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을 비롯한 전국의 문화예술인 특히 전통국악예술인들이 16년 전통의 대통령 상 훈격인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을 공청회나 창립자 측과 의논 한번 없이 단숨에 없애버린 김성 군수는 비난 받아야 한다.  보성에서 매년 개최하는 “보성소리 축제” 개막식 축사에서 보성의 소리축제 발전을 위하여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을 내가 없앴다고 자랑했다니 장흥 문화예술관광산업발전 기대는 요원하다는 느낌이다.


3. 제2회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 대통령상

- 미스트롯 ‘진’ 송가인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 출신
- 중국과의 문화예술 교류를 통한 장흥발전을 꿈꾸다

 

▲일본에서의 애국가 무용공연. 중앙은 유관순 누나.
▲일본에서의 애국가 무용공연. 중앙은 유관순 누나.

2000년 11월 11일부터 13일까지 치러진 제2회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은 여러 가지로 1회 대회 보다 한층 업그레이드 된 대회였다. 1회 대회 때 국무총리상 종합대상이 대통령상으로 훈격이 격상된 것이 그 첫째였다.

이는, 제1회 대회가 전국에서 개최된 여러 국악제전 중에서 가장 우수한 대회로 평가받아 2회 대회부터는 종합대상이 대통령상으로 격상되어 명실상부, 국악 올림픽으로 자리 한 것이다.

또 2회 대회는 장흥의 미래를 위해서 중국과의 교류가 중요하다는 판단에서 이를 위한 초석으로 문화교류를 추진 중국 기악단 등 외국인 3백여 명이 참가해 축하공연 무대를 꾸몄고, 가무악제전과 연계해서 남도대학에서 한중(韓中) 도예전이 열리는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부대행사로 개최되면서 문화예술제전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제1회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제2회 대회를 준비하면서 나는 그동안 남도대학 도자기과와 맺은 인연을 십분 활용해, 가무악제전 부대행사로 한국남도대학과 중국 경덕진도자대학이 한중(韓中)도예전을 준비했다. 남도대학 도자기과 학생 20여 명을 데리고 중국 경덕진도자대학을 방문했다. 그리고 중국경덕진대학 측과 합의하여 장흥에서 한중 대학생 도예전을  개최하기로 합의할 수 있었다.

실제로 중국 경덕진도자대학의 교수 학생 등 20여명이 남도대학을 방문, 남도대학 도자기공에과 교수, 학생과 함께 도자기에 그림 그리기 대회, 옹기 성형대회, 옹기 및 도자기 전시, 옹기 워크샵 등의 프로그램으로 ‘전통자기 한중 2000년 문화축제’라는 문화 이벤트를 부대행사로 개최,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한ㆍ중 도자기산업 교류의 물고를 트기도 했다.

또 하나의 부대행사로, 한ㆍ중기악협연을 준비하기 위하여 중국 북경에 있는 북경중앙대학교와 연변의 연변대학교를 방문하고 조선족 음악인들을 만나 북경중앙대학교 학생 15명, 연변대학 무용과학생 15명, 강신자 교수의 지도로 판소리를 배우는 학생 4명을 장흥으로 초청하여, 제2회 대회 축하무대를 마련하여 장흥의 국악문화가 중국을 시발로 최초로 세계무대 진출을 꿈꾸는 첫발을 내 디딘 것이다.

또 이밖에도 중국에서 북경백두산 문화교류센터 대표단을 비롯하여 중국에서 한국음악을 하는 원로 음악인 관계자 10명도 함께 초청하여 장흥대회 참관 후 국악 관련 행사와 국내여행을 시켜드렸다.

