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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탐방(1)/ 김규정/한학자霽月堂 敬軒大師 碑銘/(제월당 경헌대사 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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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2.19  12: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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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구한 역사에서 남도는 풍요로운 산수만큼이나 걸출한 인걸들이 많았습니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문헌들을 끄집어내어 여러 인물과 고을을 안내하려 합니다.
낯설고 생소한 기사들이 있겠지만 관심을 갖고 행간을 따라 가다보면 유익한 정보도 얻게 될 것입니다.
치밀한 고증으로 1차 자료를 분석 가공해 인문의 지평을 확장해 보겠습니다.
무리한 추론과 상상력을 배제하고 구태의연한 얘기로 순환 반복되고 자주 언급되었던 내용들은 탈피하겠습니다.
남주를 유람했던 나그네와 운수납자와 이 땅에 터 잡고 살았던 선인들을 소개합니다.
장흥신문 애독자들께서는 끝까지 저의 붓끝의 행방에 주의를 기울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규정(金圭錠)/한학자

   
 

-본적 : 전남 장흥군 용산면 금곡 길51
-생년월일 : 1959년 4월 16일
-최종학력 : 인하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한국화학시험연구원 한국품질환경인증센터 전문위원 역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언론학교 제1기 졸업
-탐진포럼 부회장 역임
-전통문화연구회에서 한문수학.
-편저 : 금곡유문집, 장녕시문, 천보사문, 지헌문집.
 

●霽月堂敬軒大師碑銘 幷序
 (제월당경헌대사비명 병서)
-樂全堂(낙전당) 申翊聖(신익성)(1588~1644)

我東之有佛法昉於羅而盛於麗入本朝文敎休明稍闢而絀之而宗風不泯祖派相禪至淸虛堂休靜大師受法於靈觀實紹中國臨濟之統也八方比丘奔走聽講會上恒數十百人久之其弟子之行滿德充者各自分門受徒而有敬軒者以戒律禪解尤著於山門而法臘最久其示寂也多靈異之跡其門人道一曇元等精心處禱涉旬匪懈後先得舍利珠五粒分厝于寶蓋山之深源寺金剛山之表訓寺支提山之天冠寺大海山之妙喜庵竝建石鍾以安之道一輩記軒公事行丐銘於余凡再往返而始屬筆爲敍曰敬軒法名號虛閑居士署其居曰霽月堂俗姓曹氏湖南人母李夢一梵僧覺而有娠以嘉靖甲辰正月十四日生骨法奇秀性靈脫凡在孩提作佛事爲戲嬉十歲失怙恃十五入天冠山從玉珠禪師祝髮遍讀子史通古今事物之理喟然歎曰此世法也非出世法也非謁圓哲大師尋參玄雲中德涉盡群經淹貫三藏之敎又從煕悅割斷疑網萬曆丙子策杖赴西山道場聞西來密旨言下大悟無有滯礙戊寅投金剛內院洞塞兌內觀却飮啗株坐者逾年廓然有所得自是人有叩者以都序節要決擇之禪要書狀參證之操縱在握變通在機入門者莫不虛往而實歸焉壬辰之亂淸虛募僧徒倡義殲賊宣廟授沙門左營將師暫詣軍門遽辭去宣廟高其節特拜判禪敎兩宗事師讓而不受曰萬里長江水惡名洗不去遂晦迹韜光深居不出學者雲集師乃遐遁或之楓嶽或之五臺或之雉嶽或之寶蓋最喜楓嶽搆庵于隱仚洞結七夏癸亥春忽欲出山有止之者書一絶示之曰好在金剛山長靑不起雲簞瓢宜早去風雪夜應紛移錫于五臺其後師言果驗崇禎壬申自雉嶽輿還寶蓋曰此有緣之山也未幾微感示倦門人強請留偈輒譍曰泥牛入海杳茫然了達三生一大緣何事更生煩惱念也來齋閣乞陳篇翛然而化癸酉臘月二十六日也是夜祥光燭天彬栝變白灌骨之夕暴風拔樹電雹交轟飛禽墮落走獸悲吼與會者無不摧驚嘆慕以爲稀有之異事云余昔東遊與法堅應祥彥機性淨諸禪宿論近世老德皆以軒公爲宗南僧覺性太能亦極推伏一國空門之論蓋無間然矣噫若師者生於羅麗必不免國師王師之稱 耀於一時而乃遭右文之世逃身於荒寂之境能成其道遂使其徒誦義不衰與夸耀一時者論其失得亦有辨矣銘曰
而睽於人而合於天而恒而行萬古常鮮
출전 ‘樂全堂稿’卷之十二

