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을 비롯한 전국의 문화예술인 특히 전통국악예술인들이 16년 전통의 대통령 상 훈격인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을 공청회나 창립자 측과 의논 한번 없이 단숨에 없애버린 김성 군수는 비난 받아야 한다.  보성에서 매년 개최하는 “보성소리 축제” 개막식 축사에서 보성의 소리축제 발전을 위하여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을 내가 없앴다고 자랑했다니 장흥 문화예술관광산업발전 기대는 요원하다는 느낌이다


1. “장흥전통 가ㆍ무ㆍ악 전국제전”을 창설하게 된 동기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은 당시 김성군수의 폐지로 제16회(2014년)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장흥출신 국악인들과 전국에서 권위 있는 국악인 등용문이었다. 분하고 원통한 것은 김성 군수는 보성 소리축제 축사에서 보성의 소리축제 발전을 위하여 장흥의 국악대회를 내가 취소시켰다고 자랑하고 보성군민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니 통탄할 일이다. 지금도 국악인을 비롯한 문화예술인들의 비난을 받고 있는 이유다. 보성, 영암은 국악발전을 위해 노력하는데 왜 장흥은 우리의 전통문화예술과 국악 계승발전을 위하여 개인이 사재를 출연하여 16년 동안 진행시켜온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을 취소했을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역사적 사건에는 동기가 있다. 장흥 미래의 농촌은 문화관광에 답이 있다고 확신하고 지역문화발전과 관광도시로의 기초를 다지기 위하여 전통공연예술, 문화산업, 등 문화예술 각 분야의 탄생과 발전을 위한 1999년 나에 예견은 옳았다고 판단된다.

1998년(48세) 당시 나는 국제로타리 3690지구 동광명로타리클럽 회장을 맡고 던 시절이다.

▲1999년 6월14일 결식아동돕기 광주문예회관 공연. 영부인 이희호여사 참석 필자는 맨 앞줄 두 번째 양복차림
▲1999년 6월14일 결식아동돕기 광주문예회관 공연. 영부인 이희호여사 참석 필자는 맨 앞줄 두 번째 양복차림

1997년 말 터진 IMF(국제통화기금)사태로 1998년 들면서 기업들이 연쇄 부도로 연이어 무너지고 도산하면서 직장을 잃거나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 나와 무숙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국내경기는 갈수록 어려웠고 결식아동도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참상을 보고, 무엇보다 배고픈 설음에 책상 앞에 앉아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눈물을 흘려야하는 학생들을 돕기로 마음먹고, 어느 날 광주로 내려와 당시 허경만 전남지사를 면담했다. 그리고 허지사님께 부탁하여, 전남도립국악단을 초청, 국내 최초로 1998년 11월 ‘결식아동돕기 국악공연’을 경기도 광명시 실내체육관에서 개최했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모아진 기금이 약 1억 1천만원이었다. 나는 성금을 광명시 교육청과 결식아동돕기 운동 단체에 전달, 결식아동을 위한 자금으로 쓰여 지도록 했다. 

광명실내체육관에는 3천여명이 운집했다. 이때 여·야 대표인 손학규, 조세형 및 천정배, 남궁진 등 수많은 정치인을 비롯하여 교육ㆍ연예계 인사들, 그리고 고향인 장흥에서도 고연두, 김용원, 김재민, 이금호 등 많은 분들이 참석했다. 

한 차례 결식아동돕기에 성공한 나는 ‘제2차 결식아동돕기 국악공연’을 개최한 것은 이듬해인 1999년 6월 14일 광주문화예술회관 대 공연장에서였다. 모든 기획진행 경비는 내가 부담했다.

2차대회 때는 김대중 대통령 영부인 이희호여사를  초청했는데 2차대회를 계획할 때 전라남도 및 광주시의 정치인들과 각계 인사들이 이희호 여사를 초청한다고 하니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희호 당시 영부인께서 참석해 주시어 2차대회는 더욱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었다. 

국악과의 인연은 이때 생겨난 일이었다.(그러나 돌이켜 보면, 국악과의 인연은 초등학교 다닐 때 일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자, 집안에서는 굿을 많이 했다. 굿판이 벌려질 때마다 징, 새납, 아쟁, 해금, 대금, 피리소리를 귀 아프게 들을 수 있었다.)

