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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방촌마을 이야기<2>문화탐방/栢江 위성록 이야기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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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03  11:4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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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4. 내동 동계(內洞 洞契)

행정상 방촌리 1반은 등밭(嶝田), 객사골, 근래 개발로 입촌한 벅수골 지역(천관식당, 천관모텔 등), 동산밑, 윗골 지역이 해당된다. 방촌리 2반은 내동 지역이다. 총 40호이나, 일부 고령 거주민이 집을 비우고 병원 또는 도시 자녀의 집에서 거주하는 사례가 있어 실제 30호 가량이 거주한다. 지금의 천관식당과 천관모텔이 위치한 지역을 벅수골 이라고 한다. 이곳부터 행정상 번지가 방촌리에 해당한다.

   
 

고려 회주목 때 치소 동헌의 북문동(北門洞)과 둔군동(屯軍洞)이란 지명이 지금도 전해져 불리고 있다. 석장승 진서대장군은 2013년 6월 17일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75호로 지정되었다. 벅수골에서 나지막한 고개 길을 넘으면 우측, 관산읍 장흥대로 1645에 방촌유물전시관이 위치한다.

   
 

이곳은 방촌마을 내 후손 자택에서 소장해온 교지, 유고문집 등 선조 유물의 도난과 자연적 훼손 방지, 체계적 홍보 등 문화 관광사업 일환으로 정부의 4,300,000,000원 지원금을 들여 2005년 9월 6일 개관하였다. 현재 1,048점의 선대 유물이 소장 전시되고 있다. 유물전시관 전면에는 호조판서 위덕화(1551~1598)의 신도비가 위치한다.
公은 1585년(선조 18년)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의주(義州)로 피난 중인 선조(宣祖)를 호위하고, 혁혁한 전공을 세워 군자감정 겸 언양현감, 훈련원정에 제수되었다. 1605년 호성ㆍ선무공신에 훈록되고 아들 병조참판 위정철의 정사ㆍ진무공훈, 후금 회답사 사행 등을 감안하여 1631년 8월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도로 건너편에는 전라남도 지정 기념물 제134호 방촌리 지석묘군이 위치한다.

   
 

이곳의 90여기의 지석묘를 포함하여 방촌마을 내에는 380여기가 산재한다. 지석묘가 집단적으로 분포함은 청동기시대에 이 지역이 중요한 지배층의 생활터전 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국도 23호선(장흥대로) 현 방촌리 사거리 주변 일대를 “객사골” 이라고 한다. 이는 고려 회주목(장흥부) 때 객사동(客舍洞)이 위치해 유래된 지명이다.
주변에는 장흥위씨 세장비와 장흥향교의 천장(薦狀)을 받아 세운 위신식(1862~1890)의 配 효열부 여산송씨 행적비, 위계일(1880~1908)의 配 효열부 선산김씨의 비가 위치한다.

- 등밭(嶝田)은 지금의 내동마을의 일부이나 내동 앞쪽으로 나지막한 줄기가 사장등(嶝)에서부터 남쪽으로 뱀처럼 길게 뻗어 있다. 수등 들판을 앞에 두고 건너편 남쪽 복와등(伏蛙嶝)과 대치하고 있는 형국(形局)이다. 여기에는 복와가 성(盛)하면 등전이 쇠(衰)하고, 등전이 성(盛)하면 복와가 쇠(衰)한다는 말이 전한다.

   
 

앞자락에 마을회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1800년 중반에 형성된 마을로 추정된다. 방촌마을은 배가 바다로 진출하는 행주형국(行舟形局)으로 등밭은 한가운데 돛에 해당되는 위치이다. 최초의 방촌리 마을 회관(會館)은 일제강점기 때 건축했던 기와지붕 목조 건물로 현재의 등밭 위축환님의 집 앞 논(과거 별신제 제단 장소)에 위치하였으며, 마을 주민은 1,000명이상 되어 1967년까지 이장 아래 서기 1명을 두고 행정을 처리하였다고 한다. 그 후 1968년 새마을운동 일환으로 농업진흥청에서 지원하여 건축했던 정미소가 화재로 전소된 장소에 시멘트 기와 지붕의 목조건물을 신축하여 1980년까지 사용해오다가 철거하였다. 1981년 2층의 벽돌 건물로 신축하여 1998년까지 사용해오다가 철거하였다. 마을 회관은 1992년 3월 24일 실시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관산읍 지역 제7투표소로 지정되어 방촌리, 송현마을, 평촌마을, 대평마을 주민들의 참정권을 행사한 장소였다.

