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지역신문을 통하여 ‘회령포 문화축제’를 ‘장흥 회령포 이순신 축제’로 명칭을 바꾸어 오는 9월1일부터 3일간 회진면 회령진성 및 회진항 일원에서 개최하기로 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장흥군의 계획에 의하면, 명량대첩 승리의 전초지인 회령포의 역사적 가치를 이순신 장군과의 연관성을 축제를 통하여 재조명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장흥군의 역사와 문화를 나름대로 연구하고 있는 필자로서 이 기사문을 읽고 ‘기왕에 우리 장흥의 역사적 가치를 선양코자 한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 지금이라도 군 관계자와 축제위원회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뜻에서 이 펜을 들었다.

왜 축제의 명칭이 “회령포 이순신 축제”일까? ‘회령포 이순신 축제’보다는 “회령포 의병 축제”라 하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8월3일 곤양(昆陽:현 경남 사천군 곤양면)에서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의 유서(諭書:국왕이 군사권을 가진 관원에게 내렸던 명령서)를 받고 숙배(肅拜:임지로 가는 관원이 임금에게 작별을 아뢰는 일)를 한 후. 곧바로 길을 나서 전라도로 향했다. 8월17일 장흥의 군영구미(軍營仇未:현 안양면 해창)에서 하루를 묵고, 8월18일 회령진(會寧津 : 현 회진)에 도착하여, 8월19일 여러 장수들에게 교서(敎書:국왕이 내리는 명령서)에 숙배(肅拜)토록 한 후.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임하게 된다. 8월20일 회령진이 좁아 이진(梨津:현 해남군 북평면 이진)으로 부대를 옮겨갔다. 

이와 같이 이순신 장군은 장흥에서 3일 밖에 머물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듯 이순신 장군 혼자 싸워 왜군을 이긴 것이 아니다. 이순신 장군이 회령진에서 여러 장수들에게 숙배토록 하였음에서 보았듯 회령진으로 이순신 장군을 돕기 위해 모여든 이름없는 수많은 의병들이 있었기 명량해전이 성공한 것이다.

현재 진해에서는 ‘진해 군항제’라 하여 올해로 61회째를, 해남과 진도에서는 ‘명량대첩축제’라 하여 29회째 이순신 장군만을 팔아 축제를 계획하고 있다.

오늘날은 민중의 시대이다. 명량에서 다도해상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이름도 후손도 남기지 못하고 산화한 민초들, 그분들의 영혼을 달래고 추모할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임진왜란 때 전투에서 공을 세우거나 군수품 보급에 기여한 공신증서인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을 보면, 9,060명이 공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중 2/3가 양반이 아닌 상민(常民:양반이 아닌 보통 백성)과 노비(奴婢)들이다. 당시 관리나 양반들은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하여 그 후손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며 사당을 세우고 오늘 날까지 해마다 추모를 한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이름없는 의병들은 지금까지도 추앙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우리 장흥 회진에다 그분들의 뜻을 기리고 추모할 수 있는 공간과 백비(白碑)를 세우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백의종군비(白衣從軍碑)”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제 이순신 장군만을 기리지 말고, 의롭게 목숨을 바친 민초들을 위한 백비를 회진에 세워 추모하고, 행사하는 것이 더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축제행사가 아니라도 우리 장흥과 회진을 찾는 관광객들이 백비를 찾아 추모하며, 차 한 잔, 꽃 한송이를 올릴 수 있는 곳이 된다면, 관광의 의미도 살리고, ‘의향장흥’의 이미지도 살리면서, 지역경제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옛 어른들이 선조의 제삿날이나 명절을 지내고, 문전상이나 대문간에 밥 한 그릇을 놓는 따뜻한 마음을∼, 그것이 자손없는 영혼들을 위한 배려였음을 ∼,

이제 남이 하는 행사. 타 시군이 하는 행사 따라하지 말고, 장흥, 장흥인만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담아 세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면 그 축제 또한 성공률을 높일 것이다. 

부디 장흥군에서 먼저 의롭게 목숨을 받친 민초 분들을 헤아려 보자. 민초분들 또한 그에 대한 충분한 보답을 할 것이다.

(朝天)2023.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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