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정/한학자
▲ 김규정/한학자

月波兌律 本湖南全州也 父姓金 從建名也 母光化縣李氏也 祖先累代連居關西淸北嘉平郡南五里村也 余則生于歲在康熙三十四年乙亥之冬臘月二十四日辰時也 鴈行二雙 我則末也 長兄先逝 而末兄繼殞 只存仲兄 而年近八十 來日無多 則回首鄕關 徒增悵歎而已 幸㦲 余宿世 少有善種 而年當十五之時 忽發棄俗之念 則父母愛重之極 何有捨子之心乎 父母萬端挽留 而子願堅如鐵石 故父母 終不挽留而許之 於是以香山僧三卞長老 㝎爲恩師 而辭別雙親與叔伯弟兄 而發行登程則父母親族 皆落涙而含悲也 從長老直入于妙香山佛智菴 初學史記 而探知古今之得失與帝王之興亡矣 不幸纔過一年有半 而慘遭春堂之喪 則天地間罔極之狀 何一筆而可記乎 奔喪遠地 哭送永窆之後 還歸山門 終遂初發之願 而落髮被緇 受具於雲峰和尙 而叅預僧數 人所欲 天不可奪者是也 年至弱冠之時 自發看經之志 徧叅于雲峯慧月雲坡幻庵等諸大宗師之法席 而受誨於四敎四集等經 而名聲漸聞之時 適有安心之請 則時在幻菴之法席 而余以才踈 再三苦辭 而其請益堅 法師亦慇懃勸勉 則不得已初入室於安心菴 其時年二十九也 又不幸纔經一歲 慘遭萱堂之喪 則其蒼天罔極之懷 又何言㦲 欲報萬一之德 而慇懃設齋之後 自念父母俱沒 鄕關無滯碍之緣 則何以久滯一隅 終作井中之物乎 於是喜聞幻夢法師 方今建幢立宗 大揚宗風於安陵之圓寂 而負笈投焉 則法師亦慇懃迎接 而少無親踈 宿世有緣 於斯可知 其寺執侍冬夏 而又從法師 靑龍隱寂文殊等諸寺 各經一節安居 而重聞於四集起信般若等經 而特蒙法師諄諄之誨 看經之眼增明於前 則幻夢法師之功 亦粉骨難酬也 於是拜別法師 而又發南遊之志 數三同志者 結意同伴 而兩度徃返於嶺湖兩南之勝境 而遊曆於神興寺之寂照 江川寺之蓮臺 觀音寺之無說 宲相寺之內院 君子寺之靈源 安國寺之西庵 松廣寺之普照 仙岩寺之南菴 海印寺之觀音等諸大蘭若 而徧叅於一國名顯碩德 無竟南岳虎岩影海霜月等諸大宗師之法席 而聽覽於華嚴圓覺楞嚴般若起信玄談拈頌等諸大經典 而蒙彼諸法師敎誨之德澤 而禪風敎月 并扇明於心腹之中 豈不慶快㦲 其中虎岩法師之功 尤極深重 而重山岳而難報 書海墨而難記也

출전 <月波集>

▲해인사 법보전
▲해인사 법보전

◆월파 평생 행적 ❇자서 연보 실록(自序年譜實錄,역자 注)

월파 태율(月波兌律)은 본래 호남 전주 사람(湖南全州人)이다. 아버지의 성은 김씨(金氏)로 이름은 종건(從建)이고 어머니는 광화 현(光化縣) 이씨(李氏)이다.

선조는 여러 대에 걸쳐 연달아 관서 청북 가평군 남 오리 마을(關西淸北嘉平郡南五里村)에서 살았고 나는 지난 강희 34년 을해년(숙종21년1695) 겨울 섣달(12월) 스무 나흗날(24일) 진시(辰時)에 태어났다.

형제(鴈行, 안항)는 4형제(二雙)로 나는 막내인데 장형(長兄)은 먼저 서거했고 끝에 형(末兄)도 잇따라 세상을 떠나 둘째 형(仲兄)만 생존해 있으니 나이는 여든이 가까워 앞으로 모실 날이 많지 않아 고향으로 머리를 돌리면 부질없이 슬픈 탄식만 늘어날 뿐이다.

다행하게도 나는 전생에 조금 선의 종자(善種)가 있어 나이 열다섯 살이 되자 갑자기 세속을 버릴 생각을 내었으니 부모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지극한 마음으로 자식을 버리는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부모가 여러 가지로 만류했으나 자식의 견고한 서원이 철석같았으므로 부모도 끝내 만류하지 않고 허락하였다.

이때에 묘향산 승려 삼변 장로(三卞長老)를 은사로 정하고 어버이와 사촌 간 형제들과 고별하고 출발하여 길을 떠나자 부모 친족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장로를 따라 곧바로 묘향산 불지암(妙香山佛智菴)으로 들어가 처음으로 사기를 배우며 고금의 득실과 제왕의 흥망성쇠를 더듬어 살펴 알아냈다.

