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은 남아 있는 면적이다.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예스러운 지역이다.

텅 빈 느낌을 주는 한가한 곳이다. 넓고도 한적한곳, 침입자도 없지만 쓸모가 별로 없다. 그러면서 여백은 무엇인가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는 표정을 지니고 있다.

노년은 인생의 여백이다.

손도 마음도 비었다. 비어야 떠나기가 쉽다, 가벼워야 날기가 좋다.

몸은 땅에 있지만 마음은 어디론가 날아가고픈 충동이 인다. 그리하여 인생의 종점을 눈 앞에 두고도 초조하지 않다. 속에는 아직 덜 꺼진 불씨가 있을지 모르지만 겉으론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살이 빠지고 기력이 딸리고 다리가 휘청거리지만 표정만은 언제나 밝은 빛을 고집한다. 어느날 후루룩 자기 자리를 떠난다 해도 그러한 미련 따위는 세월속에서 이미 하나 둘 씩 놓아 버렸다.

인생의 가을은 언제나 모순적으로 정의되어 왔다. 모두가 배려되고 존중하는 가운데 스러져가는 감미로움과 소박한 삶, 호젖한 방랑속에서 쇠락 해가는 슬픔이 있다

인생의 여백! 하지만 그곳에는 또 우수의 가슴을 다독여주는 동행의 만남도 조우한다. 애써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은 방랑자들의 허허한 낭만이다.

나의 기억으로 2016년 한국일보 1면 헤드라인에 오른 ‘쓰죽회’라는 이색적인 제목이 눈길을 끈 적이 떠오른다.

내용인즉 경상도 안동지방의 6,7,8십대의 명사 13인으로 조직된 친목회 모임 명칭을 언론이 대서특필한 것이다.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법조인, 의사, 학자, 기업인 등으로 구성된 모임으로 가진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말고 생전에 죄다 써버리고 죽자는 것에 모두가 의기투합한 용어를 축약하여 ‘쓰죽회’로 작명한 이들의 재치에 일면 호감이 간다.

회 운영 방식 또한 파격적이다. 까탈스런 회칙이나 회계장부 등도 부질없다며 일체 생략 하였다. 그저 격의 없이 내가 먼저 밥 사겠다며 막내 총무더러 회원 소집을 닦달하는 호탕한 장형들의 베품과 나눔의 경쟁 구도이다. 일상의 단순한 면 면 속에서 장난기를 발견 하는데 도통한 사람들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오늘날 노년의 사회적 단절은 사회적 존재로서 연결이 취약하고 부담이 되거나 위험한 존재로 정의되고 배제되는 현상이다.

노년의 원숙한 경험이 구닥다리로 차별화 되는 것은 사회가 기능 중심으로 작동 하는데 느림보, 꼰대 딱지의 노년이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기 때문이다.

쓰죽회는 그런 사회의 눈총을 의식하고, 보란 듯이 뜻을 같이하는 노인들끼리 규합하여 협업을 통해 소소한 즐거움, 슬픔, 정의로움 등의 프로젝트를 공유 하자는 취지의 은밀한 충의를 서로 존중했다.

주제는 다양하다. 세계명소 탐방, 국내유람, 소문난 맛집 습격 등을 즐기면서 가벼운 휘파람속에 속닥거리며 노년의 여백을 건강과 낭만의 공연장으로 만끽하는 노회한 오지랖들의 재치가 충연해 보인다.

미국의 미래학자 멜란다 나이비스는 6년동안 현대인의 욕망에 대한 연구를 진행 했다. 그리고 현대인이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내면 깊은 곳의 혼란을 제대로 극복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인류의 원시적인 욕망이 과거의 의식주, 권력, 성애의 패턴에서 내면의 조화로운 상태 추구도 옮겨 갔다는 것이다.

바쁜 현대인들은 채소와 과일을 몇 그램 먹었는지 비타민 함유량이 얼마인지, 콜레스테롤 수치가 어쩌고, 하루에 몇 킬로미터를 뛰었는지 등 손쉽게 측정할 수 있는 건강법을 선호한다.

하지만, 과학은 덜 걱정하고 가족, 또는 친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이웃에 더 친절하고, 더 많이 웃는 일처럼 측정되지 않는 것들의 효과에 주목 하라고 말한다. 튼튼한 사회적 관계와 공감능력, 삶의 의미를 통해 더욱 건강한 삶에 이르게 한다.

질병과 우울, 고독으로부터 자유로운 노년을 가능케 하는 방법들은 평소 우리가 장수의 황금률이라 믿고 했던 규칙적인 운동, 절제된 식습관 등이 장수의 유전자와는 거리가 멀다고 한다.

유기농 구기자를 먹고 팔굽혀 펴기를 공치듯 해도 장수와는 별개라는 분석이다.

노인홍수, 100세인생, 할일 없는 방랑자들의 인생 여백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나? 그 솔루션은 경쟁과 성취가 아니라 휴식과 낭만에 있다.

그림자 벗을 삼아 걷는 길은 서산에 해가 지면 멈추지만 마음의 님을 따라 가고 있는 나의 길은 꿈으로 이어진 영원한길, 방랑자여 키타를 울려라, 방랑자여 노래를 불러라.

오늘은 비록 눈물어린 혼자의 길이지만 먼 훗날에 우린 다시 만나리라.

외로우면 아프다, 사랑 할수록 건강하다.

또 한 해의 반 세월 6월이 저문다.

불현듯 청춘을 회억하는 노년의 서정적인 독백 몇 줄이 예술이다.

뭐 기억나는 일이 없는가?/6월의 살구나무 밑에서 단발머리 애인을 기다리며/양산을 거꾸로 걸어놓고 나무를 흔들면/웃음처럼 토드득 살구가 쏟아져 내렸지’아! 살구처럼 익어가던 날이었다. 생각하면/그리움이 입 안에 가득 고인다.  끝.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