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대부분 가족간에 대화를 많이 하지 않는다.

겨우 밥 먹었어, 어디냐, 언제와요, 또 그러네, 같은 말이 아닌 진짜 대화 말이다. 친구들과는 인간관계, 일상의 사소한 일에서부터 최근에 본 드라마나 책, 취미, 토픽뉴스, 정치 가십 같은 것들에 대해서, 또 이런 저런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가족간에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타인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고 서로 알기 위해 대화하지만, 가족은 날 때부터 가족이었으므로 말하지 않아도 훤히 알 것이라고 착각한다. 무슨 문제가 생기든 결국 괜찮아질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상처주기 십상이다.

언제나 ‘가족이니까’와 가족인데 뭐 어때? 정도다. 그 언저리에서 상처는 쌓이면 곪고, 후회는 깊고, 아쉬움은 길다. 아마도 피를 나눈 사이라서 더 그럴 것이다. 가족이 가족이기 위해서는 솔직한 대화가 필요하다.

부모의 말은 자식이 겪을 앞날에 대한 초조함과 불안에서 나온다.

이미 만만하지도 않고 점점 늘어나는 나이에 아직 짝을 구하지 못한 아들의 앞날이 불안하다. 애써 배우고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자식들의 처지가 걱정된다. 불안은 늘 닥쳐오지 않은 미래에 관한 거다. 현재만으로도 힘겨운 자식의 입장에서는 그런 말이 더 아프게 꽂힌다.

자식이 겪는 마음의 상처는 우울로 이어진다. 불안이 미래에 관한 두려움이라면 우울이라는 감정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반응이다.

우울은 접착제로 붙인 것처럼 견고해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자식은 부모에게 격하게 반응하게 되고 이제 부모의 충격과 우울로 발전하게 된다.

가족관계는 소원함이 심하면 단절의 단계로 진행된다. 피를 나눈 가족 사이에도 말을 가려서 하고 그 시점도 잘 고려해서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공감대와 이해에 초점을 맞추어 풀어가야 한다. 미래는 아직 걷지 않은 길이다. 부모에게도 자식에게도 그렇다. 서로 간에 판단보다는 이해가 필요한 이유이다.

가족은 나의 인생을 이끌어주고 또 버팀목이 되어 주지만 그렇다고 인생사의 모든 풍파를 대신 겪어 주지는 못한다. 때문에 가족만을 믿고 나의 삶의 방관자가 되어선 안된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데리나’의 첫 문장이 떠오른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특히 오늘날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황혼 이혼은 심각한 사회현상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20’에 따르면 2019년 한 해 동안 혼인기간이 20년 이상인 부부의 이혼 건수가 무려 3만 8400여 건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체 이혼 건수의 35퍼센트를 차지했다. 이혼부부 3쌍중 한쌍이 이혼한 셈이다. 선녀와 나무꾼처럼 천생연분의 달콤했던 신혼시절이 그립지 않는가?

황혼 이혼의 현상은 두 가지 요인으로 분석 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고 맞벌이 등으로 스스로 경제적 독립이 가능해지면서 가정 경제의 주도권을 여성이 쥐게 되는 시대의 변화다. 

부부간 자유와 구속의 균형이 대등한 시대에 남자의 독선은 허용되지 않는다.

둘째 요인은 평균 수명의 증가에 있다. 요즘 삶의 가치관은 30~40년을

제2의 인생으로 일거리 보다 놀거리를 찾아 혼자서 자유롭게 살고 싶은 마음의 여유를 앞세운다. 그런데 황혼 이혼을 결심하고 요구한 쪽은 대부분 여성이다. 부부 사이의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일차적인 책임은 남편 쪽으로 더 기울어진다.

여자는 엄마이기 이전에 아내다. 아내는 만능의 수퍼우먼이 아니다.

아내란 누구인가? 평생을 남편과 아이들만 보고, 울고, 웃다가 결국엔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다. 상황이 쉽지 않더라도 남편이 아내를 더 이해하고 아껴준다면 그나마 낫겠지만, 아내의 마음을 헤아려들지 않고, 중요한 가정사는 독단으로 결정하고 가정 폭력이나 방탕한 생활로 속을 썩이는 남편이라면 아내의 마음에 켜켜이 슬픔과 고통이 쌓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소외감을 느끼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격리 됐다고 느끼는 순간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로만 보지 말고, 어머니로서의 존귀함도 인식하고 예를 갖춰야 한다.

여기서 부처님의 설법 한 구절을 감상해 보자. 어느 때 부처님께서 대중을 거느리고 남방으로 향하고 계셨다. 도중에 뼈 한 무더기로 만나자 그분은 오체를 땅에 대고 예배를 드렸다. 제자가 까닭을 물으니 “여기에는 내 전생의 부모님의 뼈가 있을 것이다”말씀하시며 이 자리에서 부모의 은혜가 크고 깊음을 설명하는 ‘부모 은중경’의 설법이 펼쳐진다.

“여자와 남자의 뼈를 둘로 나누어 보라!” 하시니 “살아있을 때는 겉모습을 보고 알 수 있지만 뼈만 보면 어찌 구문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대중이 여쭙자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남자의 뼈는 희고 무거운데, 여자의 뼈는 검고 가벼우니까, 자녀를 낳고 기름에, 한번 아이를 낳을 때에 서 말 서 되나 되는 엉킨 피를 흘리고, 여덟 섬 너 말이나 되는 젖을 먹이기 때문이다.”

글을 읽고 나서 묘한 생각이 겹친다. 어느날 실컷 우려먹은 사골 냄비에서 뼈다귀를 건져 올릴 때의 손 끝에 와 닿던 그 섬칙한 충격! 언제 이렇게 되셨을까?

때마침 장흥군이 내 건 “어머니 품 장흥”이 상서롭다.

가화만사성, 국가 대길의 소스가 아닌가, 캠페인성 구호에만 그칠게 아니라 명품랜드마크로 입체감 있게 잘 색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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