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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방촌마을 이야기<3>문화탐방/栢江 위성록 이야기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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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09  16:4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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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5. 계춘동 동계(桂春洞 洞契)
계춘동은 내동 마을길과 연결되어 상잠산과 다산등(嶝)의 연결지맥 아래 약간 깊숙한 곳에 위치한다. 마을의 주거 형성 과정은 1600초년 안항(顔巷) 위덕후의 차자이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웅천현감을 지낸 위정렬(1580~1656)이 내동에서 분가하면서 처음의 터를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존재 고택

관산읍 방촌길 91-32에 위치한 존재고택(存齋古宅)은 내동 근암고택과 비슷한 시기(1649년경)에 위정렬이 신축하여 후손에게 전해 내려왔다. 公은 임진왜란 후 1603년 4촌 아우 정철과 함께 고금도에서 실시된 무과에 급제하고 사도진관 녹도수군만호, 웅천현감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웅천현감으로 재임 때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남한산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인조의 항복으로 관직에 뜻을 접고 고향 방촌에서 여생을 보냈다. 존재 위백규(1728~1798) 선생은 公의 4대손 이다. 고택은 안채, 사당, 사랑채, 헛간채, 대문채, 연못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의 안채는 서남향으로 1937년(丁丑) 신축하였다. 안채 뒤쪽 우측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4대 신주를 모신 사당이 위치한다. 사랑채는 영이재 위문덕(1704~1784) 선생과 존재 위백규 선생이 기거하였던 서재로 안채 우측 한쪽에 위치하며, 건물은 1775년(乙未)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헛간채는 안채 좌측에 위치한다. 101세의 고령인 11대 종부(수원백씨)가 안채에서 생활이 어려워 개수하여 기거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문 앞 우측에는 연못 옥련정이 있다. 연못 앞으로 실개울이 흘러서 집 동쪽을 휘감아 돈다.
지난날 존재 선생이 서재에서 글공부를 하던 중, 개구리 울음소리에 지장이 있어 하루 저녁에는 시끄럽다고 부적(符籍)을 써서 연못에 넣으니 그때부터 연못에서 개구리 울음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고 전한다. 집 뒤에는 동백나무 숲이 남녘의 정취를 더한다. 선생은 1796년(丙辰) 정조대왕에게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리고 옥과현감에 제수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만언봉사에 대한 정조대왕 비답   ▲만언봉사에 대한 정조대왕 비답 

정현신보(政絃新報), 환영지(寰瀛誌) 등 실학 저서 90여권을 남겨 오늘날 학문사상 연구 등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고택은 1984년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당시 명칭은 ‘장흥위계환가옥(長興魏桂煥家屋)’이었으나, 선생의 호를 따라 2007년 1월 29일 “장흥 존재고택”으로 지정 명칭을 변경하였다. 주변 가옥들 중에는 1700년 중엽 후반에 위경호의 터와 위성룡 가옥 터를 중심으로 점차 마을이 형성됨을 볼 수 있다. 계춘동 마을에는 존재고택과 더불어 죽헌고택이 자리 잡고 있어 마을의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죽헌 고택

죽헌고택은 관산읍 방촌길 101에 위치한다. 죽헌(竹軒) 위계창(1861~1943)이 살았던 집으로 사랑채, 안채, 사당, 곳간채, 대문채로 이루어져 경관이 뛰어나고 내부 구조가 원래대로 보존되어 1986년 2월7일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6호로 지정되었다.

사랑채는 1919년(己未) 위계창이 신축하였다. 5칸 겹집으로 앞면에 차양용 처마를 덧달았으며, 사랑채에서 안채를 볼 수 없게 담장을 쌓아 내ㆍ외 생활을 구분하였다. 마루에는 당시 대학자로 한말 의병활동을 펼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 1845~1910)의 기문(記文) 편액과 소파(小波) 송명회(1872~1953)와 설주(雪舟) 송운회(1874~1965) 형제가 쓴 당호(堂號) 편액 등이 걸려 있어 교유의 폭을 엿볼 수 있다. 뜰아래에는 잘 꾸며진 정원과 연못이 있고 천관산이 한 눈에 보여 시음(詩吟)이 절로난다.

