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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풍호대(風乎臺)’를 아시나요?예강칼럼(116)/박형상/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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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5.22  11: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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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풍호대’가 더 있었다. 장흥의 누정사대(樓亭射臺) 명칭유래를 알 때라야 “그 누정사대가 왜 거기에 그렇게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일. 먼저 <논어, 선진 편>에 나오는, 공자와 제자 증점(曾點)의 일화를 소개한다. 공자가 몇 제자에게 장래 포부를 물었을 때, 제자 ‘증점(증석皙)’이 “늦봄에 봄옷이 이루어지면 관동(冠童)들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 하고(沐浴乎),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風乎), 노래하며 돌아오겠다(詠而歸)"라고 대답했으며, 이에 입신양명이란 상투적 포부를 초월한, 그 대장부 기상에 공자가 크게 감동했다는 것. 여기에서 출전한 “浴乎沂(욕호기) 風乎舞雩(풍호무우) 詠而歸(영이귀)”는 귀거래(歸去來) 이상(理想)에도 부합하여 조선 시골에 여러 ‘풍호(風乎)대, 영귀(詠歸)정’이 생겨난 것. 타지에도 ‘풍영이귀(風詠而歸)’에서 유래한 ‘풍영정(風詠亭)’과 ‘풍영계(契/會/齋)’등이 꽤 있다. <장흥군향토지,1975>에 나온 ‘풍평(平)대’는 ‘풍호(乎)대’를 그만 잘못 읽은 것.

1, 고읍 장천재 ‘풍호대(1780)’
- 현 관산 ‘장천재’ 입구에 있다. ‘장천(長川)팔경’과는 무관하다. <정묘지,1747>에는 물론 없는데, <관산읍지,2011>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현금 ‘風乎臺’는 존재 위백규(1727~1798)의 제자인, ‘원취당 위도순(1748~1816)’이 1780년경에 창정한 이래 중수와 개신축을 거쳤다. 창정자 위도순의 ‘풍호대記’, 그 현손되는 ‘오헌 위계룡(1870~1948)’의 ‘풍호대중수記’, ‘다암 위영복(1832~1884)’과 ‘지운 김경현(1833~1906)’의 ‘登풍호대’가 있으며, 후손 ‘상산 위성탁’의 ‘풍호대운(韻)’에 이르렀다. 중도 공백기에 들어선 ‘육각(六角)정’ 명칭은 “고읍 선비들이 상쾌한 바람을 쐬며 그 초연한 기상을 다짐했던 곳”이라는, 風乎臺 전승과는 거리가 있다. 風乎臺는 또한 위백규의 존재정사에 걸린 편액인, 부친 위문덕의 號 ‘영이재(詠而齋)’에 맥락이 닿는다. “기수에서 몸 씻고(浴乎), 언덕에서 바람 쐬며(風乎), 노래 속에 귀가함(詠而歸)”은 지방 선비를 북돋우고 은거 처사를 위로해 주는 로망이었다.

2. 유치 ‘영귀정’과 ‘풍호대(1922년경)’
- ‘복재 위계민(1855~1923)’이 창정(創亭) 입대(立臺)하였다. 문집 <복재(復齋)집>에서 ‘영귀정, 풍호대, 욕호암’이 3종 1세트로 확인된다. 예양강 상류 옆에 ‘詠歸亭’을 세우고 그 아래에 ‘風乎臺 碑銘(비명)’을 새기고, 그 부근에 ‘욕호암(浴乎巖)’을 명명했다. 현재의 ‘詠歸亭’은 장흥댐이 만들어지면서 북쪽 산록으로 이축된 것이지만, ‘풍호대 비석’은 멸실했을 것 같다. <조선환여승람, 장흥>에도 ‘영귀정, 풍호대’가 나온다. 같은 해에 출생한 ‘매천 황현(1855~1905)’보다 오래 살며 식민지 시대를 겪었는데, 애초 ‘연재, 면암’의 제자로 지방처사였던 ‘위계민’은 보수파 척사파 개혁파의 중간에서 그 갈등이 컸을 것. 쇠망하는 조선에 대한 우국적 면모도 드러냈다. 호(號) ‘복재’를 ‘불원복(不遠復)’에서 취했는데, 말년 무렵에 다시 ‘영귀(詠歸)’ 로망으로 회귀했던 것 같다. (‘詠歸亭’은 차후에 소개하기로 한다)
- 풍호대(風乎臺) <주>, 점광(點狂)은 광자(狂者)로 불리던 제자 증점(曾點).
奇巖磅自爲臺 /방박한 기암에 스스로 지은 ‘풍호대’
臺下淸風亦快哉 /풍대 아래 淸風은 역시 상쾌하여라.
時與冠童聯袂立 /때때로 어른과 아이 소매로 연립하니,
傍人錯道點狂來 /‘점광(點狂)’이 온다고 옆에서 착각하네
- 풍호대 비명(碑銘)
點瑟千載步臺沂風(점슬천재 보대기풍)
祫衣新着袊懷正通(협의신착 영회정통)
灑落其像淸明在躬(쇄락기상 청명재궁)
際玆和煦嗟我冠童(제자화후 차아관동)
- 욕호암(浴乎巖) <주>, 그 시절 ‘욕호암’은 아마 수몰되었을까?
嘉名肇錫浴乎巖 /아름다운 이름 ‘욕호암’ 내려 받으니
天琢初年也不凡 /하늘이 닦은 처음 뜻 범상치 않았네.
恐有塵俗終穢此 /티끌 세상 근심거리 여기서 끝내나니
冠童且莫振衣衫 /‘冠童들’은 또한 그 옷 털지 마시게나.

3. 부산 수의봉(수리봉)‘풍호대’
- 처사 ‘회은 위원량(1882~1945)’이 부산 수인산 수리봉 언덕바위에 ‘風乎臺’를 암각했다. <조선환여승람, 장흥>의 ‘산천’편에 나온다. 부산 기동의 ‘운암 위덕관’의 11세손으로, 1934년경 장흥위씨들의 평화리 사우 ‘백산재’ 이축에 큰 기여를 했고, 수인산 병암에 1910년에 창정했던 ‘송암정’은 훗날 1964년에 부산 기동 ‘경호정’쪽으로 이건되었다.

4, 장흥 웅치방 ‘관동정(冠童亭)’
- <정묘지,1747>에는 1555년 진사로 광산김씨 ‘남계 김정(金珽,1527~1613)’이 ‘在기류(沂流)계상(溪上)’에 세웠다는 ‘冠童亭’이 나온다. “늦봄 봄옷이 성복(成服)된 시점에 기수(沂水)에서 함께 욕호(浴乎), 풍호(風乎), 영이귀(詠而歸) 했던, 관동(冠童)들”을 끌어왔다. 아마 ‘冠童(어른,아이)’을 상대로 강학을 했을 것도 같다. ‘삼괴亭’도 세운 ‘남계 김정’은 ‘반곡 정경달’의 <난중일기>에도 등장하며, 아들 ‘김택남’은 정유재란 때의 李충무공을 받들며 장흥 회령포에 집결한 ‘의병 향선 10척’의 참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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