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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서거 111주년 기념 장흥신문 기획특집(9)【옥중 집필본 동양평화론】전감(前鑑)에서 문답(問答)까지
관리자  |  ch23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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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4.16  10:4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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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동양평화 [각론]을 가슴으로 뿌리며
한문본 원문에 스며들어 시적인 상상력으로 휘감긴 

◀지난호에 이어서
내 혼령, 이제는 땅에 떨어지겠지
/ 중편(中篇{Ⅰ}) / 3연 15행
나막신과 대지팡이로 동네를 나오니
강둑의 푸른 버드나무가 빗속에 즐비하다
모든 벌이 어찌 금곡주와 같겠는가
무릉도원을 배 타고 찾는 것이로다.

여름의 풍류는 인간이 다 취하고
가을은 세상 일이 손님이 먼저 들기를 기다린다
주인의 풍취는 참으로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다.

흥이 푸른 나무들의 연기(演技)가 충분하고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을 나가서자
푸른 산과 흰 들 사이에 꽃이 간간이 피어 있다
만약 화가로 하여금 이 경치를 묘사하게 한다면
그 나무 안의 새소리를 어떻게 그릴까
갈대꽃 위에 누구의 이름을 새길까
헤아려 눈 속에 들어간 뒤에 글자마다 분명할 것이다
남자가 처음 한 맹세를 배반 못하겠다.

3연 15행으로 이어지는 중편(中篇{Ⅰ}의 시상은 고향에다 정을 두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중형(重刑)을 목전에 두고 있음을 안타깝게 한다. 나막신과 대지팡이를 터벅터벅 짚고 동네 한 바퀴를 돌던 추억도 가슴을 찡하게 하며 강둑의 푸른 버드나무가 빗속에 즐비해 보인다로 연결시킨다. 이 모든 일이 어찌 금곡주와 같겠으며, 어찌 무릉도원을 배를 타고 찾는 것일까? 시인은 화자의 입을 빌어 여름의 진한 풍류에 인간이 다 취하고, 가을은 세상 일이 손님이 먼저 들기를 기다린다는 흥취(興趣)가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한 줌 시상은 고향을 그리는 시폭(詩幅)으로 덮어 내고 만다. 자연이 꾸미는 연기(演技)가 자신의 흥취를 충분하게 하면서 푸른 산과 흰 들 사이에 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다는 꿈과 상상으로 그려냈음을 알게 한다. 만약 화가로 하여금 상상하는 [이러한 경치를 묘사하게 한다면, 그 나무 안에서 지지배배 거리는 새소리를 어떻게 그릴까? 그리고 갈대꽃 위에 누구의 이름을 새길까?]를 더 깊이 상상해 내 보이는 시상이 넘칠 듯이 출렁거린다. 새가 우는 그림, 갈대꽃 위에 누구의 이름을 새길까는 궁리해 보이는 상상의 시상이 마냥 곱기만 하다. 눈 속에 들어가는 뒤의 글자마다 더욱 분명해질 것이니 이는 남자가 처음 한 맹세를 배반하지는 못하겠고, 오직 시적인 상상력이란 그림만으로 이를 넉넉하도록 했겠다.

내 혼령, 이제는 땅에 떨어지겠지
/ 중편(中篇{Ⅱ}) / 3연 19행
해동이 밝은 달은 선생님의 얼굴이요
북풍 맑은 곳은 처사가 있는 곳
붉은 꽃, 푸른 버들은 작년 봄과 같고
여름이 지나고 서늘함이 생기니 가을이 왔구나.

일어나서 머리와 얼굴을 가다듬으니
누가 나와 함께 여기에 있는가
누런 나뭇잎이 덮힌 사양길에
조금 전엔 작은 어느 가게에 있었는데
백운명월은 다시 공산에 떠있다
희미하게 생각나는 것은 전생의 꿈과 같은데
고요한 혼백은 죽지 않고 돌아올 수가 있었다.

