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정/한학자
▲ 김규정/한학자

[지난 호에 이어]

口占一律曰燈火明如燭如來佛像高老人俱皓白少輩摠賢豪笛奏歌聲咽琴催舞袖搖鍾鳴畵閣曉日生海門潮竊欲求和於坐上而抑恐東洛之夜宴白居易知不能加於楊汝士遽輟之曰笙歌鼎沸勿作此冷淡生活也而不能耳 越三日辛卯少年請題名于壁上以識後日從弟汝健亦曰此會一大勝事留題可也而又其名下表以某甲某乙則後之遊於斯者必稱曰某也某甲某也某乙壯哉是翁美哉是遊云爾則豈不韙哉 遂使白民俊列題于庵之榱前板仰視則信乎某也某甲某也某乙以其年考之則七十六十以至四五十鄕黨之齒於斯爲盛而若不湮沒則可爲百世之指點者也 遂引行至東庵及煙霞臺蕭蕭落木自有聲於風前潺潺澗水流無心於雲外卽抵三日菴則山之僧再修而未斷手矣 杜牧之半醒半醉遊三日此之謂乎 抵金剛窟架巖一室叅錯疑盡山谷云 金剛窟前藥草肥未知中州五臺山金剛窟亦如此否因題絶句曰再到金剛菴入定僧兩三行忙難問道留待後禪叅至盤若臺記曰尊者無說我亦無聞無說無聞是名盤若于時微雨霏霏落葉蕭蕭遂感而詠紫極宮悲秋之詩振策催歸于仙菴遂止于庵之石臺觀其歌以舞之二三年少之偃蹇衣沾不足惜歎喜何可支碧眼雲衲引坐於樓上觀其蒼髥赤葉交輝翡翠斂翼而和鳴者亦一勝槩也 左顧蒲巖盤礡其傍有小菴其上有佛影臺吾童子時一二師友避世讀書處而當時有或同登西臺仰觀老人星者已成陳跡吾獨年高則太白之於完公山題以獨遊滄江上終日談無味者不幸近之矣 遂感吟一絶曰依舊西臺擁翠屛至今留照老人星同時俛仰人何處獨倚寒松望眼靑又咏禪庵其一絶曰塔山遊興最冒雨向禪庵葉嶼違歸帆蒲巖鎻暮嵐西方諸佛子東國此奇男黃石知名久赤松可同叅塵心未盡歸思方催不得上蒲巖及烽臺是所謂竪亥追日而未窮扶桑者也 況且望見金塘島浮在海中吾輩之不得追其高躅者莫是只學武陵人暫遊桃源者耶 蓋昔子長之遊乃窮探名山大川之勝以助其文章發越之氣又加淮南子吾與汗漫期於八垓之上者是已中國人稱三神山在於東海而願生高麗國者有之吾儕生於長於老於斯也 而智異雙溪金剛萬瀑只聞其說未見其處其餘如楓嶽五臺雪嶽淸平妙香太白小白等山遠不可致身而住近名山亦不得一往見之豈非可歎也哉 留別諸老于石亭來訪朴有文贈詩曰松門孰記謝公賢詩酒當年有謫仙剩說名山流遠目開毫展軸半靑天歸來一室點檢仁智之樂人喧俗塵仙興難磨轉成維摩之病三日淸遊之地只如漆園瑚蝶中矣噫祖宗聳拔者子孫必有枝分關西崑崙乃此山之遠祖也 三韓外方丈乃此山之近祖蓋菴之數百有餘世稱八十九菴者必擧其最絶奇者而至于頹圮則此乃花雨中千劫須臾者也 餘不盡記故略擧其槩以供遊客之玩賞焉

萬曆三十七年己酉秋九月語山居士軒軒軒記

출전 〚軒軒軒文集〛

즉흥으로 오언 율시 한 수를 읊기를, 

燈火明如燭 등불은 밝기가 촛불 같으나

如來佛像高 석가여래의 불상은 높기만 하구나.

