.

열 살 무렵에 관상을 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네모난 얼굴에 눈썹이 빼어나니 그것은 응진(應眞,아라한)의 상이다.”라고 했고 점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빈손으로 와 만종의 녹을 누리고 진실로 공문(空門,불문)에서 입신할 운명이다.”라고 했다.

나이 열두 살이 되자 출가하겠다고 요청하였으나 부모가 완고해서 허락하지를 않았다.

이에 핑계를 대며 말하기를, “학업은 마땅히 산사(山寺)에서 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부모는 막지 않았다.

마침내 종남산 송광사 문식 장로(文式長老)에게 기탁했으니 대체로 배우는 것은 큰 뜻에 통하고 부지런하게 읽고 외우자 사람들은 재주가 많은 아이라고 칭찬했다.

열여섯 살이 되자 징파 대덕(澄波大德)에게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다.

부모님을 찾아가서 문안인사를 여쭙자 어머니는 지난날의 꿈 이야기를 처음 꺼내 타이르며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미 출가했으니 부지런히 불도를 닦아 괴로움의 무더기에서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했다.

부모님의 부탁은 이와 같았으니 마음이 크게 격발되었다.

드디어 추줄산 운문사(崷崒山雲門寺) 추계 유문대사(秋溪有文大師)를 찾아가 출가의 업을 닦았다.

부모님의 부탁을 본받지 못할까 두려워 부지런히 일과(日課)에 힘써 그 문하에서 살아간 지 십여 년 만에 선교의 글(禪敎文)을 다 배우고 인가(印可)를 받고서 전법제자(傳法法胤)가 되어 부용 영관(芙容靈觀)을 6세조로 삼았다.(6세는 부용 영관 → 청허 휴정 → 정관 일선 → 임성 충언 → 원응 지근 → 추계 유문 → 무경에 이른다)

그로부터 물러나 개인 방(私室)에 살면서 여러 가지 서적을 다 읽어 그의 지견(知見)을 넓혔다.

지난날 숙종 조(肅宗朝)에 팔도의 고승 49인을 선발하여 사나사(舍那寺,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에서 큰 불사를 베풀 때 당시 추계화상도 그 선발에 포함되었으니 대사는 사미(沙彌)의 신분으로 연회자리에 참석했다.

49인의 대덕이 대사의 재기(才氣)를 알아보고는 모두가 추계대사가 큰 법기(大法器)를 얻었다고 축하하며 칭송과 부러움이 그치지를 않았다.

그 후에 다시 먼 곳을 떠돌며 먼저 호남과 영남의 두 지방에서 배우고자(叅決) 이름난 문중의 대가들을 찾아가 그 종지를 두드리고 터뜨렸으니 서경(書經)의 홍범구주(洪範九疇)ㆍ주역(周易)의 십익(十翼)ㆍ하도낙서(河圖洛書)로부터 노장과 현담의 비결에 이르기까지 그 문리를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때때로 시의 모든 체재와 문장의 여러 격언을 저술하여 다 뛰어난 경지에 이르렀다.

이윽고 돌아와서 추계대사를 시봉하자 여러 산문의 많은 수행자들(學衆)은 그가 삼교(三敎, 儒ㆍ佛ㆍ道)에 다 통달하여 독보적인 문장을 쓰자 모두가 복종하며 오직 직접 가르침을 나중에 받을까만을 걱정했다.

무진년(숙종14년1688) 추계화상을 모시고 추줄산 쌍계암(崷崒山雙溪庵)에 돌아와 머물렀으니 쌍계암은 대사가 학업을 힘써 이룬 곳이다.

기사년(숙종15년1689) 구월 이튼 날 추계화상의 상을 당해 곡하고 염습을 겨우 마치자 또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가정으로 돌아가 예법대로 아버지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니 몸이 허약해 졌다.

빈장을 바로 마치고 곧 산으로 돌아와 추계화상의 다비식을 한결같은 승가의 예법대로 시행하였다.

성흡 장로(性冾長老)와 함께 초골(超骨)을 모시고 걸 사리(乞舍利)를 하고나서 송광사의 북쪽 기슭에 부도 탑을 세웠다.