나의 혼백만이 짧은 지팡이를 짚고 나의
살던 집을 찾아가니
부엌의 한 등불만 나와의 관계인 것이다
일보 일보 삼보 다가가서 서니
푸른 산과 흰들 사이사이에 꽃들이 피어 있다
불그레한 안방에 형기가 그치지 않았고
여인은 반은 교태를, 반은 부끄러움을 머금었다
내 죽은 뒤에 가만히 나를 생각하겠는가를 물으니
두 손을 모으고 금비녀 머리를 끄덕인다.

3연 19행으로 이어지는 중편(中篇{Ⅱ}의 시상은 해동(海東)에 밝은 달은 글을 가르쳐주신 환한 선생님의 얼굴이요, 그것은 북풍 맑은 곳은 처사가 있는 곳이라고 상상한다. 그것은 붉은 꽃, 푸른 버들만은 작년 봄과 같이 꽃을 피웠고, 금방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는 시간적인 탄력을 그려냈다. 화자는 혼자 중얼거린다. 뤼순 감옥에서 누웠다가 일어나서 머리와 얼굴을 곱게 가다듬으니 그 누가 나와 함께 여기에 있는가를 푸념해 보인다. 나뭇잎이 소복하게 덮힌 사양길에 작은 가게가 있었는데, 백운명월(白雲明月)이 공산에 떠있는 시적인 상상력이 곱다. 시적인 그림을 그린 화자는 희미하게 생각나는 것은 전생의 꿈과 같았겠는데, 고요한 혼백이 죽지 않고 돌아올 수가 있었다는 희미한 그림자를 그려내고 만다. 고향 땅 어귀에서 혼백이 살던 집을 추적추적 찾아갔더니만, 부엌의 한 등불만이 나와의 두터운 관계로 만나게 된다. 고향에서 기다리던 문생이 모친이다. 푸른 산과 흰들 사이에 꽃이 피어있었다. 안방에서 여인의 향기가 그치지 않았는데 [반은 교태를, 반은 부끄러움을 머금었다]는 묘사를 무릎을 칠만큼 보고파하며 임의 얼굴을 그려냈다. 두 사람이 묻는 대화의 한 장면이 가슴을 멈칫하게 한다. “내 죽은 뒤에 가만히 나를 생각하겠는가?”를 물었더니 [두 손을 모으고 금비녀 머리를 끄덕인다]는 상상을 한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대신 아내의 사랑과 공경심이 더욱 사무쳤던 모양이다.

내 혼령, 이제는 땅에 떨어지겠지
/ 하편(下篇) / 2연 13행
마음속에서 이별의 말은 계속되고
이별의 술잔이 손에 닿는 것이 더디기만하다
살아서는 오히려 생각하는 날이 있었는데
죽은 뒤에는 어찌 가는 때를 견디어 내겠는가
만난 인연이 오래오래 막혔다고 말하지 말아라
평생에 오히려 근심 속에 기약하는 것이었을 것이나
편지 한 장을 날려 천문에 도달하게 할수가 있어
나의 사정을 호소하면
그대로 혼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바른 마음을 속일까 보냐
판사 검사가 어찌 나의 속마음을 알까
원수는 갚았고, 곧 외로운 혼은 땅에 떨어진다.
=안중근『내 혼령, 이제는 땅에 떨어지
겠지(全): 10연 60행』
=순국직전 감옥에서 안중근 자음시(自吟
詩 : 안태평의 한문교본 대가법첩에 의함)

