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정/한학자
▲ 김규정/한학자

龍巖和尙 法諱體照 俗姓鄭氏 父諱某 母宋氏 湖南長城人 乃士族也 母夢見黃龍 乘雲盤空 因以有娠 生于癸巳四月初一日 是夜父寢外室 夢有神僧 立於門外 呼出主人曰 興吾宗風者 托於主人之家 須記之 是乃師之兆朕 而其爲法筵龍象之徵歟 師在襁褓 呱泣之聲 一不出門 甫四歲 免母懷 而必就父 而寢自在 孩提異於凡兒 六歲始就學 不費人雕瑑 而記誦輙進 十載通史記外傳 綴文賦詩 亦頗敏給 鄕里稱之 至乙巳 擧室罹恠疾 先丁內艱 而尋又遭外艱 師年未成童 與伯氏經紀殮葬 皆依禮服闋 兄弟俱行 至中途 伯則還鄕 師孤行至京口 投止於南漢 伊時關東雪山釋釋稔長老 適與遇焉 愛其人與材 而率以歸 仍令專意學業 敎以禪門經旨 雖玄妙之奧 亦能通悟 敎之者至讓 以不能焉 十八薙髮 乃以稔長老爲恩師 而白蓮堂智稔大師爲戒師也 自是叅拜於日菴法師 益肆其力於竺敎內外典 而妙解邃觀 出於等軰 至於辨是非正曲直 亦蒙日庵之印可焉 一日日菴諭師曰 法門不可不廣 眼界不可不大 師於言丁勇決飄然一衲 遍叅於南北諸宗 究觀六通三乘而歸 則乙丑歲也 自此掛錫秉拂 門徒大集 日庵以所居內院 屬師而錫號龍巖 於日菴爲法嗣 而於淸虛爲七世孫也 師長於宣揚道敎 多有成就 即所謂道勝之韻 虛徃實歸者也 且其慈悲施予之心 出於天性 見人之飢餒寒乞者 無不矜惻 解衣推食 少無慳焉 惟其根基力量 善幹事務 本寺之鉅役 多待其指而成 故山門四衆 亦以師爲依歸也 至其末年 謝遣門徒 而其中高足 惟洪波門益也 其居頗遠 師病中思之 而波亦心牽夢想 即日遄歸而來 省師病亦危矣 因屬以後事 至於四大將散之際 索筆書偈曰 與我有親嚮 何時更有親 親返前昔在 今又無緣因 我今又得在 前聖是吾親 今朝大笑去 楓岳萬峰濱 乃浴身更衣 越三日而示寂 壽六十七 臈五十一 是年即己亥十二月二十一日壬戌 而後三日甲子闍維 是日大有靈瑞 翌日同門人 頓揮徃而審視 得一片頂骨於十餘步嘉樹之上 瑩淨光澤 衆皆嗟異 門徒等乃能㘅哀殫誠 營立浮圖於百齋後五日 奉安於寺之東而書曰 龍岩塔者 即師之雙樹遺迹也 師之詩文若干篇 不忍泯沒 其弟子洪波雪潭南月東坡仙岳鳳巖 及神足歸直觀彥等 與其受戒僧若干人 將鳩財繡梓云 法孫影潭性默撰

출전 〚龍巖堂遺稿〛

▲용암당대선사 진영

❍용암당 대사 행장

용암화상의 법휘는 체조(體照)이고 속성은 정씨(鄭氏)이며 아버지 휘는 모(某)이고 어머니는 송씨(宋氏)이다.

호남 장성 사람으로 바로 문벌이 좋은 선비집안 출신이다.

어머니 꿈에 누런 용이 구름을 타고 공중에 서려있는 모습을 보고 임신하여 계사년(숙종39년1713) 사월 초하룻날 태어났다.