(나중에 동봉 언덕에 옮겨 세웠다)

아버지 상을 치를 때 가까운 친척이 없어 여러 승려들의 힘을 빌려 선산에 안장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어려워하는 일에 능하였으므로 양가(兩家, 승가와 속가)의 효자라고 칭송했다.

결복(闋服, 탈상하고 복을 벗음)후 머나먼 불령산(佛靈山) 모운 대 지식(慕雲大知識)을 뵙고서 〚화엄원각 초華嚴圓覺鈔〛와 〚기신론起信論〛에 대하여 재삼 가르침을 청했다.

또 진허 경정(震虛敬淨)이 덕유산에 계시면서 선문(禪文)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에 가서 여름 한 철을 찾아가 뵈었다.

기봉(機鋒, 일촉즉발로 한번 당기기만 하면 붙잡을 수 없는 형세)이 계합(契合)되지 않자 마침내 옛 산으로 돌아왔다.

추줄산(崷崒山) 숭암사(崇岩寺)를 지나다가 이 절집의 승려들에게 이끌려 숭암사 백련사(白蓮社)에서 비로소 개당(開堂, 법회를 처음 열다)했으니 바로 계유년(숙종19년1693)이고 대사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배우려는 무리들이 점점 모여들자 그 해 가을 추줄산 내원암(內院庵)으로 이주하자 하나의 커다란 강연장이 성대하게 열렸다.

을해년(숙종21년1695)과 병자년(숙종22년1696)에 큰 흉년(大無)이 닥쳐 맏형이 가난해서 어머니를 공양할 수 없게 되자 어머니를 모시고 심원동(深院洞)으로 들어가 양식을 구걸하고 나물을 캐서(乞粟採蔬) 정성을 다해 봉양하니 사람들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효성(反哺之誠)이 지극하다고 말하였다.

정축년(숙종23년1697) 어머니의 명을 따라 다시 형의 집에 모시고 대사는 쌍계암으로 돌아왔다.

기묘년(숙종25년1699)에는 시주(化緣)를 재촉하려고 사자산 용화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로부터 모악산 장불암, 청량산 서운사, 추줄산 서굴, 추월산 용추사, 운주산 용장사, 광덕산의 많은 암자를 두루 돌아다녔다.

아무데나 머무르며 강좌를 개설해 선교의 글을 강론하자 배우려는 무리들(學衆)이 참으로 많았다.

경인년(숙종36년1710) 용추사의 요청으로 돌아와 이 절에 머물렀으니 아마도 네 번째 인연이 있다고 할 만하다.

신묘년(숙종37년1711) 오월 열흘날 어머니의 상을 만나 가까운 곳에 임시로 장사를 지냈다.

선산의 터가 이롭지 않자 새로이 터를 잡고자 정성으로 찾아다녔다.

임진년(숙종38년1712) 가을에는 청량산 원암사의 요청으로 나아가니 배우려는 무리들이 성대하게도 일백 명이 가득 차게 넘쳐나자 이로부터 종남산으로 갔다.

을묘년[을미년(숙종41년1715)의 오기인 듯하다] 삼월 열 나흗날에 은사의 상을 만나 다비식을 마치고 위봉사로 거처를 옮기고 추줄산과 사자산 양쪽 사이를 구르듯이 돌아다녔다.

신축년(경종원년1721) 봄에는 신흥사 적조암에 머무르다 우연히 수절봉 밑 한 곳에 터를 잡고 임인년(경종2년1722) 봄에는 부모님의 묘를 옮겨 합장했다.

사람들은 “지극한 정성에 감응되어 좋은 터를 얻을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적조암은 분묘가 있는 산에서의 거리가 소의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대략 5리)였으므로 때때로 보살피고 수호하니 유가(儒家)에서 여묘(廬墓)하는 예와 같았다.

이로부터는 급작스런 여러 산문들의 요청에도 응하지 않고 바로 서북쪽 모퉁이에 몇 칸의 집을 짓고 편액하기를 “보경당(寶鏡堂)”이라 했다.

이곳에서 거처한 이래로 오로지 법계관(法界觀, 〚화엄본경〛에서 말하는 법계 진리에 들어가는 관법)만을 정진하며 침식을 잊었다.  [다음 호에 계속]

▲전주 종남산 송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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