老人俱皓白 늙은이 머리는 두루 널리 새하얗고

少輩摠賢豪 젊은 무리들은 모두가 어질고 호걸스럽다.

笛奏歌聲咽 피리 부는 노랫소리에 목이 메니

琴催舞袖搖 거문고는 소매 흔드는 춤을 재촉하구나.

鍾鳴畵閣曉 종소리는 단청한 누각의 새벽을 울리고

日生海門潮 바다포구 조수는 날마다 일구나.

라고 하고는 상석에 있는 자리에 조심스럽게 화운시를 요구하고 싶었으나(竊欲求和於坐上) 문득 동쪽 물가(東洛)의 밤 연회에서 백거이(白居易)가 양 여사(楊汝士) 보다 뛰어나지 못함을 아는 것이 두려워 갑자기 거두어들이고 읊기를, “풍악으로 떠들썩한 자리에서 이렇게 냉담한 생활 짓지 말라. 해서는 안 될 뿐이다.(笙歌鼎沸 勿作此冷淡生活也而不能耳)”라고 하였다.

사흘이 지난 신묘일에 소년들이 벽에 이름과 이력을 기록하는 일(題名)을 요청하였는데 뒷날 종제 여건(從弟汝健, 역자 12대조)도 이것을 알고 말하기를, “이 모임은 아주 큰 흥겨운 유람이니 제명(題名)을 남기는 것이 옳다.”고 하였고 또 “그 제명 아래 모갑 모을(某甲某乙)이라고 표기한 뒤에 이곳을 유람한 사람들을 반드시 모야 모갑(某也某甲) 모야 모을(某也某乙)이라고 부른다면 장하구나, 이 늙은이의 아름다움이여! 이 유람 뿐이라고 한다면 어찌 아니 위대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마침내 백민준(白民俊, 용산 상금마을 수원 백씨 선조)으로 하여금 암자의 서까래 앞 판목에 올려다볼 수 있게 제명을 나열하게 하자, “모야 모갑 모야 모을이 사실인가.”라고 하였다.

그 나이를 살펴보면 70, 60까지가 4ㆍ50 향당의 나이보다 인재가 더 많아 인몰(湮沒)되지 않는다면 백세에서도 지목받는 자(指點者)가 될 만하였다.

드디어 행렬을 이끌고 동암과 연하대에 도달하자 잎 떨어진 나무는 쓸쓸하게 절로 바람 앞에서 소리를 내고 졸졸 흐르는 산골 물은 구름 밖보다 무심하였다.

바로 삼일암에 다다르자 산의 승려는 전각을 다시 수리하느라(再修) 아직도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未斷手).

두 목지(杜牧)의, “반쯤 취했다 반쯤 깼다 사흘 놀음(半醒半醉遊三日)”은 이것을 두고 말한 것인가.

금강굴에 다다르자 바위에 얹힌 어떤 방은 서로 엇갈리게 섞여(一室叅錯) 모두가 산골짜기(山谷)인가 의심하였다.

금강굴 앞 울창한 약초밭은 알아 볼 수가 없었으니 중주 오대산 금강굴도 이와 같지 않겠는가.

이어서 절구 시를 읊기를, 

再到金剛菴 금강암 다시 찾으니

入定僧兩三 선정에 든 중 두셋이라.

行忙難問道 바쁜 걸음에 도 묻기도 어려우니

留待後禪叅 머물다 기다린 뒤 참선하겠다.

라고 하였다. 

반야대에 이르러 기록하기를, “존자는 말씀이 없어 나도 들을 수 없으니(尊者無說我亦無聞), 말씀도 없고 들음도 없는 이것을 반야라 이름 하는가(無說無聞是名盤若).”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낙엽은 쓸쓸하여 마침내 감회에 젖어 이백이 자극궁에서 가을을 슬퍼하던 시(紫極宮悲秋之詩)가 떠올라 읊고 있는데 말채찍을 휘두르며 선암으로 돌아갈 것을 재촉하였다. 

