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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과 ‘금당도(2)’예강칼럼(108)/박형상/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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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3.24  14:5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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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다. '금당도(金塘島, 金堂島)'를 못 지키다니. 1896년에야 창설된 완도군에 넘겨지기 전까지 내내 '장흥府 금당도'였다. 선초 이래 송전(松田) 봉산(封山)정책으로 출입금지가 되다가 임진왜란 후엔 경작개간을 했었던 모양. 1721년 <실록기사>를 보면, 그 100년 전부터 입도(入島) 개간이 있었다. 장흥의 인천이씨 경우도 1620년경에 금당도 가학리로 입도했다한다. 이에 '봉산(封山) 원칙론'과 '둔전(屯田/官田) 허용론'이 계속 대립되었다. 이는 중앙세력 간에 이권(利權) 다툼도 되었다. <신증>에 장흥 도서로 '금당도(金堂島)'가 나오지만, '금당도,횡간도'는 ‘훈련도감’의 속지이고, '평일도,생일도'는 ‘어의궁(인조, 효종 집안)’의 속지였다. 조선의 松田 정책은 '산림시장(山林柴場)의 사점(私占) 금지원칙‘이었기에 '궁궐목재, 선재(船材), 황장용 목재'의 조달처인 封山 금당도에 입도하면 '강제출륙'을 당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목재수요가 급증되자, 의견이 양분되었다. 한편은 '금송(禁松) 정책에 따라 松田의 봉산(封山)화'를 고수한 반면에, 다른 한편은 '封山의 해체에 따른 둔전(屯田)화'를 주장하였다. 이에 '금당도 관련事'를 모아본다. ‘금당도 방문詩’와 ‘封山과 屯田에 관한 <실록기사>’로 대별된다. 1431년 전라감사는 금당도 ‘청낭간’을 궁실에 바쳤다. 1555년 을묘왜변에 왜구가 金堂島에 침입하였다. 이미 은퇴한 ‘반곡 정경달(1542~1602)’은 1600년경, 방문詩 '金塘'을 읊었다. 1621년경 금당島 개간논란이 있었으며, "황무지 개간자로부터 받는 도지(賭地)가 정당한가?"를 두고 대립했다. 그 무렵에 屯田과 궁방전(宮房田)이 개설되었다. 장흥문인 ‘산목당 박수구(1620~1690)’는 방문詩 '金堂島'를 남겼다, ‘만수재 이민기(1646~1704)’는 방문詩, '유(遊)金塘島'룰 남겼는데, 첫해 가을엔 풍세(風勢)불순으로 '백사정'에서 포기하고서, 다음해엔 성공했다. 서울선비 ‘삼연 김창흡(1653~1722)’도 '金堂4수'를 남겼다. 장흥위씨, ‘수우옹 위세직(1655~1721)’은 기행가사 '金塘별곡'을, ‘삼족당 위세보(1669~1707)’는 詩,'次삼종형세직 金塘4운'을 읊었다. 1721년경에 이르러 '封山 원칙론'과 '屯田 허용론'이 다시 대립되었다. 