불행하게도 겨우 일 년 반이 지나 아버지 상(春堂之喪)이라는 참혹한 일을 만났으니 천지간에 끝이 없는 큰 형상을 어떻게 짧은 한 문장으로 기록할 수 있겠는가.

먼 곳에서 아버지 상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모실 산소로 통곡하며 보내드리고 산문으로 다시 돌아와 초발심의 발원을 마침내 이루려고 머리를 깎고 검정 옷을 걸치고 중이 되었다.

운봉화상(雲峰和尙)에게 구족계를 받고 승려의 범주(僧數)에 참예(叅預)하였으니 사람이 바라는 것을 하늘이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나이가 약관(弱冠)에 이르렀을 때 절로 경(經)을 보고 싶은 뜻이 일어나 운봉(雲峯)ㆍ혜월(慧月)ㆍ운파(雲坡)ㆍ환암(幻庵) 등 여러 대종사(大宗師)의 법석(法席)을 두루 찾아가 뵙고(參訪) 〚사교四敎〛와 〚사집四集〛 등의 경전(經典)을 가르침 받았다.

명성이 점차 알려졌을 때 마침 안심암(安心菴)으로부터 요청이 있었는데 당시는 환암의 법석에서 예물을 바치고 불도를 닦고 배우고(執贄參學) 있었다.

나는 재주가 성글다고 두 번 세 번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그 요청이 더욱 굳세었고 법사도 은근하게 권면하여 부득이하게 처음으로 안심암에 입실했으니 그때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다.

또 불행하게도 겨우 일 년이 지났을 무렵 어머니 상(萱堂之喪)이라는 참혹한 일을 만났으니 천지간에 끝이 없는 큰 회포(懷抱)를 다시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일 만분의 일이라도 은덕에 보답하고자 은근하게 재를 베풀고 난 뒤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부모가 모두 돌아가셔서 고향에는 막히고 걸리는 인연이 없으니 어떻게 한 모퉁이에 오랫동안 빠져 마침내 우물 안의 물건이 되겠는가.”라고 했다.

이때 환몽법사(幻夢法師)가 바야흐로 이제 불법의 깃발을 세우고(建幢) 주제의 근거를 확립(立宗)하면서 안릉의 원적사(安陵之圓寂)에서 종풍(宗風)을 크게 선양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서 책궤를 짊어지고 찾아갔는데(負笈從師) 법사도 은근하게 영접하면서 조금도 친소(親踈)의 차별이 없었으니 전생의 인연이 있었다는 걸 여기에서도 알만했다.

이 절에서 겨울과 여름동안 가까이 모시다(執侍) 다시 법사를 따라 청룡(靑龍)ㆍ은적(隱寂)ㆍ문수(文殊) 등 여러 사찰에서 각기 한 철씩을 지내고 안거하면서 〚사집四集〛ㆍ〚기신起信〛ㆍ〚반야般若〛 등의 경전(經典)을 거듭해가며 들었다. 

특별히 법사의 정성스러운 가르침(諄諄之誨)을 받고 경을 보는 안목(眼目)이 예전보다 더욱 밝아져 환몽법사의 공덕은 있는 힘을 다해도 갚을 수가 없었다.

이때에 법사에게 절하고 작별하면서 또 남쪽 지방을 유람할 뜻을 내어 둘이나 셋 정도의 동지와 동반할 것을 결의하고서 영호남 두 고을의 뛰어난 경치를 구경하러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신흥사(神興寺)의 적조암(寂照庵), 강천사(江川寺)의 연대암(蓮臺庵), 관음사(觀音寺)의 무설암(無說庵), 실상사(實相寺)의 내원암(內院庵), 군자사(君子寺)의 영원암(靈源庵), 안국사(安國寺)의 서암(西庵), 송광사(松廣寺)의 보조암(普照庵), 선암사(仙岩寺)의 남암(南菴), 해인사(海印寺)의 관음암(觀音庵) 등 여러 큰 수행 처를 두루 돌아다녔다.

온 나라에서 명성이 드러나고 덕이 높은 사람(名顯碩德)인 무경(無竟)ㆍ남악(南岳)ㆍ호암(虎岩)ㆍ영해(影海)ㆍ상월(霜月) 등 여러 대종사(大宗師)의 법석(法席)에 두루 참배(參拜)하여 <화엄華嚴>ㆍ<원각圓覺>ㆍ<능엄楞嚴>ㆍ<반야般若>ㆍ<기신起信>ㆍ<현담玄談>ㆍ<염송拈頌> 등 모든 대 경전을 듣고 보고(聽覽) 저 수많은 법사들이 가르치고 인도하는(敎誨) 덕택을 입어 선풍(禪風)과 가르침의 달빛(敎月)을 마음과 뱃속에 아울러 환히 밝혔으니 어찌 경쾌(慶快)하지 않았겠는가. 

그 가운데 호암법사(虎岩法師)의 공덕은 더욱 지극하고 깊고도 귀중해 산악보다 무거우니 갚기가 어렵고 바닷물을 먹물로 갈아 써도(海墨) 기록하기가 어렵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