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정/한학자
▲ 김규정/한학자

月波平生行跡(二)

於戯 平生所願 於斯畢矣 作客他鄕 日已久矣 豈無懷土之念乎 於是即促回程 還歸本道 則北方學者 聞風而聚集 故不獲已於是建幢立宗 敎化緇徒 於三十餘年之中 受請於香山之於佛智內院 藥山之於守國 陽和之於圓寂華藏 松林之於內院 松岳之於盤龍 龍門之於內院淸淨鶴樹等諸庵 而或經一二年 或經三四五年 而安居之中 無諸障難 而會下之人 漸漸煩多 聚會之盛 則人稱北方之巨會 而瞻仰者衆矣 至於當此末運之時 則年過六旬 老病相侵 無復講經之精力 故罷講已久 杜絕去來之程 而學者亦聞風 過門不入 則乾之上九 亢龍有悔 於斯可驗矣 余之行跡 大而論之 則朝遊楓岳 暮徃智異 春居妙香 秋歸九月 而無可㝎處 故人謂之天地間逍遙焉一介閑道人也 惜乎 余初中之分 門人雖多 至於末分之時 則門運不幸 年少之軰 或非死則誤 而存者亦小 此所謂植種多而收稔小也 然此亦分也 恨之奈何 且西域中夏之中 自古宗師王化 而無後者頗多 而至於吾東方論之 則南岳大師 雪岩之高弟 洛岩禪師 霜峰之上首 二大師皆禪敎兼通 獨步一國 而無繼後王化者 彼之上德 尙有如此 況如我之軰 復何言㦲 又顧念上古宗師 則宗說兼通 德行具圓 故闍維之日 或自出舍利 或禱呪得功 而建塔立碑 則緇素信仰 而古今追尊 此則可矣 至於末世 人心詐詐 正直者少 曲謟者多 而宗師之行 亦不如古 則雖自出舍利 或祈禱得功 而依古建塔立碑 則緇素俱不信仰而追尊 則不如不爲之爲便也 至於如我之軰 全無德行 而又無佛法深信之念 則雖使行高法師 雖百日祈禱 何有得功之理乎 況數小門人 有何信心 有何物力 經營祈禱之事乎 是以我今預以將來之事喏叮寧 我死之後 但精心闍維 而無出妄計 若不遵此言 而强爲非分之事 則非吾弟子也 千萬愼之 余只待登火之月 以平生翻經之功力 上昇兜率天中白玉樓上 共彌勒而逍遙 內院宮中 與諸佛而遊戯 同從慈氏佛 降生于龍華之法會 重聽法界之眞經 而與諸同緣 再續香火之緣 是吾之願也 此外無復可言 只此而已

출전 <月波集>

아, 평생소원은 이것으로 마쳤구나! 타향의 객이 된지가 날이 너무 오래 되었구나! 어찌 고향을 그리워하는 생각이 없었겠는가. 

이때 곧바로 귀로(回程)를 재촉해 본도(本道)로 다시 돌아오자 북방 학자들이 뜬소문을 주워듣고 모여들었으므로 부득이하게 이에 불법의 깃발을 세우고(建幢) 주제의 근거를 확립(立宗)하면서 승도들을 교화했다.

삼십여 년 가운데 묘향산(妙香山)의 불지(佛智)와 내원(內院), 약산(藥山)의 수국(守國), 양화(陽和)의 원적(圓寂)과 화장(華藏), 송림(松林)의 내원(內院), 송악(松岳)의 반룡(盤龍), 용문(龍門)의 내원(內院)과 청정(淸淨)과 학수(鶴樹) 등 모든 사암(寺庵)의 요청을 받고서 혹은 일이년을 지내고 혹은 삼사오년씩을 보내며 안거(安居)하는 가운데도 장애와 난관이 없었으며 법회에 모이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 번거로워지면서 회합이 성대해지자 사람들이 “북방(北方)의 큰 회합(巨會)”이라고 불렀고 우러러보는 자들도 많았다.

때마침 이런 말운(末運)의 시대에 이르러 나이가 예순(六旬)을 넘고 늙음과 병이 침노하니 다시는 강경(講經)할 정력이 없으므로 강의를 이미 오래전에 그만 두고 오고 가는 노정(路程)도 두절되었는데 학자들도 이런 뜬소문을 듣고는 문 앞을 지나가면서도 들어오지 않았으니 주역 건괘(乾卦) 상구 효(上九爻)의 “끝까지 올라간 용이니 뉘우침이 있으리라(亢龍有悔).”라는 말이 여기에서도 징험될 만 했다.

나의 행적을 대략 말하면 아침은 풍악산(楓岳山)을 유람하고 저녁에는 지리산(智異山)으로 갔으며 봄에는 묘향산(妙香山)에서 살고 가을에는 구월산(九月山)으로 돌아오니 일정하게 사는 곳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천지 사이를 소요(逍遙)하는 일개 한가한 도인(道人)이라고 불렀다.