‘제2차 결식아동돕기 국악공연’을 마치면서 인간문화재 5호 정철호 선생(전남도립국악단 상임지휘자)을 만났다. 그때 정철호씨로부터 조선 말엽에 장흥에 신청이 있었고, 신청으로 인해 장흥은 당대 남도국악의 성지였다는 것, 서편제 소리의 창시자인 박유전 선생이 당시 장흥부에 속했던 웅치면 강산리에서 소리 공부와 전수했으며, 회천면 정응민의 생가도 당시는 장흥 땅 이였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또 전 국립극장장인 전황씨의 고증을 통해, ‘최옥삼류 가야금 산조'로 유명한 최옥삼(일명 옥산)이 바로 장흥 신청 출신으로 강원도 통천에서 가야금 산조와 단소산조, 청성곡 등 수많은 민족기악곡에 대한 창작활동을 펴왔으며, 해방 이후 당대 최고 무용가였던 최승희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며 한국 최초로 창작무용곡에 작곡 개념을 정립하는 등 민족음악가로서 명성을 누렸으나 남한에서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얘기며, 남북한을 통틀어 최초의 총천연색 영화인 ‘춤추는 가얏고’(장흥에서도 시사회를 가진바있었음)의 음악 작곡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최옥삼 선생에 대해 관심이 깊어진 나는 최옥삼 선생의 업적과 음악에 대한 재조명을 위해 그해 7월에 중국 연변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연변 음악가협회 박장수회장을 만나 그를 북한으로 보내 최옥삼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남도대학 이승곤교수께 전달하여 연구케 했다. 그리하여 ‘은하수를 건너서’ ‘박연폭포’ 등 최옥삼 선생의 작곡집을 입수하였고, 이런 내용들이 바탕이 되어 1999년 11월 12일 개최된 ‘제1회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부터 특별상으로 ‘최옥삼 가야금 상’을 제정하는 바탕이 되었으며, 2003년에 ‘민족음악가 최옥삼기념사업회(회장 김희준)’를 결성하고, 이 모임이 주동이 되어 2003년 7월 23일, 최옥삼의 삶의 행적과 예술을 조명하는 국제학술세미나와 추모 음악회를 개최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한편, 결식아동돕기 국악공연을 두 차례를 개최하며 얻어진 국악에 대한 관심, 국악인들과의 폭넓은 인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깨닫게 된, 신청을 중심으로 형성된 장흥의 남도국악에 대한 전통과 ‘서편제의 본고향은 보성이 아니라 장흥이었다’는 역사적 진실을 결코 그대로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장흥의 문화관광과, 서편제의 본고향으로서 장흥의 남도국악에 대한 역사적 전통과 그에 대한 정체성을 확보하는 일이야말로 매우 중요하다는 점에서 추진하게 된 것이 바로 ‘장흥 전통 가ㆍ무ㆍ악 전국제전’이었다. 

 도움을 주셨던 정철호(중요무형문화재5호.고법). 박동진(중요무형문화재5호.판소리) 전황(전 국립극장장). 오정숙(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예능보유자). 성창순(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예능보유자) 등 대한민국 국악의 별인데 모두 타계하여 지면을 통하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아무튼 전국의 국악인은 장흥을 새로운 국악의 성지로 알게 되었고 모두들 장흥을 찾게 되었다. 생존하신 유영대(국악방송사장), 왕기철(국립전통국악예술고 교장), 왕기석(국립민속국악원장),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에 입상 후 문화재가 되신 정명자, 김덕숙, 김옥천, 강행복 등과 방성춘, 신영희 등 장흥전통가무악과 함께한 국악 인재들이 지금 해외와 전국에서 맹활동 중에 있다. 이토록 장흥의 국악문화는 전국에 뿌리를 내리던 중 한국 국악성지의 꿈이 한 사람의 판단착오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니 통탄할 일이다. 김성 군수는 책임지고 부활을 하던지 군민께 엎드려 용서를 빌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신청(神廳)의 예맥(藝脈)을 이어 받은 장흥의 국악인들이 큰 족적을 남겼듯이 오늘의 장흥 출신 국악인들의 활약 또한 만만치 않아서 자랑스럽다.

  유영애(남원 국악제 판소리 대통령상 수상), 문효심(서울 판소리대회 대통령상 수상), 이영주(서울 판소리대회 대통령상 수상) 등이 판소리와 가야금 명창(名唱)으로 발군의 실력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박근영(서울 판소리대회 고법 부문 대통령 수상), 강행복(장흥 전통가무악 기악 부문 대통령상 수상)은 국악계의 젊은 인재(人才)로 장래가 촉망받고 있다. 뒤를 이어서 정명석(청태진 국악제전 고법 부문 최고상 수상), 이현미(판소리, 전남도립국악단), 김효정(판소리, 어랑어랑예술단장), 이승민(남원시립국악단), 이태완(남원시립국악단), 김율희(서울대 박사과정), 조현정, 이밀리(판소리, 남원민속국악단), 김안순(전남대 국악과 졸)등이 수준 있는 실력을 갖추고 완창발표회를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참으로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장흥 땅의 국악을 보존 계승하는 ‘장흥 국악연구회’ 와 ‘시조 연구회’ 가 매년 소박한 형식이나마 경연의 행사를 거르지 않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2. 제1회 장흥전통가무악 전국제전 개최되다