이날 밤 아버지는 사랑채(外室)에서 자고 있었는데 꿈에 노승(神僧)이 문밖에 서서 주인을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 종풍을 흥기시킬 사람을 주인의 집에 맡기오니 모름지기 기억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대사가 될 조짐이고 그것이 법연의 고승(法筵龍象)이 될 징조가 아니었겠는가.

대사가 강보에 싸여 있을 때는 아기울음소리가 한 번도 문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겨우 네 살 때 어머니 품을 벗어나 반드시 아버지 처소에 나아가 편안하게 잠들었으니 어린아이 때부터 평범한 아이와는 달랐다.

여섯 살에 비로소 학업을 받기 시작했는데 인위적으로 남의 품이 들지 않아도 잘 외워서 곧잘 진척되었다.

열 살에 사기(史記)와 외전(外傳)을 다 읽고 글을 짓고 시를 읊은 것도 자못 민첩하여 고을에서 들먹였다.

을사년(영조원년1725)에 이르러 온 집안이 괴질에 걸려 먼저 어머니 상을 당하고 얼마 되지 아니하여 또 아버지 상을 만나 대사의 나이가 성동(成童)도 되기 전인데 형과 함께 염습하여 장사지냈다.

모두 예에 따라 상복을 벗어 버린 후 형제가 함께 집을 떠났는데 중도에 이르러 형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대사만이 혼자 걸어 한양 입구에서 멈추고 남한산성에서 묵었다.

그때 관동 설악산 승려 석임장로(釋稔長老)가 마침 그를 만났는데 그 사람됨과 자질을 아껴 데리고 돌아가 학업에 오로지 뜻을 두게 하고 선문(禪門) 경서(經書)에서 중심이 되는 생각(主旨)을 가르쳤다.

깊고 현묘한 뜻이라도 능히 시원하게 깨닫자 가르치는 사람이 그보다 능하지 못하다고 사양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열여덟에 머리털을 깎고 바로 석임장로(釋稔長老)를 은사로 삼고 백련당 지임대사(白蓮堂智稔大師)를 계사(戒師)로 삼았다.

이로부터 일암 정이법사(日菴精頤法師,1674~1765)를 참배하고 불교의 내외전적에 더욱 그의 힘을 다하였다.

오묘한 깨달음과 깊고 자세하게 보는 일(妙解邃觀)은 또래에 비해 뛰어났고 시비를 변증하고 곡직을 바로 잡는데 이르러서는 또한 일암의 인가를 받았다.

하루는 일암이 대사를 깨우치며 말하기를, “법의 문(法門)은 넓지 않아서는 안 되고 눈의 경계(眼界)는 크지 않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간곡한 말을 듣고서 용기 있게 결단하고 훌쩍 한 벌의 가사로 남북의 여러 종문을 두루 참례하고 여섯 가지 신통과 세 가지 교법(六通三乘)을 궁구하여 살펴보고 돌아왔으니 을축년(영조21년1745, 대사의 나이 33세)이었다.

이로부터 석장을 걸어두고 불자를 잡으니(掛錫秉拂) 문도들이 크게 몰려들자 일암은 거처하던 내원암을 대사에게 내어주고 용암(龍巖)이라는 법호를 내려주었다.

일암에게는 법통을 이어받은 제자가 되고 청허 휴정대사에게는 7세손이 된다.

대사는 불도의 가르침을 선양하는데 특장이 있어 많은 성취가 있었으니 바로 이른바 “도가 수승한 시인(道勝之韻)”이라 했고 “빈손으로 왔다가 채워서 돌아간다(虛徃實歸).”고 하였다.

게다가 그는 자비롭게 베푸는 마음이 천성에서부터 우러나와 굶주리거나 추위에 구걸하는 사람을 보면 가련하고 불쌍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어 조금도 아낌없이 옷을 벗어주고 먹을 것을 챙겨주었다.

그는 근기와 역량(根基力量)이 사무를 잘 주관하여 본사의 몹시 힘든 일은 대부분 그의 지시를 기다려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산문의 사부대중들도 대사를 귀의처로 삼았다.