지금의 안채는 1946년(丙戌) 위계창의 아들 위대량(1884~1951)이 6칸으로 신축하였다. 대문에서 안채로 들어오는 공간은 층층의 돌계단으로 조성하여 자연미를 더하고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이 있고 부엌과 작은방이 있으며, 뒤편에는 적벽돌로 높이 쌓은 굴뚝이 있다. 안채 오른쪽에는 사당이 위치하며 4대 신주(神主)를 모시고 있다. 대문채는 1963년 해체하여 천관사 칠성당(七星堂)에 옮겨지어 현존하지 않는다. 계은(桂隱) 위대량은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으로 1930~1937년 고읍면장 재임 중에 소재지 옥당리 시가지를 개설하고, 송촌리 대평마을 앞 간척사업을 추진하여 300두락의 농토를 조성하였다. 1939년 장흥향교 전교를 지냈고 개인 논 110여 두락을 문중에 희사하는 등 지역과 문중 발전에 공헌하였다.
고택은 죽헌 선생의 증손 위성룡(1938년생)이 소유하고 있다. 그는 1960년대 초 박정희 정부 때 경제기획원 공무원에 몸담아 재직하면서 필리핀 대사관과 미국 대사관 파견, 총무국장, 경제담당 협력관, 아시아개발은행 이사 등 요직을 지냈다. 퇴직 후에는 한국보증보험 초대 사장으로 발탁되었다. 특히 경제기획원 초기 근무시 정부 지원으로 독일 유학을 다녀와 독일어에 능통하였다. 1966~1977년간 경제개발 일환에서 추진한 독일 광부, 간호원 파견과 외화 차관 업무에 깊숙히 관여, 담당하여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아들 위구연(1972년생)은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교 전자공학 석좌 교수이다. 저전력·고성능·인공지능 프로세서 분야의 세계적 석학 중 한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2019년 삼성전자에서는 위구연을 펠로우(Fellow)로 영입하였다. 펠로우(Fellow)란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한 전문가에 부여하는 회사의 연구 분야 최고직이다.

   
 

계춘동 마을은 내동 마을과 같이 지형에 따라 일부 남향(南向)이고, 대체적으로 천관산을 마주하는 서향(西向)이다. 계춘동 마을의 동계 조직을 알 수 있는 “계춘동 동계안(桂春洞 洞契案)” 문서가 있다. 계춘동은 “맑은 샘과 골짜기가 아름답고 연못과 정원의 화초가 늘상 피어 있어 마을 사람 위세보(1669~1707) 선생은 詩·書·畵 3절(絶)로 스스로 즐기며 살았다”고 전한다. 또한 계수나무 골에 부는 봄바람은 항상 훈훈함의 표현을 “계동춘풍(桂洞春風)”이라고 하며 방촌8경 중, 제2경에 해당된다.

마을 뒤 성잠산 자락 송현마을로 가는 길목, 관산읍 방촌길 111-103에 다산사(茶山祠)가 위치한다.

   
▲다산재

이곳은 삼족당 위세보 선생이 타계하자 아들인 영이재 위문덕 선생이 시묘살이 하는 곳을 석류헌(錫類軒)이라 하여 묘각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1784년(甲辰) 존재 위백규 선생이 다산재(茶山齋)를 창건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선생의 증손 위경곤(1812~1864)은 다산재를 지금의 자리에 옮겨 신축하였다. 1950년(庚寅) 6대손 위필량(1895~1964)과 산음(山陰) 위근(1883~1971)이 중수하였다. 중수에는 탑동 거주 대목장(大木匠) 염병일(1905~1982)이 참여했다. 이곳은 웅천종중의 묘각으로 활용하면서 한편으로 1970년대 중반까지 다초(茶樵) 위복량(1897~1979) 선생 등이 후손들을 강학한 장소이기도 하다. 2002년(壬午) 관리사의 과실로 재당(齋堂)이 전소된 후 후손들의 헌성 참여와 장흥군청의 재정 지원을 받아 2003년(癸未) 신축하고 경내에 묘정비(廟庭碑)를 근수(謹竪)하였다. 묘각 뒤 우측에는 존재 위백규 선생 등 선조 묘소가 위치한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매년 음 10월 2일 음통덕랑 위동식(1640~1708) 등 이하의 선조 17위의 가을 시제를 모신다.
1902년(壬寅) 장흥의 유림들은 존재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서재 위쪽에 단(壇)을 세웠다. 이후 1984년(甲子) 다산사(茶山祠)를 건립하고 존재 선생을 주벽으로 배향했다.

   
▲다산사

2003년(癸未) 서계 위백순(1737~1815), 죽오 위도한(1763~1830), 다암 위영복(1832~1884)을 추배하여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매년 陰 3월 15일 제향한다.
현재 행정상 방촌리 3반으로 경계 범위는 내동 방향에서 첫번째 위점환님 가옥부터 송현마을과 경계하는 다산재(茶山齋)까지 포함하고 있다. 지난날에는 존재고택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우대미” 죽헌고택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아대미”라고 불렀다. 마을 동계에서는 2000년 以前까지 4반 새터 동계와 공동하여 주민 임종(臨終)시 장례(葬禮)를 주관하는 부상계(賻喪契)가 있었다. 현재 15호가 거주하고 있으며, 유사 1인이 동계(洞契) 일을 보고 있다. 현 보유 재원은 일정액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6. 새터 동계(新基 洞契)
천관산 기슭인 서쪽에서 바라볼 때 동쪽의 마을은 전체적으로 한마을 群으로 보이고 실제 마을구조의 혈관이라 할 수 있는 마을 안길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새터 마을은 내동, 계춘동과 달리 집촌(集村)으로 형성되지 않고 3개群 정도로 흩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방촌 동쪽에 마지막으로 조성된 마을이라 새터라고 부른다.
 1721년(辛丑) 상원군수 위동전(1649~1713)의 三子, 간암(艮菴) 위세옥(1689~1766) 선생은 33세 때 한양 생활을 청산하고 부친(父親)의 고향이자 두 형이 살고 있는 방촌에 입촌하였다. 새터마을 남쪽 뜸에서 일정기간 거주하다가 대덕읍 초당으로 옮겼다. 이를 뒷받침 하는 간암정 터는 현재 위관철 가옥 일대로 “가남쟁이”란 지명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훈도공 위방(1532~1593)의 7대손 위도흠(1763~1858)이 선대부터 200여년 동안 거주했던 고흥군 국도(國島 현재 외나라도)생활을 청산하고 1780후반 년에 방촌으로 돌아와 현재의 위인환 거주 터에 정착하였다. 이후 후손들은 주변 지역으로 분가하여 주요 터전이 되었다. 위세량 가옥 터는 장흥위씨가 아닌 타성의 주거지이며, 마을 삼괴정 앞 야산 터안과 송치등(嶝)에는 도강김씨가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를 뒷받침 하듯 지난날 밭에서 기와장이 일부 발굴되었다.

