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정/한학자
 김규정/한학자

◆壬辰募義檄書 -軒軒軒 金汝重(1556~1630)

全羅道寶城前縣監任啓英朴光前長興進士金汝重等與綾州縣令金益福謹再拜奉書于列邑諸友 嗚呼 國家所恃而無虞者下三道而慶尙忠淸旣已潰裂爲賊窟穴獨此湖南僅保一隅 軍糧輸運精卒徵發皆倚一道興復之機實在于此 今者以 王城爲急巡察領精兵有從海道上去之計兵使領數萬兵已越錦江兩義將亦各勤王已離本道列邑將士定將出去所餘無幾賊路咽喉備禦極疎湖西之賊已犯境上席卷之勢將成克復之望何恃 國家事岌岌乎誠可痛哭此義士奮發之秋也百以思之則賊至城下屠戮丁壯哀哉 生民措躬何地室家置之何所嶺南已然之跡 耳所聞也目所見也林藪竄伏之計左矣苟保性命之計誤矣等死耳 何不死於國事乎 況萬一控扼要害使賊勢沮遏則死中求生此其機也 雪恥復國此其時也 凡我道內必有遺漏之丁散亡之卒如使有識之士相與召募勸勵協力奮起自成一軍視賊所向固守要衝則上可以爲王師之聲援下可以保一境之生靈及此勉圖無若嶺南人 然嶺南之人當賊之初不思一心扞禦奉頭鼠竄是雖蒼黃急遽罔知所措之致而今日思之必有追悔矣 及其賊勢猖獗宅舍灰燼妻子汚辱然後義士奮起數處斬獲雖曰差强人意亦已晩矣 伏願僉君感創若時化誘輸情爭先振發赴期不後生等素乏弓馬之才不知韜靲之策制挺撻楚之計可謂疎矣 區區倡首者一以激義士之志一以奮勇士之氣人心所同然者未嘗泯滅必有所興起矣 檄到之日卽與有志之士曉諭一邑開錄軍人今月二十日來會于寶城官門一失事機後悔莫及 主辱不救何以爲人咸思終始而倡義僉君是圖焉

萬曆二十年壬辰七月十二日 

출전<軒軒軒先生文集>

◆임진년에 의병을 모으는 격서

전라도 보성 전 현감 임계영, 박광전, 장흥 진사 김여중 등은 능주 현령 김익복과 삼가 재배하고 여러 고을의 수많은 벗들에게 격서를 올립니다.

아, 나라가 믿고 근심하지 않는 것은 아랫녘 삼도인데 경상 충청은 그만 찢어 발겨져(潰裂) 적의 소굴이 되었고 유독 이 호남만은 겨우 한 모퉁이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군량을 실어 나르고(軍糧輸運) 정예로운 군졸을 징발하는(精卒徵發) 일은 모두 한 도(一道)에 의지하니 부흥의 기회는 실제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에 있어 왕성(王城, 한양)은 급박해서 순찰사가 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해안도로 가(海道上)로 쫓아가는 계책이 있고 병사는 수만 병력을 거느리고 이미 금강(錦江)을 건넜으며 두 의병장도 각자 왕실을 구원하겠다(勤王)고 본도를 떠났습니다.

여러 고을의 장사들은 장차 나아갈 곳을 정하여 남은 곳은 얼마 안 되니 왜적들이 몰려오는 길 요충지(咽喉)에서 성이나 보루를 외롭게 지키는 자(守備備禦)를 성글게 배치하면 호서지방의 왜적들은 경계 근처를 침범했어도 석권하는 형세만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국난극복을 바란다면 누구를 믿겠으며 나라의 일은 진실로 통곡할 만하고 매우 위태로운데 지금이야말로 의사들이 분발할 때입니다.

백 번을 생각해도 왜적들이 성 아래까지 이르러 장정들을 도륙한다면 슬프지 않겠습니까.

백성은 몸 둘 바를 모르니 가족(室家)은 어느 땅 어느 곳에 놔두어야 합니까.

영남지방에서 이미 드러난 자취는 귀로 들은 것이고 눈으로 본 것이니 숲과 덤불속으로 달아나 숨는 계책은 옳지 아니합니다.