그가 말년에 이르자 문도들을 사양하며 돌려보냈는데 그 가운데 고족제자로 홍파 문익(洪波門益)이 있었다.

그들이 거처하는 곳이 상당히 먼 거리로 떨어져 있었는데도 대사가 병중에 그를 생각할 때마다 홍파도 마음으로 이끌려 꿈속에서 대사가 보였다.

그날로 서둘러 돌아와 대사의 병을 살펴보니 위중하였으므로 뒷일을 부탁하였다.

사대(四大)가 흩어지려 하는 때 붓을 찾아 게를 쓰며 읊기를,

與我有親嚮。나와 친분을 누린 이들

何時更有親。어느 때나 다시 가까이 할거나

親返前昔在。친한 것 돌이켜보면 옛날 일

今又無緣因。지금은 또 인연이 없구나.

我今又得在。난 지금 다시 있을 곳 얻었으니

前聖是吾親。옛 성인이 바로 나의 친지라네.

今朝大笑去。오늘 아침 크게 웃으며 가노라

楓岳萬峰濱。풍악산 일만 봉우리 물가로.

이에 몸을 씻고 나서 옷을 갈아입고 사흘을 넘기자 시적 하였다.

세수는 67세이고 법랍은 51년으로 이 해는 기해년(정조3년1779) 12월 21일 임술 날 이었다.

사흘 후 갑자 일에 다비를 치르자 이 날은 크게 신령한 서기가 있어 다음 날 같은 문중 사람들이(同門人) 서둘러(頓揮) 가서 자세하게 살펴보다 십여 걸음 떨어진 아름다운 나무 위에서 정골 한 조각을 얻었으니 해맑은 광택이 나서 대중들은 모두가 찬탄하고 기이하게 여겼다.

문도들이 슬픔을 머금고 정성을 다해 백일재를 올린 후 닷새 째 되던 날 부도를 마련하여 세우고 절의 동쪽에 봉안하며 쓰기를 용암탑(龍巖塔)이라고 하였으니 바로 대사가 입적(娑羅雙樹)한 유적지였다.

대사의 시문 약간 편을 차마 없애지 못하고 그의 제자 홍파 문익(洪波文益)ㆍ설담 태활(雪潭泰濶)ㆍ남월 성환(南月性還)ㆍ동파 홍민(東坡弘愍)ㆍ선악 경웅(仙岳敬雄)ㆍ봉암 돈욱(鳳庵頓旭) 과 신족(神足, 수제자)인 동지 귀직(同智歸直)ㆍ인월 관언(印月觀喭) 등이 그 수계 승(受戒僧) 약간 사람과 함께 재물을 모아 간행하고자 한다고 한다.

법손 영담 성묵(影潭性默)은 짓다.

注)

六通 - 천안통(天眼通), 숙명통(宿命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신족통(神足通), 누진통(漏盡通).

三乘 - 일승에 대비해 중생을 열반에 이르게 하는 3가지 교법인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용암 체조龍巖體照(영조39년1713~정조3년1779)

법호는 龍巖, 법명은 體照. 俗姓은 鄭氏. 母는 宋氏. 湖南 長城고을에서 태어났고 바로 士族 출신이다. 日庵法師의 法燈을 전해 받았다.

보림사에서 연담유일에게 ⟦대승기신론⟧과 ⟦금강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불교가사 ⟪草庵歌⟫와 ⟪夢幻歌⟫를 창작했고 정조원년(1777) 전라도 화순 萬淵寺에서 ⟦眞言集⟧을 重刊했다.

한국의 가사문학은 불교가사에서 비롯되었고 불교가사는 불교의 발원문에서 나왔다. 江原道 襄陽 神興寺에는 정조13년(1789)에 李福源(1719~1792)이 撰하고 姜世晃(1712~1791)이 書한 대사의 비가 서 있다. 세수는 67세이고 법랍은 51년이다. ⟦龍巖堂遺稿⟧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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