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정/한학자
▲김규정/한학자

[지난 호에 이어]

●이의경李毅敬(숙종30년1704甲申~정조2년1778戊戌) 향년 75

字는 경호(景浩), 號는 동강(桐岡)ㆍ우락당(憂樂堂). 본관은 원주(原州).

전라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마을 백운동 원림 주인 애일암(愛日菴) 이언렬(李彦烈)의 아들로 강진ㆍ해남에 세거하는 原州李氏 家門의 대표적 인물이다.

영조24년(1748) 익위사부솔(翊衛司副率)이 제수되자 나아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스승이 되었으며 사도세자로부터 남다른 존경을 받아 친필 시(詩)를 하사받기까지 하였다.

전라도 강진군 성전면 금당리에 영정을 봉안한 ⟪동강영당桐岡影堂⟫이 있다.

⟦桐岡先生遺稿⟧는 1918년 간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불교 관련 문헌으로는 綾州雙峰寺大法堂諸佛改金募緣文, 月出山寶藏庵重修募緣文, 雪潭大師塔誌, 碧霞大師舍利塔碑가 있다.

◆上東岡金先生 墰

-雪潭自優 大師(숙종35년1709~영조46년1770)

何暯閣上陪高論 日夜固知三生勝緣 下情欣幸無所紀極 而況奉寶唾 留鎭禪床 長對玉壺氷者乎 月出靈區甲於南維 又是閤下所寬之土 則宜更東林坐雪 喜追陶惠源源之踵 而浮雲行止 積債名山 有所病心 强此般運仁風邈矣 淸化久外 情牽與奪 中心搖搖 伏未審 盛夏毒熱 撫字起處 申申如 夭夭如 仰慕之忱 對較泰山溟海 未知誰高誰深 山人艱得雲山一枝栖 姑全雲水之樣 始所謂內典工夫 而昏肚依前 解不入微 現前根塵 日與心鬪 戰勝之功 杳然息望 平生學解 盡是情見 實地上眞的 不欲闇黮 得乎 封彊已殊 步武亦落落 音徽之相接 將似阻曠 瞻望南雲 尤切悵黯 委遣迷弟 徃候記室 謹此告別餘 伏祝若時萬重 一絕山偈 出於愚衷 未敢隱諱 伏惟兼垂下鑑 

<雪潭集>下

◆동강 김 담墰 선생에게 올리다.

어떻게 누각 위에서 모시고서 수준이 높고 탁월한 논설(高論)을 들었는데 어둡겠습니까.

밤낮으로 삼생의 수승한 인연(三生勝緣)을 진실로 알았으니 아랫사람으로서 기쁘고 다행스러운 심정은 끝 가는 데가 없습니다.

하물며 빼어난 시구(寶唾)를 받들고 선상(禪床)에 머물며 오래도록 옥호빙(玉壺氷, 깨끗한 마음)을 마주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월출산은 남쪽지방에서 경치가 뛰어난 곳으로 으뜸이지만 또한 이곳은 합하(閤下)께서 다스리는 관할지역입니다.

마땅히 다시 동림사(東林寺) 눈밭에 앉아 도잠과 혜원의 끊임없는 발자취를 즐겁게 따라야 하는데 뜬구름처럼 떠돌다 명산에 부채를 짊어지고 마음의 병을 앓다 고달프게도 이곳 인애의 바람(仁風)이 까마득한 곳에 이르렀습니다.

훌륭한 교화를 받지 못한지가 오래여서 정에 이끌려 주고 뺏고 하다 보니 중심이 자꾸만 흔들립니다.

삼가 안부를 듣지 못합니다마는 한여름 혹독한 무더위에 선정(善政)을 베푸시느라 마음은 활짝 풀어지고 즐거우시겠지요.

우러러 사모하는 정성은 태산이나 망망대해를 마주하여 빗대어 보아도 누가 높고 누가 깊은지 모르겠습니다.

산인(山人)은 어렵사리 깊은 산속 한쪽 가지에 깃들어 살면서 운수납자의 형태는 잠시 갖추어 비로소 이른바 불경 공부를 한다고 할 수 있으나 어두운 마음이 예전과 같아서 작은 것도 풀리지 않습니다.

앞에 나타난 육근(六根)과 육진(六塵)만 있어 날로 마음과 다투고 있으니 싸워서 이겨낼 일은 아득합니다.

평소 알음알이를 내는 것(學解)은 망정으로 보는 것(情見)에 불과할 뿐이어서 실제의 참된 경지에서 암담함에 빠지지 않고자하나 그렇게 되겠습니까.

강역이 이미 다르고(封彊已殊) 발걸음도 맞지가 않습니다(步武亦落落).

소식을 주고받은 지가 너무 오래 막힌 것 같아 남쪽 구름만 바라보니 참담한 마음 더욱 처절합니다.