구차하게 성명(性命)을 보존하는 계책으로는 잘못되었습니다.

죽음을 기다릴 뿐입니다(等死耳). 어찌 아니하여 나라의 일로 죽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만에 하나 요해처(要害處)를 제압하여 적의 세력을 저지시킨다면 죽을 고비에서 살기를 구한 것이니 이것이 그 기회가 됩니다.

치욕을 씻어내고 나라를 회복하는 이것이 그 때입니다.

무릇 저희 도내에는 기필코 빠지거나 새어나간 장정(遺漏之丁)과 흩어져 도망친 군졸(散亡之卒)이 있습니다.

만약 식견 있는 선비들이 서로 함께 의병 모으는 일을 부추겨 장려하고 협력해 떨쳐 일어나게 한다면 저절로 하나의 군대를 이룰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왜적을 맞닥뜨려도 요충지를 굳게 지켜낸다면 위로는 천자의 군사는 성원(王師之聲援)이 될 수 있고 아래로는 한 경내의 살아있는 일반백성(生靈)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이에 이르러서는 힘써 도모하여 영남사람과 같이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無若嶺南人). 그러나 영남지방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왜적을 맞아 한마음으로 방어하기를 생각하지 않고 머리를 감싸고 발을 포갠 채 두려워만 하니(奉頭鼠竄) 이는 비록 몹시 서두르다 허둥지둥하고 몸 둘 곳을 모르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오늘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뒤늦게 그 잘못을 뉘우칠 것입니다.

그러다가 왜적들의 세력이 창궐하는데 이르러 사람 사는 가옥이 불에 타 남은 재가 되고(宅舍灰燼) 처자가 더렵혀지고 욕을 본(妻子汚辱) 연후에야 의사(義士)들이 여러 곳에서 떨쳐 일어나 왜적의 목을 베고 사로잡아 사람의 마음을 약간은 든든하게 한다(差强人意)고 말하더라도 너무나 늦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여러 점잖은 이들(僉君子)은 이와 같이 마음에 느낀 바를 징계하고(感創若時) 정성을 다 바쳐 교화하고 유도해서(化誘輸情) 앞 다투어 진작시킨다면 공교롭게도 좋지 않은 때를 당하더라도(不先不後) 기약대로 달려올 것입니다.

저희들은 평소 활 쏘고 말 타는 재주가 모자라서 병서(兵書, 鞱鈴)의 계책은 알지 못하지만 몽둥이를 들고서 초나라를 매질하는 계책(制挺撻楚之計)은 한마디 말로 이르자면 탁 트였습니다.

구구(區區)하게 주창하는 자는 한편으로는 의사(義士)의 뜻을 격려하고 한편으로는 용기 있는 사내(勇夫)의 기개를 분발시키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人心所同然者)은 자취가 아주 없어진 적이 없었으니 반드시 흥기할 것입니다.

격서가 도달한 날은 바로 뜻있는 사람과 함께 온 고을에서 잘 알아듣도록 타이르고(曉諭) 문서 끝에 군인으로 이름을 올리고 이달 스무 날 보성 관문으로 찾아와서 모이도록 하십시오.

일의 기회를 한 번 잃으면 후회가 막급하니 임금이 욕을 당하고 죽는다면(主辱不救) 어떻게 사람이 되겠습니까.

다들 시작과 끝을 생각하고 창의하는 첨군자(僉君子)들은 이를 도모해야 합니다.
                  /만력 20년 임진(1592년) 7월 20일 

●金汝重(명종11년1556~인조8년1630) 향년 75

조선 중기 의병장이자 공신. 字는 자임(子任)이고, 號는 헌헌헌(軒軒軒)이다. 본관은 靈光이며 전라도 장흥부 남면방 금화(全羅道 長興府 南面坊 金華) 392번지에서 살았다. 고사(庫舍) 터 유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증조부는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월봉(月峯) 김광원(金光遠), 조부는 형조좌랑(刑曹佐郞) 김귀수(金龜壽)이다. 생부는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 김척(金惕)이고 양부는 부사과(副司果) 김열(金悅)이다. 