▲뺑파축하공연 
▲뺑파축하공연 

내일의 우리 농촌은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고장이라야 경쟁력이 있고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오랫동안 가져왔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 장흥에는 남들에게 당당하게 내놓을 만한 문화상품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우연이 국악행사를 통해 경쟁력 있는 장흥의 문화상품 하나를 발견해 낸 것이다. 그것이 ‘서편제의 본향’ 장흥, 최옥삼, 장흥 신청 등  장흥의 국악에 대한 전통이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장흥의 국악, 판소리에 대한 역사적 전통을 문화상품으로 만들어내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고법 경연 장면 
▲고법 경연 장면 

장흥 국악예술의 뿌리를 찾고, 국악문화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 문화를 통한 지역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앞날을 내다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문화재 정철호선생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을 창설하기로 하고 그 창설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때가 1999년 8월 초였다.

▲승무춤 
▲승무춤 

8월 초 어느날, 당시 윤수옥 문화원장의 협조를 받기위해 장흥문화원을 방문했다. 윤수옥 원장과 안정복, 김희웅부원장 등 몇몇 인사들이 있었다.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 창설의 취지에 다들 공감했고, 장흥문화원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확답을 얻었다. 

그리고 대화 중에 윤수옥 원장이, “장흥을 문림의향(文林義鄕)이라고 하는데 그 문(文)을 대표하는 기양사가 있지만, 낡고 비가 세고 보수가 시급한데 군에서 예산이 없어 못한다” 또 “장흥에 문화예술회관이 필요하다”면서 기양사 보수와 문화예술회관 신축문제를 도와 달라고 제안했다.

이어 당시 김재종군수를 면담했다. 김재종 군수에게, 장흥의 국악 역사와 전통을 설명했다. 또 ‘장흥이 서편제 소리의 본고장이고 남도국악의 성지였다’는 역사적 사실도 구구히 설명했다. 결국 김재종 군수도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 창설에 찬성했다.

이렇게 해서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의 창설은 결정되었다. 문제는 시상금, 행사추진비 등 행사에 필요한 일체의 경비 약1억8천만원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급히 서울로 올라가 국회의사당을 찾았다. 당시 김옥두 의원을 면담했다.  김옥두 의원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당시 마사회에서 지원해준 1천만원은 김옥두의원의 소개로 얻어진 지원이었다. 

기왕 말이 나와 윤수옥 원장으로부터 부탁받은 문화예술회관 신축도 부탁해, 마사회로부터 문예회관 건립기금으로 15억원을 지원해주도록 하겠다는 약속도 받았다.(최초5억 지원받았음)

그리고 당시 세종증권의 김형진회장으로부터 5천만원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리하여, 군비 1천만원,  마사회 1천만원, 세종증권 5천만원 등 7천여만원의 행사지원비를 확보한 것이다. 그리고 부족한 예산 1억원은 내가 부담하기로 했다. 아내며 형제들도 미친 짓이라며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오직 남도국악 장흥의 문화예술을 살리고 싶은 내 열정과 의지, 고집이 있었기에 거액의 사비를 충당해가면서까지 제 1회 대회를 성대하게 마칠 수 있었다.

지역문화 창달과 장흥의 자랑인 국악을 문화상품으로 개발, 지역발전을 촉진하는 계기로 삼겠다는 취지로 준비해 온 제1회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이 1999년 11월 12,13일 양일간 실내체육관에서 축포를 쏘아 올리며 개최됐다. 고법ㆍ판소리ㆍ기악ㆍ무용 등 4개 종목과  신인부, 그리고 국악대회사상 처음으로 외국인부까지 창설 모두 8개 부문서 170여명이 참가하여 가무악의 기예를 겨루는 명실상부 종합국악제전이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12일 예선을 치르고 13일 치러진 본선 및 결선에서는 KBC 광주방송국이 중계 했다. 

또 축하무대 및 특별공연무대에는 인간문화재인 김성곤 김철호, 명인명창인 조상현 안숙선 임이조 오정숙 이생강 등이 출연했고, 또 전남도립국악단 창무악의 ‘춘하추동’, 인동초의 공연 등이 선뵐 정도였다. 인동초를 관람하신 김옥두의원의 눈에서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인동초“ 창무극은 김대중 대통령이전에 대통령이 되실 것을 예상하여 기획한 창작극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전남도립 국악단 축하공연 
▲전남도립 국악단 축하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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