●제월당 경헌 대사 비명 서문을 아울러 쓴다.
우리 해동에 불법이 있었으니 신라에서 처음 일어나 고려에서 성대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문교가 아름답게 밝혀져 차츰 불교를 멀리하고 배척했다. 그러나 종풍은 민몰되지 않고 종맥은 서로 교체되어 청허당 휴정대사에 이르러 부용영관에게서 법을 받았으니 실제로는 중국 임제종의 법통을 계승했다.
팔방 비구들이 분주하게 청강하였으니 회상에는 항상 수십 백인이 모여 들었다. 세월이 지나자 그 제자들의 행실이 원만하고 몸에 덕이 충만한 사문들은 각자 종문이 나뉘어져 무리를 이루었다.
경헌 납자가 있었는데 산문에서 계율과 선학의 이해는 더욱 현저했고 법랍은 가장 오래되었다. 그가 입적할 때 신령한 자취를 많이 드러내자 그의 문인 도일ㆍ담원 등이 정심 처에서 기도를 하며 열흘이 넘어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전후로 사리 구슬 오과를 수습해 보개산 심원사ㆍ금강산 표훈사 ㆍ지제산(천관산) 천관사ㆍ대해산 묘희암에 나누어 모시고 아울러 부도 탑을 세워 안치했다.
도일의 무리가 경헌 공의 행장을 기록하여 내게 명을 지어 달라고 대략 두 번 왕래하며 부탁했다.
비로소 붓을 잡고 서문을 짓기를, 법명은 경헌이고 호는 허한 거사이다. 그가 거처하는 곳을 “제월당”이라 쓰고 편액을 내걸었다. 속성은 조씨이고 호남인이다. 어머니 이씨가 한 범승의 꿈을 꾸었는데 깨자마자 임신했다. 가정 갑진년(중종39년1544) 1월 14일에 태어났다. 골격이 기이하고 빼어나 성령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다. 어릴 때는 불사를 하며 장난치고 놀았으나 열 살 때는 어버이를 여읜 슬픔으로 열다섯에 천관산으로 들어갔다.
옥주선사를 모셔 머리를 깎고 경전과 제자백가서 사기를 두루 읽어 고금 사물의 이치에 통달했다. 한숨 쉬며 탄식해 말하기를 “이것은 속세의 법이지 출세간의 법은 아니다.”하고 말하며 자주 원철대사를 알현하고는 이어서 현운과 중덕을 찾아가 배우면서 다수의 경전을 모두 섭렵하니 대장경의 가르침에 널리 통달하게 되었다.
또 희(熈)와 열(悅) 두 교사(敎師)와 종유하며 의심의 그물을 끊었다.
만력 병자년(선조9년1576) 지팡이를 짚고 서산대사의 도량에 이르러 달마가 서쪽에서 온 밀지를 듣고서 말이 떨어지자마자 단박에 크게 깨달았으니 조금도 걸림이 없었다.
무인년(선조11년1578) 금강산 내원동에 들어가 묵언묵상하며 나무 밑에 정좌하고서 마시고 먹고 하는 것도 자주 물리치다 한해가 저물어 가자 확연히 깨달아 얻은 바가 있었으니 이때로부터 의심 처를 묻는 운수납자들이 문을 두드렸다.
규봉 종밀의 ‘도서’와 보조지눌의 ‘절요’로 방향을 결택하게 하고 고봉선사의 ‘선요’와 대혜종고의 ‘서장’의 진리를 참선으로 증득케 했다.
학인들을 조종하는 것은 대사의 손아귀에 있었고 변통하는 도리는 학인들의 근기에 따랐으니 입문한 자들은 모두 그저 아무것도 없는 채로 왔다가 꽉 차게 실리를 얻어서 돌아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임진왜란 때(선조25년1592)는 청허대사(서산대사)가 승도들을 모집하자 창의하여 왜적을 섬멸하니 선조는 승병 좌 영장을 제수했다. 대사는 잠시 군문에 나아갔으나 그만 사직하고 돌아갔다. 선조는 그의 절개를 높이 여겨 선교양종 판사에 특배하였다.
