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가사 천풍가’를 쓴, ‘복초 노명선’의 생몰연대에 관한 의문을 지적했었다. 오늘은 ‘작자미상’으로 처리되는 ‘가사 임계탄’의 작자에 대해 말해본다. 그간 가사 숫자에 연연한 나열주의에 매몰된 채, ‘임계탄’의 작자 규명을 등한시해온 연구풍토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필자는 ‘임계탄’을 임형택 교수가 2005년경에 소개하던 직후부터 ‘간암 위세옥’說을 제시하였는데, 어떤 논의 자체가 없이, 벌써 10년도 훨씬 지난 일이 되었다.

우선 정리할 부분이 있다. ‘임계탄’에 등장하는 ‘관산(冠山)’ 지명에 대한 오해이다. 이때 冠山은 ‘장흥’ 자체의 별호(別號)인 것이지, 결코 오늘의 ‘관산읍(고읍)’으로 좁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관산(읍)은 일제시기에 ‘고읍면’을 ‘관산면’으로 개칭한데서 유래했으며, ‘가사 임계탄’에 “관산(冠山)은 산양(보성)과 금릉(강진)의 중간에 있다”고 한 표현처럼, 조선시대 冠山은 곧 長興(府)을 지칭한다.

먼저 일각에서 주장한다는 영광김씨 ’방호 金희조(1680~1752)’說을 검토한다. 비록 방호(放湖)선생이 ‘율시(律詩) 임계탄’을 남겼을지언정, <방호집>에 나타난 문체 및 언행은 결코 급진 과격하지 않다. 문체 문투는 그 사람을 반영한다. 그는 점잖은 선비일 뿐 ‘가사 임계탄’의 노골적 언사와 어떤 연결고리를 보여주지 않는다. ‘임계탄’에 등장하는 ‘호남감진어사 李광덕(1690~1748)’과 인연도 없었고, ‘아(阿)대부 장흥부사’와 갈등도 없었다. <방호집>에 나타난 탄식은 ‘낙방탄(落榜歎), 可歎, 歎齒, 歎老’ 등 개인적 탄식일 뿐 사회적 탄식은 없으며, ‘律詩 9弊詩’ 역시 ‘학교,붕당,군정(軍丁),관서(官署),이서(吏胥),염문(廉問),남초(南草),추노(推奴),조적지폐’등을 평면적으로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장흥에 관련하여 주로 ‘벽사역 찰방 또는 장흥부사 등 지방 관료들과의 교분詩’, ‘인근의 자연풍광과 사찰방문을 언급한 詩’등을 남겼다. 1728년에 격식을 갖추어 올린 <만언소(疎)>에는 “결인심(結人心), 목인재(牧人才), 수군정(修軍政)”을 거론했을 뿐 “해일포락, 멸오충, 유민도(流民圖), 사지해골 제견상쟁(諸犬相爭), 흉년 재해참상”등에 관한 야유체 언사는 일절 없다.(그로서는 용납될 수 없었을 일) 그는 1728년 ‘이인좌 난’ 때에 서울 성균관을 지키며 수관절의(守館節義)를 보여주며 공부했었다. 차제에 <방호집>을 비롯하여 <헌헌헌 문집, 김여중> <은암집, 김몽룡> 등 영광김씨 선비들 문집의 조속한 국역을 기대한다.