암자의 석대(石臺)에서 드디어 가던 길을 멈추고 그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감복하여 두셋 연소자들의 젖은 옷을 어루만지며(偃蹇衣沾) 아끼는 마음에 화답하고 기뻐하기도 부족하였는데 어떻게 배겨 낼 수나 있었겠는가.

푸른 눈 운수납자(碧眼雲衲, 祖師行脚僧)가 누대 위 좌석으로 이끌어 바라보니 그 반백이 된 구레나룻 붉은 이파리가(蒼髥赤葉) 서로 눈부시게 비치고 물총새는 날개깃을 거두는(翡翠斂翼) 모습을 구경하고는 어울리며 화답하는 울음소리 또한 하나의 기막힌 경치(一勝槩)라고 생각하였다.

왼쪽을 돌아보자 널다 란 포암 그 곁에 작은 암자가 있고 그 위에는 불영대가 있는데 내가 동자(童子, 소년)시절에 한두 사우(一二師友)와 세상을 피해 독서하던 곳으로 당시에 간혹 서대(西臺)를 함께 오른 일이 있었으니 노인성(老人星)을 우러러보는 일은 이미 옛 자취가 되었다.

내가 유독 나이가 많이 들어 이태백의 공업을 죄다 마치고 산을 품평하며(山題) 창강 가(滄江上)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홀로 노닐다보니 말에 운치가 없는 것도 불행에 가까운 일이다.

드디어 감회가 일어 절구 한 수를 읊기를,

依舊西臺擁翠屛 예전과 다름없는 서대 푸른 병풍 둘렀으니

至今留照老人星 이제 와서는 노인성만 남아서 비추구나.

同時俛仰人何處 그 당시 면앙하던 사람들 어느 곳에 있는가

獨倚寒松望眼靑 홀로 차가운 솔에 기대자 시야가 훤하구나.

또 선암을 읊으며 그 절구 시 한 수는,

塔山遊興最 탑산에 노는 흥취가 최고니

冒雨向禪庵 비 무릅쓰고 선암으로 향한다.

葉嶼違歸帆 작은 섬은 돌아가는 돛배 떠나고

蒲巖鎻暮嵐 포암은 저문 이내에 잠겨있구나. 

라고 하였다.

서방의 수많은 불자(西方諸佛子)들이 동국(東國)의 이 특출한 사내 황석(奇男黃石)의 이름은 안지가 오래되었으니 적송자(赤松子)도 동참할 만하고 속세에 더럽혀진 마음을 다하지는 않았지만 돌아갈 생각에 이제한창 재촉해(方催) 포암과 봉대는 오를 수가 없었다.

이는 이른바 수해(竪亥, 우 임금 때 걸음 잘 걷는 사람)가 태양을 좇는다는 격이나 해 뜨는 광경은 마음껏 구경하지는 못하였다(未窮扶桑).

하물며 더구나 금당도(金塘島)가 바다 가운데 떠 있는 자태를 멀리서 바라보고 그 높은 자취(高躅)를 따를 수가 없었다. 

이는 그저 무릉 사람을 본받지 말고 잠시 무릉도원에 노닐라는 것이 아니겠는가(莫是只學武陵人 暫遊桃源者耶).

대체로 옛날 자장(子長, 사마천의 字)의 유람은 더구나 명산대천의 경승을 끝까지 찾아(窮探名山大川之勝) 천하를 두루 유력한 힘을 바탕으로 그 웅혼한 문장의 향기를 발산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게다가 회남자(淮南子,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의 말을 인용할 때 회남자淮南子라 지칭)는 나와 더불어 허황해서(汗漫) 팔방의 경계까지(八垓之上) 기약했으니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중국 사람들이 동해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을 일컬을 때, “바라건대 고려 국(高麗國)이라는 곳에서 태어나고 싶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나의 무리들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가지 않는가.