2연 13행으로 이어진 시적인 그림 한 폭을 하편(下篇)시상으로 일군다. 시인은 마지막 헤어짐이란 이별이 잠수사가 잠맥하는 모양을 상상해 보인다. 마음속 이별의 말은 계속되고 촉촉한 이별의 술잔이 손에 닿는 것이 그렇게 떨리면서 더디었음으로 맞는다. 부부로 만나 살아서는 오히려 더 생각하는 날이 있었는데, 죽은 뒤에는 어찌 오고감의 만나는 때를 견디겠는가를 귀에 대고 은근히 묻는다. 이런 점을 감안한 시인은 만난 인연을 더 곱게 치장해 보인다. 그래서 시인은 [만난 인연이 오래오래 막혔다고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평생의 근심 속에 기약하는 것이었을 것이나, 편지 한 장을 날려 천문에 도달하게 할 수가 있어서 그 사랑의 호소가 그대로 혼미하지는 않을 것이다]는 토닥거린 안정감으로 되돌려 보낸다. 날이 새면 교수형에 처할 것이라는 체념(諦念)을 깊숙하게 담아냈다. 안중근보다 1살 많은 부인 김아려(김마리아, 1878∼1946)는 일제에 타격을 준 항일 유족으로 그 삶은 평탄치 않았다. 안중근과 김 여사 사이에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안중근의 의거 이후 가족들은 늘 죽음을 넘나드는 위험에 처했고, 가난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고 전한다. 안중근 가족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연해주 꼬르지포에 10여리 떨어진 조선인 마을 목릉 팔면통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런데 1911년 여름 7살 맏아들 안문생(분도)이 낯선 사람이 주는 과자를 먹고 죽었다. 가족은 입을 모아 일제가 저지른 일이라 생각했다.
김아려 여사는 그리움에 지친 나머지 부부의 이별을 미리 짐작할 수야 있지 않겠는가. 남자가 차라리 비열하게 죽을지언정 바른 마음은 속일까 보냐?]고 투덜거리면서 ‘이토 히로부미’라는 우리의 원한을 이제 갚았으니 날이 밝으면 외로운 나의 혼과 육신이 함께 땅에 떨어질 것이라는 진단해 보이면서 넉넉한 마음을 담아 교수형대로 발길을 옮겼을 것이다. 그리고 한을 담은 명운을 다했다.

큰 웃음 한 토막이 창파를 건너겠지/ 안중근
안중근이 2월의 차가운 날씨를 극복하고 동양평화론을 집필할 수 있는 탁월한 실력은 높이 사야겠다. 사략 등을 두루 섭렵한 관계로 유묵(遺墨)은 상당하지만 그에 비하여 한시는 많지 않다. 7언 절구가 몇 편이 있고, 율시는 두어 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사내대장부가 집안일을 그만 두고 의병으로서 그 책무를 다하겠다는 의지를 품고 자음시(自吟詩)를 읊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닌지는 모르겠다. 큰 웃음 한 토막을 담아 여기면서 읊었던 율시 한 수를 감상한다.

東南風雨釰塵斜  (동남풍우일진사)
爲國男兒不顧家  (위국남아불고가)
擇鳥尙知前日本  (택조상지전일본)
穉蝴不待後春花  (치호부대후춘화)
有文如子無文可  (유문여자무문가)
得志其人失志多  (득지기인실지다)
死地圖生生亦死  (사지도생생역사)
出門一笑渡滄波  (출문일소도창파)

동남쪽 풍우에 오래된 칼에 먼지가 비꼈는데
남아가 나라 위해서 가정을 돌볼 시간이 없네
새를 택하였던 일본을 예전부터 더 잘 알지만
어린 나비를 기다리지 않아도 봄꽃 곱게 피네
유문이 비록 좋다 해도 옳은 문장은 없으리니
뜻을 이루었던 그 사람 많이들 낙담을 했겠지
사지에서 살기를 도모해서 살아도 죽음 일지니
문을 열면 한번 친 큰 웃음이 창파를 건너겠지.

