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정/한학자
▲김규정/한학자

往在庚辰春 余以童子 拜伯父樂全公於白雲莊 師方受書於伯父 時年纔弱冠 疏眉目 善談論 襟韻不凡 與堂兄春沼公 揚扢古今事 娓娓可聽 余雖幼 心固已奇之 後五年 伯父捐館舍 師亦雲遊四方 不相見殆三十年 庚戌夏 余銜命南下 遇師於廣陵天柱寺 越二年 余按湖南臬 師自頭流來見 留宿一宵 庬眉雪髭 儼然作老宿 而余亦兩鬢蒼然 已非少年人 握手歔欷 相與含涕 未幾 余解歸 與師別 又十年辛酉秋 其徒懷善來告 師示寂 且記師平生始卒 仍致淸城金相國之言曰 師旣受知於外王父樂全公 公亦契許不淺 銘其藏 不可屬他人 余心諾而未及文焉 今年秋 懷善復以狀來謁曰 吾師固公家門下僧 知吾師宜莫如公 況淸城公已作千古 其所托 公忍負之耶 余聞而悲之 按其狀 師俗姓全 法名處能 字愼守 白谷 其號也 母金夢梵僧遺二顆珠 令呑之 覺而有娠 以萬曆丁巳五月初三日生 法骨奇秀 在提孩 喜作佛事 或遇僧尼 輒軒渠欲從之 十二 投義賢師 祝髮 十六 謁樂全公於雲莊 朝夕左右 閱四寒暑不怠 公憐其誠 授以經史語孟及韓蘇李杜等書 師遂日夜誦讀 咀嚼英華 爲詩淸新古健 文亦疏宕可觀 自是大有聲於薦紳間 東溟鄭公斗卿 尤歎異之 以爲奇才 一日忽喟然歎曰 手自翦髮 而徒遊藝於翰墨間 豈不負初心乎 往參碧岩覺性師於頭流之雙溪 得聞眞乘法旨 言下大悟 性師期以傳法上足 遂與周遊 棲息於伽倻寶蓋雪峯諸山 幾二十餘歲 孝宗在潛邸時 答性師書曰 見高弟書 文甚奇字且疏勁可愛 其蒙被睿奬 又如此 己丑 仁廟賓天 性師爲設道場薦福 命師製疏 壬辰 入俗離大法住寺 重修丈六金身 丁酉 住錫於大芚山之安心寺 開堂講法 學徒坌集 丙午 授南漢僧統 不赴 庚戌 再授 亦未久辭去 往來於峨嵋, 聖住之間 庚申春 移住金山寺 作大法會五晝夜 六月二十日 示微恙 秋七月初一日 遂就化 世壽六十有四 禪臘四十有九 其夕白氣十二道 橫亘半空 衆皆嗟異之 闍維得靈骨三片 分藏於母岳之金山, 大芚之安心, 鷄龍之神定 師以聰穎夙悟之資 早受名師之戒 居然作法門世適 雖通脫 自在不以繩墨爲拘 時或酣暢高詠 遺棄四大 而靈慧洞透之性 自有操持 至歿而有超骨之異 其得於三藏祕奧 有非皮相者所可測 文集二卷 刊行於世 淸城東溟作序弁其卷 此亦足以不朽 師旣化之身耶 噫 自余識師以來 幼而壯 壯而衰 俯仰朝暮之間 人事嬗變 感念疇昔 依然若一夢 而白雲之莊 亦成丘墟 吾於銘師之葬 顧安得不悲哉 遂爲之銘曰 遺外迹 托詩鳴 悅靈皎休默之名者耶 慕賢德 遺外跡 托詩鳴 說靈皎休默之名者耶 慕賢德 始有終 追惠勤祕演之風者耶 生稟奇 死著異 庶可鑱石而無媿

출전 <汾厓遺稿> 卷十

注)

靈皎休默 - 靈은 영관, 皎는 교연, 休는 휴정, 黙은 진묵이라고 추정했다.

惠勤 - 구양수가 혜근(惠勤)과 돈독하게 교유했음은 소동파가 지은 서(序)에 상세하게 나온다.

祕演 - 宋나라 詩僧으로 蘇舜欽ㆍ尹洙ㆍ歐陽脩 등과 교유하였다. 石延年과 詩友가 되어 격식을 차리지 않고 술과 노래를 즐겼다고 한다.

慕賢德 始有終 追惠勤祕演之風者耶 - 구양수歐陽脩가 세상을 떠나자 혜근惠勤이 눈물을 흘렸고, 만경曼卿이 죽자 비연秘演 또한 늙어 버렸다.

◆백곡 처능 선사 비명 서문을 아울러 쓴다.

-분애 신정(인조6년1628~숙종13년1687)

지난날 경진년(인조18년1640) 봄에 나는 동자(童子, 소년)로서 백부 낙전공(伯父樂全公)을 백운장(白雲莊)으로 찾아뵙고 인사드릴 때 선사(禪師)는 백부에게서 이제 막 글을 배우고 있었다. 