좌부승지 김재노(1682~1759)는 '봉산 원칙' 아래에서 '양향청(훈련도감 재정관서) 절수지(折受地) 허용을 주장했는데, 여흥민씨 민진원(1664~1736)은 "개간자한테 받는 양향청의 수세(收稅,도지)권은 너무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1746년에 장흥부사 '허급'은 장흥위씨들이 '방어공 위정철' 묘소 이장(移葬) 때 '천관산 封山'의 침범을 의심하며, ‘간암 위세옥(1689~1766)’을 억압하였다. <1747년, 정묘지(고읍방)>에 '송감관, 산직' 직책이 있고, '金堂島'라 표기하고서, '김창흡, 박수구'의 ‘금당도 詩’를 소개하였으며, 금당도의 절벽과 바위 풍경을 꽤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훗날 '방촌8경 金塘귀범(歸帆)'과 '金塘8경 상잠낙조(落照)'는 서로를 마주 바라보는 풍경이었다. 1754년 ‘간암 위세옥’은 <사도설진(四島設鎭) 방략상서문>에서 '金塘,평일,산일,절이(거금)'를 4島로 거명했다. 1755년 좌의정 김상노(1702~)가 ‘金塘島 벌목사건 비판장계’를 통하여 벌채 단속을 촉구하며, '금당도 封山원칙에 의거한, 양향청의 屯田 혁파와 벌채 단속'을 주장했고, 이에 세자가 주도하던 조정에서는 금당도 전체를 封山으로 정하고 해당관청의 절수(折受)를 혁파하기로 결정했다. 아울러 전라도 지역에 封山 142개소가 확보되었다. 그러나 1761년에 상황은 역전되었다. '屯田 혁파와 금당도 封山化'를 주장하는 상소에 반대하여, 우의정 홍봉한(1713~1778)은 "본래 金塘島는 양향청에 소속된 屯田으로 경작에 적합하고 양송(養松)에 부적합하니, 도로 양향청에 소속시켜 경작을 허용해 달라"고 청했고, 영조 임금이 바로 허락을 해주었다. 그 무렵부터 ‘金塘島’ 명칭표기가 정착된다.(<여지도서>) 1762년 1월에도 호조판서 김상복(1714~1782)이 "金塘島를 다시 양향청에 소속시켜 屯田을 열어 개간하게 하소서"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해 4월에 '향당의 무리들이 ‘선공감’의 가짜문서를 이용하여 양향청에 소속된 金塘島 벌목을 시도한 사건'이 발각되었다. 이제는 "봉산이냐, 둔전이냐"는 원칙론 다툼보다 온통 金塘島 목재 벌목에 관심이 커졌다. 1777년경 ‘존재 위백규(1727~1798)’는 '황간' 부사를 대신한 <봉사(封事) 26항>에서 금송(禁松)정책과 海島목장 정책의 폐단을 비판했다. 1779년경 위백규는 <지제지>에서 "金塘島는 천관산에서 떨어져 나간 바위덩이"로 언급했다. 1791년 4월에 '65세, 위백규'에게 드디어 金塘島 일대를 선유(船遊)할 기회가 생겼다. '장내곶'으로 비정되는 '영안진(永安鎭 <길長안內곶)'에서 ‘회령진만호 趙충배’를 따라 위씨형제와 함께 출발하였고, "평이도에서 나신(裸身)으로 깊은 바다에 들어가 전복을 채취하는 ‘해녀(海女)’를 보았다.(觀海女採鰒 其裸身佩瓢到入深淵)"고 기록하여 <금당도 선유記>에서 ‘해녀(海女)’ 용어를 사용했다. (한편, 1801년에 정약용은 유배지 포항 장기에서 '잠녀(潛女)'를 보았다고 했다. <詩, 아가사>) 그 이후 ‘장흥도호부’ 관련기록을 보면, 封山은 '대덕 심치'에 있고, 松田은 '남면 가산(가학), 고읍 천관산, 신일, 평일, 안양 전일산, 천포 대진과 객산' 등에 있었다. 그러니 金塘島는 더 이상 封山松田 특별지역이 아니었다. 장흥부 남면방 출신 ‘동곡 이복연(1768~1846)’은 詩, '遊(유)金塘島'를 남겼다. 1844년 갑진년(또는 1784년)에 金塘島 벌목반출에 대응하여 일부 주민들은 '금당도 차우리 송계(松契)'를 조직하였다. 松契는 '송산(松山) 洞山의 선재목'을 벌목 반출함에 있어 공동작업 공동납세 공동기금 제도를 운영하였다. 조만간에 ‘완도 금당도’와 ‘장흥 회진’ 쪽을 잇는 연륙교를 먼저 놓아 역사문화와 경제가 재결합되는 계기를 삼았으면 한다. 소설가 송기숙 선생의 집안도 원래 연고지는 ‘금당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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