지리산의 쌍계, 금강산의 만폭동은 다만 그 말을 들었지만 그곳을 구경하지 않았고 그 나머지 풍악ㆍ오대ㆍ설악ㆍ청평ㆍ묘향ㆍ태백ㆍ소백 등은 산이 멀어 몸을 바칠 수가 없었다.

살고 있는 가까운 명산도 한 번 가볼 수가 없었으니 어찌 아니 탄식할 만하지 않은가.

석정(石亭)의 박을 내방하여 남아있는 여러 늙은이와 작별인사를 하고 문채 있는 시를 주면서 읊기를,

松門孰記謝公賢 산사에서는 누구나 어진 사영운 기억하겠지

詩酒當年有謫仙 시와 술 있으니 그 해에도 이태백이 있었구나.

剩說名山流遠目 명산 실컷 말하며 시야는 멀리도 닿으니

開毫展軸半靑天 붓을 들고 시축 펼치자 절반이 푸른 하늘이라.

라고 하였다.

돌아와 한 방에서 인지의 낙(仁智之樂, 仁者樂山智者樂水)을 점검하자 사람들은 웅성거리면서 속진에서 신선과 놀던 흥취는 견줄 수가 없고 더욱 유마의 병(維摩之病)이 되었으니 사흘 동안 고상하게 놀던 곳(淸遊之地)은 바로 장주(莊周, 漆園)의 나비의 꿈(瑚蝶夢) 이야기와 같다고 하였다.

아, 조종산(祖宗山, 주산主山 위에 있는 주산, 태조산)에서 높이 우뚝 솟은 산은(聳拔) 자손의 나뭇가지가 반드시 나뉘어 있으니 관서의 곤륜산은 바로 이 산의 원조(遠祖)이다.

삼한나라 밖의 방장산은 바로 이 산의 근조(近祖)인데 대개 암자의 숫자는 100여 개로 세칭 89암자는 반드시 최고로 뛰어날 때를 거론한 것이고 쇠퇴하여 무너져 내리면 이는 바로 꽃비 속 오랜 세월 가운데 매우 짧은 시간이다(此乃花雨中千劫須臾者也).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고 대략 그 대강만 거론해서 유람하는 나그네들이 즐기며 구경하는데 이바지하고자 한다.

만력 37년 기유(1609년) 가을 9월 어산거사 헌헌헌은 기록한다.

注)

少年安得及大年 -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소년은 대년에 미치지 못한다.〔小知不及大知 小年不及大年〕” 하였다. 〚莊子〛 逍遙遊編. 

維摩之病 - 석가(釋迦)와 동시대 사람인 유마(維摩)가 병을 이유로 석가가 설법(說法)하는 곳을 가지 않고 석가로 하여금 여러 비구(比丘)ㆍ보살(菩薩)을 시켜 자기 병상으로 문병을 보내도록 하였다. 〚유마경維摩經〛 방편품(方便品).

漆園瑚蝶 - 장자(莊子)의 ‘나비의 꿈’ 이야기를 말 한다. 칠원은 몽현(蒙縣)의 칠원 리(漆園吏)를 지낸 장주(莊周)를 가리킨다. 〚장자〛 제물론 편에 “언젠가 장주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다. 나풀나풀 잘 날아다니는 나비의 입장에서 스스로 유쾌하고 만족스럽기만 하였을 뿐 자기가 장주인 것은 알지도 못하였는데, 조금 뒤에 잠을 깨고 보니 몸이 뻣뻣한 장주라는 인간이었다.〔昔者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則蘧蘧然周也〕”라는 이야기다.

花雨 - 법화경의 여섯 상서祥瑞 중 하나인 우화서雨花瑞, 즉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상서이다. 불타가 설법하면 천신들이 감동하여 만다라화曼陀羅華ㆍ마하만다라화摩訶曼陀羅華ㆍ만수사화曼殊沙華ㆍ마하만수사화摩訶萬殊沙華의 네 가지 꽃을 비처럼 내려 보낸다고 한다.
 

▲천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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