   
 ▲신와고택

다산재로 가는 길목 좌측, 관산읍 방촌길 111-17에 신와고택(新窩古宅)이 위치한다. 이 고택은 1800년대 중엽 위재경의 6대조부 위영형(1808~1855)이 터를 잡아 조성하였다. 이후 중건한 신와 위준식의 호를 따라 “장흥 신와고택”으로 명명하였다. 서향(西向)으로 건물은 안채, 사당 등 6동이 들어서 있다. 안채는 1950년(庚寅)에 신축하였다. 가옥의 역사와 내력, 반가(班家)로서의 건물구성, 각 건물의 건축내용 등에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2년 11월 27일 전라남도민속자료 제39호로 지정(장흥 위봉환 가옥)되었다가 2012년 4월 13일 국가민속문화재 제269호로 승격 지정되면서 명칭도 장흥 신와고택으로 변경되었다. 지난날 고택 뒤쪽에는 7~8호가 거주하였다. 이중에는 부산으로 이사하여 갖은 노력으로 흥우산업(株)을 창업한 사업가 우원(友垣) 이득배(인천人 1934~1985)가 태어나 14세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는 관산지역 후진양성을 위해 장학사업을 펼치고 모교인 관산국민학교 등 지역기관에 앞장서 희사하여 고향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한 재부향우회를 조직하고 3번 향우회장을 맡아 향우들의 단합과 고향사랑을 몸소 앞장서 실천하면서 부산지역 정계, 경제인 등과 친분을 쌓고 교류하여 지역감정 해소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마을 앞에는 삼괴정(三槐亭) 이라는 고인돌 20여기 群이 있다. 고려 회주목(懷州牧) 때 명기(名妓) 옥경과 명월이가 느티나무 3그루를 심었다하여 여기정(女妓亭)이라 불렀는데 연재(淵齋) 송병선 선생이 1898년 3월 30일 이곳을 찾아 “삼괴정(三槐亭)”이라 명명하고 제일 큰 바위에 새겨 놓았다.

   
 

사진속 바위 三槐亭 중, 괴(槐)자를 살펴보면 나라 위자(魏)와 같이 뒷부분 귀신 귀(鬼)의 위부분 점을 떼고 하단 부분을 엎어 써 장흥 일원에서 쓰고 있는 위자와 유사한 형태의 글자로 고인돌에 남겨져 있다. 원래에는 느티나무 3그루가 있었으나, 이후에 2그루는 태풍에 쓰러지고 말라 고사하였다. 가지에 잎이 무성하게 피면 풍년이 들고 세력이 약하게 피면 흉년이 든다고 전한다. 수령(樹齡)은 700년이 넘어 전라남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완도군 금당도가 쉽게 조망되어 선대에서는 수창(酬唱)과 풍류를 즐겨 방촌8경 중, 조그만 돛을 단 조각배가 금당도로 돌아가는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으로 제8경에 해당된 “금당귀범(金塘歸帆)”이라고 한다. 또한 이곳은 여름철 휴식이나 회의 장소로 이용되면서 마을 청년들의 힘겨루기에 사용된 "들독" 이 지금도 놓여 있어 농경문화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새터 마을은 행정상 방촌리 4반에 해당된다. 경계 범위는 서쪽으로는 범산 앞 개천 넘어서 위두량 거주지부터 해당된다. 동쪽으로는 다산재 길목 동산등(嶝)까지이며, 남쪽은 위관철 거주 아래 비랫등(嶝)까지 해당된다.
“동산제월(東山霽月)”은 장천재에서 봤을 때 동산 위로 솟아오르는 달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으로 방촌8경 중, 제1경에 해당한다. 동계는 동산제(東山祭)를 주관한 사제계(社祭禊)를 중심으로 운영해왔으며, 신기 동계안(新基 洞契案)과 사제계 문서가 현존한다.
 당시에는 마을에 30호 이상 거주하여 자연스럽게 동계도 활성화 되어 유지해왔다. 2000년 이전에는 계춘동 동계와 부상계(賻喪契)를 공동으로 운영하여 장례(葬禮)를 주관하였다. 이후 거주민의 고령화로 13호로 줄어들어 2013년 동계를 파(破)해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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