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禮)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자기의 몸가짐이나 타인과의 관계를 통하여 지켜야 할 법도(法度)여서 원칙적으로 법과 다름 없다고 본다. 예를 바탕으로 하는 윤리가 법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삼강오륜 같은 큰 예를 위반하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라고 취급 받았다. 정형화된 법을 어긴 죄인보다도 더 엄격하게 죄인으로 낙인 찍혔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지배집단이 정하는 “법”이 보편적인 진리인 “예”보다 중시되는 경향을 본다. 법 또한 그 법을 재단하는 권한을 쥔 권력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결국 오늘날 “예” 정도는 어겨도 되고 허술해진 법망을 교묘히 빠져 나가면 된다는 의식이 사람들 사이에 일반화 되고 있다.

특히 민주주의는 법치주의라는 통념이 심화되면서 “예”의 가치에 소홀히 한다.

정치가나 권력을 가진 자,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저지른 부정과 비리에 대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자기가 한 말을 바꾸는 것을 옷 갈아 입듯이 하면서도 누구 하나 얼굴을 붉히지 않는다.

오히려 똥물은 개가 재 묻은 개를 흉보듯 남의 허물을 들춰내 죄를 밝혀 내라고 호소하는 태도야말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국민적 조소와 비난의 대상이다. 또한 고위층 경력의 법조인들이 남에게서 수십억 원의 뇌물을 받고도 그 댓가성이 증명되지 않았다며 확연히 드러난 증거들마저 흐지부지 면죄부를 준다면 국민의 비판 여론의 뭇매를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매일 쏟아지는 정치 뉴스에서 얼버무리고, 왜곡하고, 거짓말 하는 촉수 빠른 정치인들을 수 없이 많이 본다. 그런데 그들의 소소한 관심사에 쉴 새 없이 괴롭힘 당하는데 지치고 피곤하다. 그런데도 이러한 비난조차도 그들에겐 충분히 계산된 ‘인기’ 전략이라면 더욱 속 상한다.

최근 미국 법정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26년 전 성추행 거짓말 사건 판결에서 그에게 60억원을 배상하라는 선고가 내려졌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 허풍쟁이, 거짓말쟁이로 소문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3년 동안 오해를 일으키거나 거짓말 주장을 한 횟수가 무려 16,241회나 된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거짓말이 성립하려면 속이려는 의도가 증명되어야 한다.

하지만 의도란 심리적이고 내면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미국 공업 라디오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실린 ‘거짓말’의 정의를 참조했고, 이를 기준으로 결국 트럼프가 거짓말을 했다고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런 의도가 무엇인지 판단할 수 없다는 해석이다.

반면, ‘뉴욕타임즈’는 트럼프의 거짓 주장이 거짓말 이라고 아주 명료하게 표시하기로 했다. 헤드라인에서도 말이다. 우리나라 언론의 일편단심 정치 편향성은 감싸주고 까발리는데 더 노골적이다.

철학자들은 거짓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한 즉 자신은 개인적으로 믿지 않음에도, 다른 사람이 자신이 한 말을 진실이라고 믿도록 하려는 의도가 필요하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거짓말 신드롬에 빠져있다. 그중 화두가 되고 있는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관련 수사를 받던 중 사망한 고 김문기 성남시 도시 개발공사 차장을 모른다는 것으로 공직 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된 사건과 전당대회 돈 봉투, 또 불거진 지뢰, 비아냥 ‘로또 코인’사건 등이 그 실체다.

이 중 일부는 이미 여러 가지 정황과 독립된 출처가 거짓임을 보여줬음에도 자신들은 떳떳하다며 단 한 번도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거짓말은 마치 풀기 어려운 미적분 수학과도 같다. 결국 거짓말과의 숨바꼭질 게임이라서 그 결과를 예측 할 수 없다.

하지만 워낙 중대하고 사회에 미칠 민감한 사건이므로 국민들은 그 추이와 사법부의 판단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신작 소설인지 논픽션 다큐멘터리 인지 속 시원히 가려내야 한다. 역사는 아마 머지않은 훗날 이 상황의 진실을 반드시 명확하게 밝혀내 심판할 것이다.

신언(信言)은 불미(不美)하며 미언(美言)은 불신(不信)이다. 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화려하게 수식한 말에는 진실성이 없다.

노자는 도덕경의 마지막 장을 신언장(信言章)으로 꾸몄다. 이에 공자께선 온화한 말로 거친 마음을 사라지게 하고, 평정한 마음에 이르게 하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말(言))’의 옥편 속으로 우리를 친절히 안내한다.

약싹 빠른 말은 덕에 혼란을 가져오고 선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말은 심중(心中)에서 나오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의 사람됨을 드러낸다.

장차 배반할 자는 그 말이 부끄럽고, 길한 사람은 말이 적고, 조급한 사람은 말이 많고, 마음속에 의심이 많은 자는 그 말이 가지를 친다.

남을 속이고 모함하는 사람의 말은 그 말이 겉돌고 놀며 중심을 잃고 모호하다. 그러나 진실한 사람의 말은 적고 간단명료하다고 하였다. 필자의 생각 같아선 위 말씀을 국회의사당 회의실 내부 공간에 큰 활자로 게시하면 어떨까 그런 심정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참말이 거짓말의 위협에 농락당하는 병폐만은 반드시 치유되어야 한다. 요즘처럼 인지능력이 발달한 아이들 교육과도 무관하지 않다.

부끄럽게도 그 성전인 대법원마저 정치적 편향과 타협의 구설에 올라 존엄한 상징성이 흔들리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바라 건데, 지금이야말로 깊은 성찰을 통해 법치 본연의 기둥을 똑바로 세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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