   
 

1999년 장흥군 지원 및 주민 부담으로 기와지붕의 목조건물인 현재의 마을회관을 신축하였다. 내부 공간은 주민들이 운집할 수 있는 강당과 회주(남자) 경로당, 주방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최초 방촌마을 회관 때부터 통신 수단으로 사용했던 종(鐘)이 현재 마을회관에 보관되어 있다. 지난날에는 회관 옆 한쪽에 정미소(방앗간), 구판장, 이발소가 있었다. 정미소(精米所)는 1969년 위곤량(1936~1997)이 신축하여 운영하다가 1976년 화재로 전소되어 1978년 객사(客舍)골 밭에 신축하여 운영하였다. 1983~1989년 위주환(1949년생)의 운영을 거쳐 1990년부터 현재까지 김용칠(1957년생)이 운영하고 있다. 구판장(購販場)은 1962년 마을에 정미소 건축에 맞춰 들어섰다. 최초의 운영인은 탑동 거주 위계진(1907~1980, 위상배 조부)이었다. 이후에는 계춘동 거주 춘사(春史) 위용철(1922~2010)의 운영을 거쳐 호동 거주 광암(廣庵) 위사량(1924~1988)이 1973~1978년간 운영하였다. 1979~1981년간을 범산 거주 위예량(1946년생)이 운영하였고, 1982~1994년간은 동산밑에 거주했던 위연량(1940~1988)이 운영하였으며, 1995~2005년간 호동에서 거주했던 최종석(1936년생, 처 위야순)이 운영하였다. 이발소(理髮所)도 구판장과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열어 영업을 하였다. 최초 운영자는 알 수 없다. 두 번째 운영인은 새터 거주 문복현(1929~2000)이었다. 이후 운영인은 양두승(1949년생, 탑동 위숭량 처남, 현 관산읍내 광명이발관)이다. 마지막 운영인은 이성신(1952년생, 호동 위노환 매제)으로 1986년에 폐업하고 광주광역시 서석초등학교로 옮겨 구내 이발관을 운영하였다. 구판장과 이발소는 거주민들의 이농과 고령화에 따른 자연 감소 등 당시 농촌현실이 반영되어 자취를 감췄다.

   
 

- 동산밑은 뒤쪽에 상잠산과 사장등 밑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1750년경 현재 위정환의 거주 터에 입촌하면서 마을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윗골은 1576년경 장흥위씨 집성촌의 시초가 되는 입향조 안항(顔巷) 위덕후(魏德厚 1556~1615)가 당동마을에서 분가하면서 방촌마을에 제일 먼저 입촌(위삼량이 거주 했던 곳)한 곳이다. 당대에는 윗골과 내동(안골)의 지명이 분리되지 않았다. 1800년에 접어들면서 현재의 위성국의 집터를 중심으로 조성 되었다고 추정된다.

   
 

- 내동(內洞)은 상잠산(觴岑山) 서쪽 기슭 해발 40m 산을 등지고 천관산을 마주보고 있는 마을이다. 관산읍 방촌길 69-1에 위치한 판서공파종택(위성렬 소유)은 고려시대 1149년(의종 3)부터 1379년(우왕 6)까지 230년간 장흥부(長興府)와 회주목(懷州牧)의 치소인 동헌 터가 있었던 자리이다. 왜구의 침입으로 피난차 도읍을 나주 철야현(봉황)으로 옮겨간 후 고읍(古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인근에는 청금고택(현 근암고택, 위성환 소유) 등이 있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이곳 안촌(顔村, 현 내동)으로부터 방촌에 거주하는 장흥위씨의 씨족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판서공파 종택은 위덕화, 위정철, 위동전으로 이어진 3대 무반가이다. 판서공파 종택은 판서공의 配 정부인 죽산안씨(1560~1625)에 의해서 올려 지었는데, 속설에 의하면 대대로 남편 그리는 한(恨)을 풀고자함 이었다고 한다. 당시 죽산안씨와 장자 정철(廷喆 1583~1657)의 配이자 며느님 정부인 창령조씨, 차자 정혁(廷赫 1589~1627)에 의해 건축되었다고 전한다. 장자 정철(廷喆)은 경상도 곤양군수(지금의 경남 사천시 곤양면) 재임(1622년 1월~1623년 6월) 때이라 “두 분의 과부 할머님이 집을 지었다”고 전한다. 이는 판서공은 1598년에 별세하였고, 장자 정철(廷喆)은 제72대 곤양군수에 재임 중이라 일부 와전(訛傳)된 속설이다.
또 다른 근거는 1945년(乙酉) 10대 종손 죽암(竹庵) 위계문(1865~1951)이 기존 집을 철거 할 때 상량문(上樑文)에 “天啓 三年(1623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때 판서공파 종택은 지금의 위치로 내려 신축하였으며 안채 뒤에 기존의 집터 흔적과 철륭단지가 남아 있다. 
병조참판 위정철은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영흥대도호부사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 교지 28매, 유서 3매 등 다수의 유품이 현존한다. 특히 1631년 3월 19일~4월 30일간 심양 회답사를 사행하면서 당대 후금(後金)과 조선(朝鮮)간의 조공(朝貢) 등 외교 현안 임무를 완수하면서 장계 형식의 “瀋陽往還日記”를 남겼다. 이를 통해 1627년 정묘호란 後~1636년 병조호란 前간 동북아 정세(政勢)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史料)로 역사적 가치를 평가 받고 있다.