특히 북경중앙민족예술대학과 연변대학에서 온 중국가무단의 공연, 남도대학학생들로 구성된 한중 합동관현악공연은 관중들에게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또 이들 한ㆍ중대학생음악협연은 대회 이후에 전국 순회공연을 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나는 연변 대학생들이 한국을 떠날 때 동대문 미레오래로 안내하여 그들 각자가 원하는 옷 한 벌씩을 선물로 사주었는데, 어찌나 고마워하는지 모두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후 중국을 방문 연변을 다시 들렸을 때 연변대학교, 연변음악가협회, 학부형 측에서 너무 반갑게 환대해주는 고마움에 정이 담긴 융숭한 대접은 잊을 수 없다. 또 조선족 중에서 판소리를 배우고 싶어 하고, 소질이 있으며,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 외국인부에서 1,2,3등을 차지한 3명의 학생들을 2개월간 초청하여 한국의 명인명창들로부터 판소리 개인교습을 받도록 주선하였는데, 이들이 중국으로 돌아가 중국에서 우리소리인 판소리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이들 중 변영화 학생은 중국음악 콩크루에 대상을 받아 현재 국립중국국가 독창가수로 북경과 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몇 년 전 모 방송국의 ‘스타킹’ 프로에 초청되어 한국에 왔다면서 제일 먼저 나를 찾아준 고마움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22년 전 이 모든 기획과 예산을 나 혼자 담당하면서 오직 농촌의 문화예술을 계승발전시켜 장흥관광산업 발전을 위한 열정이 뒷받침 했기에 가능했다. 16년을 이어온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은 민선 6기 김성 군수가 폐지시켰다. 이웃 보성, 순천, 진도, 영암, 해남, 목포 등의 국악대회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하늘을 보고 한숨을 짓는 나에 마음을 누가 알아줄까? 

요즘 인기절정인 미스트롯 진 송가인(본명 조은선)을 보면서 아픈 마음을 달랜다. 그가 광주예술고등학교 2학년 재학 시절인 2004년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 학생부에 출전하여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이미 실력을 인정받고 장래가 촉망되는 거목이라는 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전국의 명인 명창이라면 장흥을 방문했으며 국악인의 등용문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왜... 군민여론수렴도 없이 독단적으로 장흥문화예술의 삯을 자른단 말인가? 그것이 군수가 할 일이었던가? 군민께 사죄하고 부활의 길을 찾아라. 정치인이 문화예술을 모르면 정치 사기꾼이요 권력만 탐한 부패한 생계형 정치꾼으로 보일 수 있다.
 

▲송가인/가수
▲송가인/가수

4. 남도대학과 후원회장 시절

이영권 학장은 1999년 2월에 당시 장흥대학 초대학장으로 취임한 이래 젊은 대학, 환경 대학을 주창하며 학교기반 및 교육여건을 조기에 정착시키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는 평을 얻고 있었다.(2001년 8월 29일 정년 퇴임)내가 남도대학의 후원회장으로 활동한 것은 당시 이영권 학장과의 인연과 학장 임명권자인 허경만 지사께 이영권학장을 강력 추천하면서 임명해주시면 학교 발전에 적극 힘쓰겠다는 약속을 하였던 것이다

국회의원이었을 때부터 고향의 선배로, 또 서울에서 향우회 활동을 하게 되면서 ‘선배 지인’으로서 가깝게 지낸 사이였지만, 그가 1999년 당시 장흥대학 초대학장으로 취임해 장흥으로 내려오신 시기와 내가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을 준비하기 위해 장흥으로 내려와 장흥과 서울을 오가며 열정적으로 뛰었던 때가 1999년이었으므로, 거의 같은 시기에 고향으로 귀향한 셈이어서 장흥에서 더욱 가깝게 모시던 분이셨다.

평소에 나의 활동성과 외교력 등의 능력을 평가해주던 분이어서, 초창기 학교사정이 어려운 장흥대학을 후면에서 지원해주는 장흥대학 후원회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허경만지사와의 약속도 있어 내가 장흥대학 후원회장을 맡게 된 것이1997년도였다.