配는 貞敬夫人 竹山安氏 縣監 安彦龍의 딸이다. 젊어서는 領議政에 오른 思庵 朴淳에게 수업했다.

36세 때(선조24년1591) 辛卯 式年試 [進士] 1等 2位(2/100)했다.

우수한 성적이었으나 관직(官職)에 나아가지 않고 공부에 전념하며 특히 병서(兵書) 탐독에 집중하자 사람들이 비웃었으나 괘념치 않았다.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아우 김여강(金汝剛)ㆍ종제 김의룡(金懿龍)과 함께 의병(義兵)과 의곡(義穀)을 모아 의병장 임계영(任啓英)에게 보냈고 박광전(朴光前)ㆍ김익복(金益福)ㆍ이잠(李潛) 등과 함께 왜적과 맞서 싸워 크게 공을 세웠다. 이 일을 임계영이 조정에 보고하여 참봉(參奉)에 올랐다. 같은 해 9월 변사정(邊士貞)이 의병을 일으키자 다시 병사 300명을 모집하고 군량 80석을 모아 전력을 보강하고 이어 변사정을 따라 창원 방면의 적을 추격하였다. 이 때 아우 김여강(金汝剛)은 전사하였고 이를 본 공이 분함을 참지 못하고 돌진하여 적의 원수를 벨 때에 왜군이 밀려오므로 아우의 시체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다시 단신으로 적 수십 급을 베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공을 변사정이 계문을 올려 이조참판이 되었다.

또 의주(義州)로 피신한 선조(宣祖)에게 3백석의 의곡을 서해안 뱃길로 전라도 영광고을에 사는 의곡 도유사 광주 이씨(廣州李氏) 학매(鶴梅) 이굉중(李宏中)을 통해 임금과 신하가 굶주리고 있는 행재소로 보내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제수(除授)되었다.

1597년 실제로 또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이때에도 공을 세워 여러 차례 직첩(職帖)이 내려졌다. ⟦軒軒軒先生文集⟧이 전한다.

역자 注)

예로부터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참으로 대장부가 아니라고 하였는데 해동의 용산 금곡마을 헌헌장부의 격문을 읽고 병장기를 손에 들지 않을 자 그 누가 있었으랴.

王室을 復興하려는 衷心은 言語가 激切하여 다 형용할 수가 없다.

◆議政府左贊成 軒軒軒 金汝重 詩文

▶雨後感吟 비 그친 뒤 느낌을 읊다.

草靑霜變露 푸른 풀 서리이슬로 변하고

花發雨多風 꽃 만발하자 비바람만 많구나.

萬事皆如此 모든 일이 다 이와 같으니

吾將問化工 나는 하늘의 조화 물으려고 한다.

▶朴備邊郞 公信 挽 박 비변랑 공신을 애도하다.

午丙年閒先後生 오병년 사이에 앞뒤로 태어나

吹蔥騎竹共隨行 보리피리 불고 대 작대기 끌며 어울려 놀았네.

十年同榻情膠漆 십년을 함께 공부한 돈독한 우정은

六紀居隣義弟兄 의형제 맺고 육십년을 이웃하며 살았네.

簡黙言辭人有服 간결한 문장과 언사는 사람들이 감복하고

深沈器量世無輕 중후한 기량은 세상에 경중이 없었네.

吁嗟故舊皆磨滅 아, 오랜 친구 모두가 파묻히니

白首猶存哭粉旌 백수만 외려 남아 붉은 명정에 곡하네.

출전<軒軒軒先生文集>

注)

午丙年閒先後生 - 헌헌헌 김여중(1556~1630)은 丙辰年 생이고 박공신(1562~1629)은 壬戌年 생으로 午丙이 아니라 壬丙으로 해야 맞다. 語勢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닌 가 추측한다. 그렇지 않으면 壬자를 午자로 잘못 전사했을 수도 있다.

칠언율시 仄起式으로 丙ㆍ漆ㆍ服ㆍ滅 字가 仄聲字이다. 종성이 ㄱㆍㅂㆍㄹ 발음은 측성이다. 측성은 상성ㆍ입성ㆍ거성을 말한다. 측기식은 감정을 격발시키는데 강점이 있다.

▲헌헌 헌공 김여중 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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