이제 ‘간암 魏세옥(1689~1766)’說을 살펴본다. ‘가사 임계탄’의 내용은 장흥인 ‘魏세봉’이 1734년에 올린 ‘구폐(救弊)6조,7실자(實字)’ 상소에 나온 문구와 맥락에 꽤 중첩되어 있다. 그 ‘魏世鳳’은 같은 世자를 쓰는 ‘魏세옥’으로, 魏세옥이 1734년 상소를 올린 일은 <간암 행장(위백규)>에서 확인된다. ‘그때는 누구라도 함부로 상소를 올릴 수 없었다.’는 반론도 있으나, 영조와 정조 시대는 구언교(求言敎)에 따른 응지상소 언로가 개방되었으며, 지방선비들의 잦은 상소에 조정에서 “또 상투적 시폐론이냐?”고 짜증을 내며 반문할 정도였다. 1721년에 낙남(落南)한 魏세옥은 서울에 알려져 있는 자신의 신원을 가리고자 ‘魏세봉’ 필명을 사용했을 것. 다음 사정으로 무엇보다도 ‘魏세옥’은 ‘임계탄’의 등장인물과 개인적 인연이 있다. 서울 주자동에서 태어난 ‘간암 魏세옥(1689~1766)’은 같은 서울 출신 ‘관양 李광덕(1690~1748)’과 1년차 연배인데, 마침 그 李광덕과 친교가 깊은 여흥閔씨 집안에 아주 가까웠다. 간암의 부친 魏동전(1649~1713)은 ‘위덕화, 위정철’을 잇는 3대 무과무반가로, 閔氏 관찰사들(민진장,민진후,민진원)을 모신 수행 군관을 했고, 간암 자신은 李광덕과 친한 ‘오헌 민응수(1684~1750, 민광훈 증손, 민진주 아들)’의 식객이기도 했다. 더구나 李광덕은 閔응수와 진사시 동방에, ‘전임 전라감사 李(1728)’이고 ‘후임 전라감사 閔(1730)’이기도 했다. 그러니 서울 태생인 魏세옥이 李광덕을 두고 ‘가사 임계탄’에서 ‘죽마고우(竹馬故友), 죽마래영(竹馬來迎)’이라 빗대어 말할만한 입장으로 짐작된다. (소론 李광덕은 1724년 당쟁에서 당파가 다른 노론 閔진원(1664~1736)에 대한 사유(赦宥)를 탄원하다가 체차를 당할 정도로 서로 가까웠는데, 그 민진원의 아들 ‘민형수’가 1739년에 해남 유배를 마치고 魏세옥의 안내로 장흥 천관산을 유람하였다.) ‘임계탄’에 나온 문구, "전(前)감사 李광덕 감진어사 온다하니, 죽마래영 몇곳이여"라는 표현은 李광덕(1728,전라감사/1732~1733,호남감진어사) 관력과 ‘서울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魏세옥’의 처지에 부합할 수 있다. 또한 ‘임계탄’에 나온 "우리 고을 센 개꼬리 아무런들 황모(黃毛)되랴. 아대부(阿大夫, 장흥부사)"라는 표현도 장흥에 낙남해 있는 魏세옥에게는 가능하다. 魏세옥은 1734년에 춘천사람 朴필장 무고사건에 연루되어 장흥에서 투옥되었고, 1735년 9월에 부임한 장흥부사 ‘이배원(李培源,1728년 무과)’과 갈등이 깊었으며, <간암 행장>에는 1736년 3월에 보성군수로 내려온 ‘윤심형(1698~1754/1721년 갑과장원)’이 장흥을 지나가다가 魏세옥을 구원해준 일이 나온다. ‘가사 임계탄’의 창작시점을 ‘1732~1733년 임계년 ~ 1736년경 무렵’으로 보면, 당시 魏세옥이 장흥에서 처했던 상황들과 맞아 떨어진다. (‘가사 임계탄’의 내용과 문구는 계속 정비되어갔을 것이다)

맺는다. ‘가사 임계탄’은 이른바 ‘운동권 노가바, 시국(時局)가사’에 해당한다. 평소 온유돈후(溫柔敦厚)하고 절제된 선비 ‘방호 김희조’에게 반(反)조정적 반어(反語)적 야유적 과격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반면에 ‘간암 위세옥’은 ‘존재 위백규’가 언급한 비분강개(悲憤慷慨)형이며, 마침 ‘관양 李광덕과 친분여지, 阿대부 장흥부사와 갈등관계’ 인연이 있었다. 그가 올린 ‘1734년 상소’에 사용한 문구와 표현 맥락과 꽤 중첩되어 있음을 유념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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