미혹한 제자를 보내 기실(記室)에 문안인사 드리고 이로써 삼가 작별을 고하며 나머지는 그때처럼 평안(萬重)하시기를 엎드려 축원합니다.

감히 숨기거나 꺼리지 않고 저의 충정을 내어 산승(山僧)이 게송 한편을 지었으니 삼가 살펴 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注)

六根 -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

六塵 -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

玉壺氷 - 청정하고 고결한 품격을 말한다. 남조 송(南朝宋) 포조(鮑照)의 시 ‘백두음(白頭吟)’에 “충직하기론 붉은 색 밧줄이요, 청정하기론 옥병 속의 얼음일세.[直如朱絲繩 淸如玉壺冰]”라는 표현에서 유래된 시어(詩語)이다.

記室 - 편지의 상대편 이름 왼쪽 밑에 써서 경의를 표하는 말.

●김담金墰(숙종4년1678~영조19년1743) 향년 66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관(士寬). 父는 김우화(金遇華)이다.

36세 때 숙종(肅宗) 39년(1713) 계사(癸巳)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7위(27/51)하고

40세 때 숙종(肅宗) 43년(1717) 정유(丁酉) 중시(重試) 을과(乙科) 1[亞元]위(02/05)를 한 소장 기예이다.

영조18년(1742)에는 판결사가 되었다.

◆答春潭

無等聞有衆議 今升無等之法座 喜有緣於無等也 從無等闡揚宗敎 將期於無等之進耶 堪慰老懷也 未知到無等無魔 而法履珍迪坐地後悔難容處 須勵新心 特有室中 新功業也 才老巡城 得名已晩 即以春潭 送揭室額 寒潭之魚 生角於暄潭 衰門之振 從今有望耶 同友之歸 略及緖餘 不宣

 

<雪潭集>下

역자 注)

설담 대사 문하에는 삼담三潭(雲潭ㆍ春潭ㆍ華潭)이 있다. 삼담은 모두 큰 강사로서 당시 사람들은 “삼남(三南, 충청ㆍ전라ㆍ경상도)의 학인들이 모두 삼담에게 귀의하였다.”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춘담 대사에게 답하다.

무등산에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으로 이제 무등산의 법좌에 오르게 되었다고 들었으니 무등산에 인연이 닿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무등산으로 부터 교리(宗敎)를 드러내 밝힌다면 장차 무등산의 진보를 기약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늙은이의 마음이 위로가 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무등 무마(無等無魔, 더할 나위 없이 마가 없는)의 경지에 이르러 수도생활은 진중하며 앉아있는 곳은 조용히 지내기가 어렵다고 후회하지는 않습니까.

모름지기 새 마음으로 힘써야하니 특히 방장의 방안에 있는 경우라면 공업(功業)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늙어서 겨우 도성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이름을 얻기는 너무나 늦었습니다.

다만 춘담 대사로 말하면 방에 현판을 걸어 놓고 보내면서 차디찬 연못의 물고기가 따스한 연못에서 활기차게 뛰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쇠락한 종문을 진작시키는 일은 지금부터 바라볼 수 있습니다.

벗들이 돌아가는 길에 대략 여론(餘論)을 부칩니다.

이만 줄입니다.

◆答蓮潭

料表拜翰 知象車下占迦山 想迦山增重也 書未復 歲忽云新 伏惟大講候佳迪 仰賀維新 弟亦爲此所强 臘末移次 即舊日侍從周旋處 觸目生感 而今年已登六十歲 衰換已極 心甚瞿然 奎軰點汚法席而已 何感之有 瓶錫南下 吾行又北上 對床談猝未易 臨書增悵 不宣

<雪潭集>下

◆연담 대사에게 답하다.

뜻밖에 서한을 받고서 가지산 보림사에 발길이 머물렀음을 알았습니다.

생각하건대 가지산 보림사는 더욱 귀중하게 되었습니다.

보내주신 서한에 미처 답장을 드리지도 못했는데 세월은 갑자기 새해가 되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대사께서 강론하며 보내시는 생활은 좋으십니까. 새해를 맞아 우러러 하례 인사드립니다.

저도 섣달 말에 억지로 이곳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바로 이곳은 옛날에 대사를 모시고 접대하던 곳이었으니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감흥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올해가 예순에 이미 올랐으니 부쩍 쇠하여져 마음속으로는 무척이나 두렵습니다.

규배(奎軰, 못난 무리)들이 법석을 더럽혔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대사는 남하하시고 나는 다시 북상했으니 침상을 마주하고 담소하는 일도 끝내 쉽지는 않습니다.

서한을 올리니 더욱 서글퍼집니다. 이만 줄입니다.

▲순창 강천사 탑
▲순창 강천사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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