   
 

사당은 위덕화가 1631년 8월 호조판서에 추증(追贈)된 후 건축되었다. 상량문, 구전 등을 근거하면 위정철이 제76대 가리포(완도)첨사 재임(1633년 2월~1635년 9월) 때인 1633년 사당을 건립하여 4차 중수를 거친 목조 건물이다. 손자 위동전(1649~1713)은 1676년 무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 거제현령, 상원군수, 진도군수, 남해현령, 용양위 부호군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특히 경상도 남해현령 재임(1710년 4월 28~1713년 1월 17일) 때 다수의 인명을 구하고 선정을 베풀어 절충장군(折衝將軍 정3품 상)으로 승계됨이 교지를 통해 확인된다. 판서공파 종택은 2002년 11월 27일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38호로 지정되었다. 제5대 송원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위성동(1943년생)이 이곳 태생이다.

관산읍 방촌길 65-6에 위치한 근암고택(勤庵古宅)은 1649년(己丑) 청금(聽禽) 위정훈(1578~1662) 선생이 현재의 터에 집을 내려 지었다. 집을 지으면서 호산마을 앞 남산에 있었던 마을 화수정이라 할 수 있는 장춘대(長春臺)를 중수하면서 일부의 자재를 옮겨지었다고 전한다. 청금 위정훈 선생은 어려서 중부(仲父) 성균생원 청계(聽溪) 위덕의(1540~1613)로부터 학문을 수학하였다. 1612년(壬子) 성균진사에 입격하고 장흥 서원의 효시인 예양서원(汭陽書院) 창건을 주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ㆍ의곡을 모아 국난에 참전한 功으로 1659년 노년에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다. 이 고택은 후손의 보수를 거쳐 전해 내려와 1910년경 9대손 근암(勤庵) 위계상(1879~1948)이 거주하면서 보수한 목조 건물이다. 현재 마을 내 고택 안채 건물 중에 가장 오래된 가치가 인정되어 아호를 따라 근암고택(勤庵古宅)이라 명명하고 2010년 8월 27일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46호로 지정되었다. 청금고택은 1649년(己丑) 기와를 올려 집을 신축하였다. 이를 뒤받침 하는 근거 자료는 2011년 지붕 기와를 교체하면서 “順治 己丑” 이란 글자가 기록된 망와(望瓦 지붕위 마루 끝에 세우는 우뚝한 암막새)가 나왔다.

   
 

이는 병조참판 위정철이 1644년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한 후 종형(從兄) 성균진사 위정훈, 웅천현감 위정렬과 함께 당대 국풍(國風)으로 불리던 이의신(李懿信)을 대동하여 천관산에 올라 지금의 근암고택과 계춘동 존재고택 자리를 잡았다고 전해 내려오는 구전을 입증하고 있다. 이는 당대 정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망와는 방촌유물전시관에 소장하고 있다.

현재의 근암고택 옆 위성빈 가옥 터의 옛 지명은 "반계(磻溪)"라고 한다. 이는 청금 위정훈 선생의 동생 반계 위정명(1589~1640) 선생이 옆에 터를 잡아 분가하여 3형제의 정착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26세(伯,師,相), 27세(道,守) 때 번손되어 근거리로 분가 과정을 거쳐 계춘동, 신기, 호산, 산저, 탑동, 호동, 등전 등의 성촌으로 방촌 영역(領域)이 넓혀졌다. 전반적으로 내동의 주거지 형성과 발전은 상잠산(觴岑山)의 지세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고, 이로 인해서 좌향(坐向) 역시 일부 남향(南向)을 제외하고 모두 천관산을 마주보는 서향(西向)으로 자리하고 있다. 마을 안길도 촌락 형성대로 주거지 아래쪽에 형성되어 있고 가옥들은 안길 바깥쪽과 짧은 샛길을 두고 그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안항 위덕후의 입촌 당시는 안촌(顔村)이나 안항(顔巷)이라 이름 하였던 마을이 내동(內洞)으로 불리어 지고 있다.

내동과 계춘동 마을 뒤에 펼쳐져 있는 상잠산에 늦은 허리 안개(저녁놀)가 둘러싸여 있는 아름다움을 상잠만하(觴岑晩霞)라고 하며 방촌8경 중, 제3경에 해당된다. 내동 동계는 "內洞 洞契案" 문서를 보관 관리하고 있다. 지난날 임종(臨終)시 매장(埋葬)이 성행하였을 때에는 유사(有事) 2인이 2년간 일을 맡아 관리하였다. 당시 집에서 장례를 치르면서 사용했던 놋그릇, 차일 등 물품 일체를 보관 관리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화장(火葬)과 장례식장 이용에 따라 간소화 되면서 유사 1인이 2년간 일을 맡아 보고 있다. 현 보유 재원은 일정액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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