당시 나이는 겨우 약관(弱冠)에 또렷한 얼굴(疏眉目)로 담론을 좋아하고 흉금속의 운치가 범상하지 않았다. 

당형(堂兄, 사촌형) 춘소공(春沼公, 申最1619~1658)과 함께 고금의 일에 대해 토론하고 품평하며 주고받을 때면 흥미진진해서 들을 만했다.

나는 어린아이였지만  마음은 진실로 이미 기특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오년 뒤에 백부가 관사를 버리시자(捐館舍, 세상을 떠나시자) 선사도 사방각지를 구름처럼 유랑하니 서로 만나보지 못한지가 거의 삼십년이 흘렀다.

경술년(현종11년1670) 여름에 나는 왕명을 받들고(銜命) 남쪽으로 내려와 있으면서 광릉 천주사에서 선사를 만났고 두해를 넘겨 내가 전라도 관찰사로 나가자(현종13년1672) 선사가 두류산(頭流山)에서 찾아와서 만나 뵙고 하룻밤을 함께 유숙(留宿一宵)했었다.

희끗희끗한 눈썹에 하얀 수염은 엄연한 노승(老僧)이 되어 있었고 나도 귀밑머리가 검푸르러서 이미 젊은 사람이 아니었다.

손 맞잡고 한숨 쉬며 탄식하다 서로 함께 눈물을 머금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선사와 작별하고 돌아왔다.

다시 십년이 흐른 신유년(숙종7년1681) 가을날 그의 문도 회선(懷善)이 찾아와서 고하기를, “선사께서 시적(示寂)하셨습니다. 우선 선사의 생평 처음과 끝을 기록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자주 청성 김 상국 석주(淸城金相國錫冑1634~1684)는 말씀하시기를, “선사가 외왕부(外王父, 외조부) 낙전공(樂全公)에게 수업한 일은 이미 알고 있다.”고 하면서 공도 허여하신 정분이 얕지 않으니 숨은 덕행을 기록하는 일은 타인에게 맡길 수는 없다고 하였다.

글은 아직 행장을 쓰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승낙을 하고 있었다. 

금년 가을에 회선 납자(懷善衲子)가 다시 행장을 가지고 찾아와 뵈며 말하기를, “나의 스승은 진실로 공 집안(公家)의 문하 승입니다. 우리 스승을 아는 것이 마땅히 공과 같지는 않습니다만 하물며 청성공(淸城公)은 이미 천고의 객이 되어 버렸으니 그에게 의탁하는 것을 공은 차마 저버리기야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서 슬프게 여겨 그 행장을 살펴보니 선사의 속성(俗姓)은 전씨(全氏)이고 법명은 처능(處能)이며 자는 신수(愼守)이고 백곡(白谷)은 그의 호이다.

어머니 김씨 꿈속에서 범승(梵僧, 불법을 잘 지켜 행덕이 단정하고 깨끗한 승려)이 영롱한 구슬 두 개를 주며 삼키라고 했다. 깨어나니 임신이 되어 만력 정사년(광해9년1617) 오월 초사흗날(5월 3일) 태어났다.

법골(法骨)은 유달리 수려하고 두세 살 어린아이 때는 불사 짓기를 즐겨했으니 간혹 승니(僧尼, 비구와 비구니)를 만나면 번번이 기뻐하며(輒軒渠) 따라가고자 하였다.

열두 살 때 의현 대사에게 기탁하여 머리를 깎고 열여섯 살 때 백운장으로 낙전공을 찾아뵙고 좌우에서 아침저녁으로 모시면서 사년이 흘러도 게을리 하지 않자 공은 그 정성을 어여삐 여겨 경사제자와 논어 맹자 그리고 한유와 소동파 이백과 두보 등의 글을 가르치자 선사는 마침내 밤낮으로 소리 내어 읽으며

좋은 문장은 곱씹어서 시를 지으면 청신하고 예스럽고 굳센 맛이 가득하였다.

문사(文詞)도 탁 트이고 거칠어서(疏宕, 소탕) 볼만했으니 이때로부터 벼슬아치들 사이에서 크게 명성이 나자 동명 정공 두경(東溟鄭公斗卿,1597~1673)은 더욱 찬탄하고 기이하게 여기며 매우 뛰어난 재주라고 말하였다.

하루는 갑자기 크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손수 머리를 자르고부터 승도(僧徒)가 글 짓는 사이에서 육예를 배웠으니 어떻게 초발심을 등질 수 있겠는가.”하고는 두류산 쌍계사로 가서 벽암 각성대사(碧岩覺性大師,1575~1660)를 참례하고 진승(眞乘, 진실한 교법)의 법지(法旨, 법의 뜻)를 듣고서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크게 깨달았다. 

각성대사가 불법을 전하는 상족제자로 정하자 드디어 가야산ㆍ보개산ㆍ설봉산 등 여러 산을 두루 유람하며 깃들어 살기를 거의 이십여 년이었다.