남도대학 후원회장을 하면서 알게 된 분이 바로 일본 민단 후구오가회장인 선채호(안양면 출신) 씨다. 그분은 2000년 5월에도 남도대학 국악과 학생들을 후구오가로 초청했고, 그해 남도대학 조성과 장학금으로 3천만원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지원으로 세워진 표지석 제막식에 참가하기 위해 그해 10월에 방한했다가, 관광호텔에서 89세의 장형과 87세의 둘째형의 생신연회를 베풀어주기도 했다.

생신연에서 나는 축하공연을 한 남도대학과 전남도립국악단에 대해 소개하고 일본 초청을 부탁했고, 선회장도 흔쾌히 승낙하여 남도대학 국악단의 다음해 8.15광복절 초청을 민단간부들에게 주선했던 것이다.

평생 잊지 못할 일본 후쿠오카시 씨오크호텔 눈물바다. (일본에서의 애국가 무용공연. 중앙은 유관순 누나) 특히, 2001년은 한ㆍ일 교과서 문제로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감정이 크게 악화되는 등 한ㆍ일관계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한일양국의 외교마찰로 인해 특히 재일교포사회에서 우리 동포들의 사기도 크게 떨어져 있었다. 나 역시 한국인이고, 이런 상황을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시기 나는 남도대학 후원회장으로 있었기에 남도대학생으로 국악단을 구성하여 재일교포들을 위문하고 싶었던 참이었고, 1999년에 이어  2000년에도 남도대학국악단과 함께 일본을 방문 우리 장흥의 문화예술공연을 하였다. 그런데 한ㆍ일간에 독도문제로 외교마찰이 심각했다. 일본 교과서에 독도가 자기네 땅으로 표시하여 양국의 감정은 높아졌고 국내에서는 일본 방문을 자제 시키는 등 한ㆍ일 외교전은 살얼음판의 냉각기였다. 나도 힘 쎈 곳으로부터 문화예술단의 일본 방문 자제를 요청 받았다. 깊은 고민에 빠진 나는 중대 결단을 내렸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움츠리는데 타국 일본에 사는 교포들은 어떨까?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넣어주자 그때가 2001년 8월 이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30명의 일본 방문단을 구성하고 공연작품은 ‘애국가’ ‘태극기’로 희망과 용기를 일으킬 수 있는 작품으로 구성하여 2001년 8월 현해탄을 건너 후쿠오가시에 도착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디서 그런 뱃장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애국심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일행은 여장을 풀고 일본 후쿠오카시에서 가장 큰 씨오크호텔 대공연장에 도착했다. 그날은 감격에 겨운 8.15광복절이었다. 일본으로는 전쟁에 패한 국치일이기도 한다. 공연시간 2시간 전인데도 재일교포 1.000여명이 운집한 로비를 비집고 리허설을 끝낸 다음 개막과 함께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도록~~~” 애국가가 울리면서 태극기를 흔든 무용수들이 1500 관중 앞에 나타나 애국가에 맞춰 태극기를 흔들며 유관순 누나를 연상하는 무용이 시작되자 관객들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수건을 꺼내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울음바다로 변해버렸다. 2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나의 눈에 눈물방울이 매친다. 재일교포들은 일제압박의 고통이 복받쳐 오르는 것 같았다. 해방을 맞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국 타향에서의 설음이 오죽할까를 생각하니 그들의 눈물방울에는 수천수만의 사연이 긷든 것 같았다. 문화예술의 힘은 측정할 수 없는 무한의 힘이 있음을 깨달았다. 

 지난 7일 입추가 지나고 보니 가을이오고 가을이면 개최했던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이 그리워진다. 지역문화예술발전을 위하여 사재를 털어가면서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짧은 생각들 때문에 장흥 전통문화예술의 싹을 잘라버린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스스로 모진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강한 풀, 꿋꿋한 절개를 가진 질풍경초(疾風勁草)다.

풀은 약하다. 건드리면 스러졌다 다시 일어선다. 그러나 어깨를 걷고 힘을 합치면 적장을 잡고 원수를 갚게 해준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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