대사는 사양하며 수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만 리 장강의 물로도 오명을 씻어 버릴 수는 없습니다.”하고 마침내 자취를 숨기고 빛을 감추며 깊은 산에 살면서 나오지 않았으니 배우려고 하는 자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대사는 이에 한가하게 살려고 혹은 풍악산에 혹은 오대산에 혹은 치악산에 혹은 보개산에 들어갔으나 가장 즐거운 곳은 풍악산이었다.
은선 동천에 암자를 마련해 참선하며 하안거 결제를 일곱 번이나 마쳤다.
계해년(인조원년1623) 봄에 갑자기 산을 나가고자하니 말리는 납승이 있자 절구 한 수를 지어 보여주며 말하기를 “아름다운 금강산에 있으니 구름도 일지 않고 오래도록 푸르기만 하구나. 단표의 즐거움도 일찍 떠나야 마땅하니 밤에는 눈보라도 응당 어지럽게 흩날리리라.” 하고 오대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대사의 말이 과연 징험이 있었는지 숭정 임신년(인조10년1632) 치악산으로부터 보개산으로 수레를 타고 돌아와 말하기를, “여기는 인연이 있는 산이다.”하고 얼마 되지 아니하여 대수롭지 않게 자리에 누우시자 문인들이 억지로 임종 게를 남길 것을 요청하자 즉시로 화답하기를 “진흙소가 바다로 들어가니 아득하구나. 삼생의 일대 인연을 환하게 깨달았으니 무슨 일로 다시 번뇌 망상 일겠는가. 또 서재에 와서 묶은 책을 구함이로다.”하고 훌쩍 떠나가셨다.
계유년(인조11년1633) 납월(12월) 26일이다.
이날 밤 상서로운 빛이 하늘에서 비추니 향나무는 문채가 나면서 하얗게 변하고 법구를 다비하는 저녁에는 폭풍우에 나무가 송두리째 뽑히고 우르릉 쾅쾅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쳤다. 날아가는 새도 추락하고 달리는 산짐승도 슬피 울부짖었다.
모였던 대중들은 오장이 끊어질듯이 놀라면서 탄식해 흠모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드물게 경이로운 일이 있었다고 말하니 옛날에 내가 동쪽을 유람할 적에 법견ㆍ응상ㆍ언기ㆍ성정 여러 선승들과 요즘 산문 노덕을 말할 때면 모두 경헌 공을 으뜸으로 여겼다.
남쪽 승려 벽암 각성과 소요 태능도 모두 추복하였으니 온 나라 불문의 논의는 전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아, 대사 같은 분이 신라나 고려에서 태어났다면 반드시 국사나 왕사로 부름을 받았을 것이다. 한 시대를 용동시킨 광채는 바로 유학을 숭상하는 세상을 만나서 궁황 적막한 지대에 몸을 피하였어도 능히 자기의 도를 이루었으니 그 문도들로 하여금 대사의 대의를 말하게 하며 미약하여지지 않게 하려고 한다. 당대를 과시한 분들과 그 득실을 논해도 역시 변별할 점이 있을 것이다. 갈명(碣銘)에 이르기를, “세속 등지고서 천도와 합치됐구나. 변함없는 수행은  만고에 항상 빛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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