효종이 잠저(潛邸) 시절 때 각성대사의 글에 답하며 말씀하기를, “고제의 글씨를 보니 문자가 심한 기자의 법奇字之法으로 쓴 고문(奇字古文)인데다가 성글지만 굳세어서(疏勁) 아낄 만하다.”고 했다

선사가 임금의 칭찬을 받은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기축년(인조27년1649) 인조가 빈천(賓天, 天子의 죽음)하자 각성대사가 임금을 위하여 천복도량(薦福道場)을 베풀며 선사에게 명하여 천복소를 짓게(製薦福疏) 하였다.

임진년(효종3년1652) 속리산 대법주사로 들어가 육척 부처의 몸(丈六金身)을 중수하고 정유년(효종8년1657) 해남 대둔산 안심사에 주석하며 법회를 처음 열고 법을 강설하자 학도들이 줄지어 모여들었다.

병오년(현종7년1666) 남한산성 승통을 제수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경술년(현종11년1670) 남한산성 승통을 재차 제수했음에도 오래지 않아 사양하고 떠나가서 아미산과 성주산 사이를 왕래했다.

경신년(숙종6년1680) 봄에는 모악산 금산사로 이주하여 다섯 밤낮의 대법회를 일으키고 나서 유월 스무날 가벼운 병세를 보이시더니 가을 칠월 초하룻날(7월 1일) 마침내 취화(就化, 大化에 나아가다. 입적)했으니 세수는 예순 넷이고 선랍(禪臘)은 마흔 아홉 이었다. 

그날 저녁 흰 기운이 열두 갈래로 가로로 뻗치자 대중들이 모두 탄식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다비하자 영골 세 조각을 얻어 모악산의 금산사ㆍ대둔산의 안심사ㆍ계룡산의 신정사에 나누어 간직하게 하였다.

선사는 총명하고 영특하며 어릴 때부터 똑똑한 자질을 타고나 일찍부터 유명한 스승의 훈계를 받아 확실하게 불가의 학문을 이을 적통(法門世適)이 되었고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고 편안한(通脫自在) 면모를 보여 주었지만 법도(繩墨, 승묵)에 구애받지도 않았고 때로는 더러 술에 취해 기분 좋으면 목청껏 소리 내어 시를 읊었다(酣暢高詠).

사대(四大, 모든 色法을 이루고 있는 기본적인 네 가지 原質, 즉 地水火風)를 내다 버린 신령한 지혜와 통투한(靈慧洞透) 성품은 스스로 심신을 잘 관리하고 경영하여 죽음에 이르러서도 기이한 사리(超骨)가 나왔는데 비밀스럽고 오묘해서 세 곳에 간직했으니 나 같은 후생이 엿보아 알 바가 아니다. 

문집 두 권을 세상에 간행하면서 청성(淸城)과 동명(東溟) 두 공이 그 문집 서문을 지었으니 이것도 영원히 전해질 것인데 선사는 이미 부처님께서 교화하신 몸이 아닌가.

아, 내가 선사를 알고 지낸 이래로 어린 아이에서 청장년이 되고 청장년에서 늙을 때까지 온종일 굽어보고 우러러봐도 세상일은 갑자기 변해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 전과 다름없이 한바탕 꿈만 같았다.

백운장도 이미 폐허가 됐거니와 내가 선사의 장사(葬事)에 갈명을 지으며 뒤돌아보면 어찌 비통하지 않겠는가. 

마침내 선사를 위해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遺外迹托詩鳴悅靈皎休默之名者耶

방외의 발자취(方外跡) 남기며 시로 울렸으니 영관ㆍ교연ㆍ휴정ㆍ진묵(靈皎休默)의 명성을 기뻐한 자인가. 

慕賢德遺外跡托詩鳴說靈皎休默之名者耶

현덕(賢德, 어질고 덕스러운 행실)을 그리워하다 방외의 발자취(方外跡) 남기며 시로 울렸으니 영관ㆍ교연ㆍ휴정ㆍ진묵의 명성을 달랜 자인가.

慕賢德始有終追惠勤祕演之風者耶

현덕(賢德)을 그리워했으니 유시유종(有始有終)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혜근과 비연(惠勤祕演)의 풍도를 이룬 자인가.

生稟奇死著異庶可鑱石而無媿

타고난 자품이 기이하더니만 죽어서도 이적을 드러내서 거의 비석에 새길만하니 부끄럽지가 않구나.

■申晸(인조6년1628~숙종13년1687)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동(伯東), 호는 분애(汾厓). 할아버지는 영의정 신흠(申欽)이고 아버지는 참판 신익전(申翊全)이니 가학으로 학문을 닦았다.

37세 때 현종(顯宗) 5년(1664) 갑진(甲辰) 춘당대시(春塘臺試) 을과(乙科) 1[亞元]위(02/08)다.

예조판서, 한성부 판윤, 강화부 유수 등을 지냈고 바른 정사로 일세의 추중(推重)을 받은 이름난 재상이었고 시문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지리산 쌍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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