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에 책 수레가 진을 치고 여인들이 두른 매력 포인트 스카프의 곡선이 제격인 계절로 들어서면 사람들의 마음은 조급해지고 발걸음도 빨라진다. 딱히 잃은것도 없으련만 뭔가 되찾고 싶은 애착과 갈증은 아마 시간에 촉박한 다가 올 겨울을 의식하기 때문이리라.

구월이 오면 들꽃들의 야윈 모습에서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일고, 우리 사랑도 고즈녁히 강물처럼 흘러간다.

이제 대지에 어둠이 깔리면 약속이나 한 듯 숲속의 악기 곤충들이 일제히 메마른 육신에서 뽑아내는 고통스런 가을밤 연주도 필연이다.

그 음계의 슬픈 서정은 외딴 찻집 커피향의 감각에 추억을 실어 홀 몸인 당신의 가슴에 고독과 연민으로 번지고, 삶에 지친 어느 중년의 시선은 벌써 한 두 잎 허공을 맴도는 낙엽위에 쓸쓸히 머문다.

또 연인들은 달빛에 기대어 사랑에 고뇌하며 세레나데에 파 묻히고 시를 써 간다.

이제 한 층 무르익은 독서의 분위기는 누군들 거스릴  수 없음이다.

독서란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읽기는 자신의 삶 속에서 알아채지 못했던 것,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삶을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학습하는 행위이다.

쓰기는 자신에게 나아가 타인에게 말 걸기다, 메모나 요약에서 독서일기나 한 편의 글에 이르기까지 모든 쓰기는 우리 자신을 향한 대화의 시도라고 본다.

쓰기는 곧 자신과의 대화에서 다듬어진 삶의 이야기를 누군가에 전하고 그의 의견을 듣고자 하는 내밀한 욕구의 표현이다.

읽기와 쓰기는 각자도생의 추구가 아니라 연대의 몸짓이며 자신의 삶을 아름답고 멋진 작품으로 만들어 가려는 자유인들의 삶의 방식이다.

일상의 대화에서라면 흩어지고 묻혀져 버렸을 말과 사건, 깨달음을 글로 모아내고, 사람들 사이에서 그 내용을 지속적으로 변주하고 순환시키려는 훈련이자 놀이이다.

그 과정을 통해 삶의 지혜는 하나 둘 자신의 몸에 체화되고, 그 깨달음을 딛고 나누는 기쁨은 삶의 추동력이 된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과 글에 귀 기울여주고, 토론해 주는 서로에게 늘 우정으로 감사를 나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보고 앞으로의 더 나은 삶을 위해 골똘히 생각해 보는 전환점을 맞는다. 나에게도 50대 후반 30여년의 공직을 마감하는 은퇴를 앞둔 시점이 그런 기회였다.

은퇴후에 닦쳐 올 삶이란 의문과 운명의 영역이다. 은퇴자에겐 이제 일상의 속도가 달라진다. 마음대로 시간을 쓸 수 있게 된 데서 오는 자유가 오히려 고통 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결국 내가 가진 것 이라곤 평소 독서와 습작뿐이라서 이제 경계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났으니 읽기와 쓰기로 백수의 자유를 맘껏 펼쳐보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노후의 일상을 꾸리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훌쩍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릴적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던 나는 지극히 심미적이며 지적 호기심이 많은 편이다. 성장해 가면서 많은 독서를 통해 언어로서 멋진 집을 짓고, 언어로 삶의 모든 것을 통찰하며 비유와 리듬을 창조 해내는 문학의 그 신통함에 매료 되었다.

그 결과 기질과 취향으로 굳어져 버렸다. 그와 같은 배경으로 나는 2011년 공직에서 퇴임한 이듬해부터 향후 10년 동안 독서 천 권을 목표로 한 해 100권 이상을 읽기로 결심했다. 먼저 독서일지 표제부터 맛깔나게 ‘천 권의 책, 한 권의 노트’라고 작명했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을 읽고 난 후 그때마다 반드시 책명과 지은이 등을 연번을 붙여 굴비 엮듯 또박또박 적어갔다. 더불어 명문장과 시사성 있는 글들을 필사하여 소중히 보관하는 사서에도 충실했다.

기록이 쌓일수록 기쁨 또한 배가 되었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 귀여운 저금통 속에다 동전을 땡그랑 집어넣고 그 무게를 흔들어보는 충만감 이랄까? 그런 기분전환의 미려한 낭만이야말로 일 순간 마음을 풍요롭고도 쾌청하게 하며 독서열을 한 층 자극 하였다.

시도한지 10년째, 마침내 2022년 그 목표를 달성 하였다.

내가 독서 천 권을 먹었다. 어쩌면 소란스런 세속을 피해 사방의 도서관 구석진 곳, 곰팡내 나는 서고를 두더지 처럼 뒤져가며 밤샘 눈을 학대했던 고행의 성적표요, 나름 인내의 결실이다.

당시 2020년 발표한 한국인의 1인당 연간 독서량 6.1권을 훨씬 뛰어넘은 100권이란 우쭐한 성취감에 자축의 여흥으로 하룻밤 혼술에 취했었다. 정녕 소소한 것들에서 행복을 낚은 내 삶속의 아름다운 추억의 한편이 아니던가.

현대인은 두 개의 뇌를 갖고 산다고 한다. ‘스마트폰’이란 차갑고 둔중한 쇠뭉치, 그 새로운 두뇌는 인간의 타고난 두뇌가 수행하던 암기와 기억을 대신 해 줄 뿐만 아니라 일상의 지식과 정보를 실시간 으로 해결해 주는 마법사로 등장했다.

번거로운 일 거리를 넘겨주고 이제 한결 가벼워진 인간의 두뇌는 무엇으로 욕구를 채워줄까? 스마트폰이 할 수 없는 영역,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삶 속에서 살아 숨쉬는 읽기와 쓰기의 놀이가 아닐는지?

특히 활자로 찍힌 책이나 신문 읽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뇌의 근육이 발달하여 치매 발생률이 현저하게 낮다는 한 연구보고서는 매우 희망적이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이체는 독서관을 이렇게 정리 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좋은 문장을 얻는다는 것이다. 좋은 문장에서 내 마음에 이미 있었던 것, 그러나 꼭 집어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표면 위로 드러내어 밝혀준다. 그 때 가슴이 뛰는 이유는 암묵의 생각이 적절한 표현을 얻었기 때문이고, 한 순간 환해지는 이유는 꺼져있던 마음의 심지에 불이 댕겨졌기 때문이다.

영혼에 흔적을 남기는 문장과의 만남은 인생의 스승을 만나는 것 만큼이나 삶의 축복이다..... 그 하룻밤, 그 책 한 권, 그 한줄로 혁명이 가능해 질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독서 천권에 안주하지 않고, 거기다 또 천권을 플러스, 이 천권을 목표로 도전 목하 열독중이다. 가을 이맘때면 독서의 날개는 가벼워서 더 좋다.

 나의 독서일지 ‘천 권의 책, 한 권의 노트’그 여백은 넓다. 남은 여백이 미지의 책명으로 다 채워질때까지 나는 존재할까?

조선의 최대 문장가 간서치(책만보는 바보) 이덕무의 생애 독서량 2만권 까지는 아직도 수 만리 아득한 데, 나의 신발이 그곳 문턱에 닿기까지 내 몇곱의 생이 필요 하건만 아쉽게도 유한한 인생은 그걸 허용하지 않는다.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