화자는 비유법의 달인이나 되는 것처럼 자기 자랑에 여념이 없다. 승구에서 새를 택하였던 일본을 예전부터 더 잘 알고 있겠지만, 어린 나비를 기다리지도 않았던 봄꽃이 곱게 피어 있다는 푸념들이 그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택조(擇鳥)를 재촉하고 봄꽃은 어린 나비(穉蝴)를 어서 빨리 오라는 듯이 회초리를 들면서 재촉한다. 다시 이어진 전구에서는 불교의 사문 중 하나라고 알려지고 있는 유문(有門)의 토실토실함을 그 예로 들고 있다. 옥에 갇힌 춘향이가 죽음을 앞두고 이몽룡에게 남기는 유서 형식의 작품으로 월매, 향단과 함께 감옥을 찾아간 이 도령이 춘향을 상봉하는 장면을 모티프로 삼았겠다. 사랑은 인간의 영원한 시적 주제이며, 대부분의 시인들에게 있어서 춘향은 시대를 초월한 사랑의 화신으로서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흔히들 유문(有門)은 생(生)이며, 공문(空門)은 사(死)라고도 가르치고 있어서 많이들 주목되기도 한다.
시인은 다시 이와 같은 점을 감안하여 “일본 그까짓 것”하면서 낮잡아 보이는 듯한 눈치를 보낸다. 죽을 곳(死地)에서 살기를 도모해서 살아난다 하더라도 반드시 죽음이 기다릴 것이니, 문을 열면서 한번 친 큰 웃음이 창파를 건너겠다는 자신만만함을 보인다. 이만큼 충만 된 기백이 있었기에 북간도는 물론 연해주를 넘나들며 [일본 괴멸(壞滅)]을 다짐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위 율시(律詩)를 순수한 우리 노래로 번안하여 창(‘昌’ 혹은 ‘正歌’라고도 함)을 읊기가 쉽거나, 대중가요(大衆歌謠)로 번안하여 부르기 쉽게 3수 연시조로 개작해보면 다음과 같다. 평자는 이와 같은 작업을 [번안시조]라고 이름을 붙여서 일간지 신문이나 주간지 지역신문에도 계속하여 연재하면서 보급의 끈을 조금도 놓지 않고 있다. 이는 한시의 오묘한 맥이 끊어졌음을 통회하면서 후진들을 위해서 보급하고 있어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풍류를 한 줌 담은 번안시조(1)≫

봄꽃이 저리 곱게 피었네 // 원작 한시
안중근 / 시조 장희구
【1절】
동남쪽 오랜 풍우 칼 먼지에 비켜섰고
남아(男兒)가 나라 걱정 가정일 어찌하랴
유문(有門)이 좋다고 하나 바른 문장 없다오

【2절】
고운 뜻 이루리라 낙담한 선비 많아
사지(死地)에 살았던 일 무엇으로 도모하랴
나비를 기다리지 못한 봄꽃 곱게 피었네

【후렴】
뜻 이룬 그 사람들 정(情) 울려 낙담 가득
살기를 도모하랴 살았지만 죽음일 뿐
큰 웃음 창파를 타고 여유롭게 건너네.

시어로 보이는 유문(有門)은 정(情)을 나누는 인간만이 가능하다는 엄연한 소회를 피력하며 보이는 듯하다. 그래서 그랬을까? 하늘과 땅에는 문이 없는데, 인간에게 문이 있다고 했으며(天地無門 人間有門), 부처에게는 문이 없는데, 중생에게 문이 있다(佛無門 衆生有門)고 설파했다. 유문의 존재는 인간에게만 있다는 실증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외롭게 놓여있는 조국의 운명 앞에 도마 응칠 장군은 큰 웃음이라도 껄껄 한판 치면서 집을 나서는 여유로운 기침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 듯하다. 정녕 그랬으리라.
봄꽃이 곱게 피는 봄날을 재촉하는 시적인 정서가 곱게 용솟음치고 있는 것만 같다. 이 시의 흐름으로 보아 아마 황해 신천군 두라면의 청계동의 출발점이다. 태어날 때 배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던 이름이다.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 보다는 [안응칠 역사]는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위의 시는 어린 시절을 청계동의 산골 마을에서 보내게 되었다. 7~8세가 되면서 할아버지의 각별한 배려로 한문 수업을 받았는데 이후 10여년간의 수학을 통해 유교경전과 조선역사에 관한 서적을 두루 섭렵했다. 그러나 소년시절 학문정진에만 힘썼던 것은 아니다. 틈나는 대로 산을 타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고, 활쏘기나 말 타기와 사냥에도 깊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당시 청계동 집에는 여러 명의 포수들이 기식(寄食)하고 있었는데, 포수들을 따라다니며 사냥이나 사격술을 넉넉하게 익혔다.
12세 무렵에는 말 타기와 활 쏘는 솜씨가 묘기를 부릴 만큼 능숙하였고, 15~6세가 되어서는 명사수(名射手)로 그 이름을 날릴 정도였다. 이만큼 한 실력을 담아 만주의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여지없이 저격하여 명중을 할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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