애석하구나! 나는 초년과 중년에는 문인(門人)이 많았지만 말년 시절에 이르러서는 문운(門運)이 불행하여 연소(年少)한 무리들이 혹 죽지 않으면 잘못되어 남아 있는 자 또한 적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씨앗은 많이 심었는데 수확은 적다고 하는 격이다. 그러나 이것도 분수이니 한탄한들 어찌하겠는가.

가령 서역(西域)과 중국(中夏)에서는 예로부터 종사(宗師)가 임금의 덕화(王化)를 도우면서 후사(後嗣)가 없는 경우가 꽤나 많았다. 

우리 동방에 이르러 진술하면 남악 태우 대사(南岳泰宇大師, ? ~1732)는 설암 추붕(雪岩秋鵬,1651~1706)의 고족제자(高弟)이고 낙암 의눌 선사(洛岩義訥禪師,1666~1737)는 용문사(龍門寺) 상봉 정원(霜峰淨源,1627~1709)의 상수제자(上首弟子)로 두 대사 모두가 선과 교(禪敎)를 모두 달통하여 온 나라(一國) 안에서는 독보적(獨步的)이었는데도 그 임금의 덕화(王化)를 뒤에 계승하는 자가 없었다. 

저 상덕(上德)들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나 같은 무리야 다시 말해 무엇 하겠는가.

또 돌이켜 생각해보면 상고(上古)시대의 종사(宗師)는 종지와 설법(宗說)에 통달하여 덕행(德行)이 함께 원만하였으므로 다비(茶毘)하는 날에 혹 사리(舍利)가 절로 나오기도 하고 혹 기도를 올려 공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탑을 세우고 비를 세우면 승속(緇素)이 믿고 우러르며 고금에 걸쳐 추존(追尊)하였으니 이런 경우는 괜찮다고 하겠다.

말세에 이르러서는 사람 마음이 거짓됨을 거짓되게 하여 정직한 자는 드물고 아첨(曲謟)하는 자가 많을 뿐더러 종사(宗師)의 행실도 옛날과 같지 않으니 비록 절로 사리가 나오고 간혹 기도를 올려 공을 이루더라도 옛날 그대로 탑을 세우고 비를 세우면 승속이 함께 신앙하고 추존하지도 않을 것이니 하지 않는 것만 못하는 것을 편리하게 여길 것이다.

나와 같은 무리에 이르면 덕행(德行)이 전혀 없고 게다가 불법(佛法)을 깊이 믿는 생각도 없으니 행실이 높은 법사(法師)라 할지라도 백 일 동안 기도를 올린다 한들 무슨 공을 이룰 수 있는 이치가 있겠는가. 

하물며 여러 작은 문인(門人)이 무슨 신심(信心)이 있고 무슨 물질의 힘(物力)이 있어 기도하는 일을 경영하겠는가.

이 때문에 내가 지금 장래의 일을 거듭 간곡하게 말하니 내가 죽은 뒤에 공들여 다비만 하고 망령된 계책을 내지 말지어다. 

만약 이 말을 따르지 않고 억지로 분수가 아닌 일을 한다면 나의 제자가 아니니 천만 번 삼가 하라.

나는 단지 등화(登火)할 달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평생 불경을 번역(飜經)한 공력(功力)으로 도솔천(兜率天)에 올라가서 백옥루(白玉樓) 위에서 미륵(彌勒)과 함께 소요(逍遙)하고 내원궁(內院宮) 안에서 여러 부처들(諸佛)과 유희하다가 다 같이 자씨 불(慈氏佛)을 따라 용화(龍華)의 법회(法會)에 강생(降生)하여 법계(法界)의 진경(眞經)을 거듭 듣고서 같은 인연을 맺은 모든 이와 향화(香火)의 예를 닦고 인연을 다시 잇는 것이 바로 나의 기원(祈願)이다. 이 밖에는 다시 말할 만한 것이 없으니 다만 이것뿐이다.

▲지리산 천은사
▲지리산 천은사

▶월파태율月波兌律(숙종21년乙亥1695~ ? )

본관은 湖南 全州이고 속성은 김씨. 이름은 金從建. 母는 光化縣 李氏이다. 선조가 여러 대에 걸쳐 연달아 평안도 청천강 이북 嘉平郡 南五里에 살았다.

15세에 출가하여 妙香山 佛智庵 三卞長老를 은사로 삼았다.

幻夢法師의 정성스러운 가르침을 받고서 경을 볼 수 있는 눈이 더 밝아지자 두셋 동지와 영호남 남쪽지방을 유람하다 온 나라의 名顯 碩德인 無竟ㆍ南岳ㆍ虎岩ㆍ影海ㆍ霜月大師 外 여러 大宗師의 法席에 두루 참여해 華嚴ㆍ圓覺ㆍ楞嚴ㆍ般若ㆍ起信ㆍ玄談ㆍ拈頌 等 諸家의 經典을 聽覽하니 그 중에서도 虎岩法師의 功이 가장 지대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명산 寺庵에서 30여년 승도들에게 교화를 펴자 점점 北方의 성대한 모임이 되었다.

예순이 넘어서는 노병에 다시 정력으로 講經할 수 없어 그만두었다.

<月波集>은 보림사 승려 해월도일(海月道一)이 編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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