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산을 노래한 가사 '천풍가(天風歌)'의 작자 '노명선(盧明善)'의 생몰연대가 엇갈린다. 그 무렵에 동명이인은 없었음에도, 남산공원 가사문학비에는 '1707~1775년'으로, 문화원 달력에는 '1707~1789년'으로, 인터넷 민족대백과에는 '1647~1715년', 장흥의 일부 가사문학 연구자들은 '1707~1775년'이라 했다. 여러 견해 중에서 '1587~1655년' 주장이 합당해 보이는데, 장흥의 <광산盧씨 족보>를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광산노씨 '노명선(盧明善)', 잊혀지고 잃어버린 詩人이다. 비록 진사 생원은 못 되었지만, 그 역량을 보여준 평생처사였는데, 그 기록이 남지 못했다. 여타 장흥문인들 시문집에 수차 등장함에도 정작 유고가 발견되지 않았다. '호 청사(晴沙), 옥천(玉川), 낭한(浪漢), 낭사(浪沙)/ 자 복초(復初), 盧명선'은 평생 향촌문인이었다.  그 존재와 면모는 1612년 진사, '청금 위정훈(1578~1662)'의 <청금(廳禽)유고>에서 확인된다. 천풍산 기슭에 살던 ‘청금’과 ‘청사’는 그 연배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대가 돈독했던 모양. <청금유고>에 10여수가 실려 있다. 영광김씨 ‘삼우당 김여전(1575~1644)’은 詩,“차(次)盧복초운”을 썼고, 1613년 진사, '남파 안유신(1580~1657)'의 <남파유고>에 詩,"과(過)盧명선 溪亭(계정)"이 있다. 장흥 부서방에 평생 살았던 처사 '송담 전유추(1594~1674)'의 <송담선생유고>에도 "弔祭(조제) 盧옥천明善 /추방(秋訪) 盧옥천불우(不遇)"등 10여수가 있다. 또한 1639년 진사, '감호 김정화(1599~1660)'의 <감호(鑑湖)유고집>에 詩,"寄옥천자盧명선 초당(草堂)"이 있다. 한편 1644~1649년 동안에 장흥 유배객이었던, '청봉 심동구(1594~1660)'의 詩에 "次노노(盧老)운"이 있다. 한편 1681년 생원, '만수재 이민기(1646~1704)'의 유집에, "請(청)會葬(회장) 盧公명선(鳴善)通文(통문)"이 나오는데, "본부 용계방 호계 선롱(先壟.선산)에 安曆(안력)하였다."고 했다.
앞의 여러 사정들을 종합하면, '盧명선'의 구체적 활동모습이야 차치하더라도, '盧명선 몰년(沒年)'은 마지막 會葬 목격자 '이민기‘의 몰년을 넘을 수 없다. 그러니 일부 가사문학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1707~1775(1789)년' 생몰연대는 전혀 합당치 못하다. 역수계산상 120년 차이이니, 간지(干支)착오일 수 있다. 그 ’1707~1775(1789)년'이 속한 18세기 무렵에 활동한 장흥 문인들, ’방호 김희조(1680~1752), 영이재 위문덕(1704~1784), 운암 김몽룡(1708~1788), 존재 위백규(1727~1798)'의 시문에도 '청사 노명선'은 물론 등장하지 않는다.
이에 ‘청사 노명선’과 지근거리에 있었을, '청금 위정훈, 송담 전유추, 만수재 이민기’를 통하여 몇 사정을 살펴본다.
 먼저, ‘청금 위정훈’은 詩, “기(寄)청사(晴沙)”에서 장흥시맥(詩脈) 계보를 잇는 후배로 ‘청사’를 지목하였다. 그런데 '청사'는 '청금'을 왕왕 찾아와 長歌를 불며, 대취 통곡을 했던 모양이다. 그 長歌가 혹 <天風歌>는 아닐까?

- 청사(晴沙) 시에 차운하다 (次청사韻, 위정훈) / 역, 이병혁
浪漢棲遲一草堂 ‘낭한’이 한 草堂에 오랫동안 머물기에
固知貧亦士之常 진실로 가난이 선비 일상임을 알았네.
我憐性似雲夫老 나는 ‘운부老’ 같은 성품 사랑하거늘
人說詩如員外郞 사람들은 ‘원외랑’ 詩 같다 말한다지.
往往長歌甚痛哭 왕왕 長歌를 불며 크게 痛哭을 하고
時時大醉託佯狂 때로는 大醉하여 미친 행세를 하더니
亭皐別後春蕪綠 봄풀 푸르던 물가언덕에서 헤어진 뒤
雙빈搔來ㅡ半荒 반쯤 센 양 살쩍 긁적이며 찾아 왔네.

 다음, ‘송담 전유추’와의 관계이다. '盧명선'에 대한 “弔祭(조제)” 詩를 비롯하여 “寄盧옥천,金감호/次盧옥천운/和盧옥천/再和盧옥천”등 10여수를 남기고 있는 그 역시 생전에 서로 가까웠을 것.(필자로선 그 <송담선생유고> 목록을 보았을 뿐 그 시문원문은 입수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盧명선'은 선배 위정훈과 후배 전유추와 교분이 깊었을 터인데, 정작 ‘청금 위정훈’과 ‘송담 전유추’ 사이에는 어떤 교류 흔적이 안 보인다. 양인의 연배차이가 크긴 하지만, 광해군을 지지한 ‘북인 선세휘’를 둘러싼 당색 사정 때문이었을까? ‘전유추’는 광해군을 비판한 입장에 있었고, ‘위정훈’과 ‘선씨 형제들’은 ‘청계 위덕의’를 모신 학맥 인연으로 서로 가끼웠다. 같은 '盧명선'을 두고 ‘청금 위정훈’은 '晴沙'로 부르고, ‘송담 전유추’는 '玉川'으로 부르는 점은 특이하다. (玉川은 중국의 ‘옥천자 노동’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 혹 그 주거가 불안정하던 ‘盧명선’이 ‘고읍 방촌’에서 ‘용계방 선산 부근 草堂’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玉川'을 사용했기 때문일까? 노년의 '盧명선'은 草堂에 칩거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마지막으로 '만수재 이민기(1646~1704)'가 남긴 "청(請)회장(會葬) 盧公명선(鳴善)통문(通文)"의 작성여부이다.
가령 ‘청사(晴沙)’의 몰년 1665년에 ‘19세 만수재’가 이런 通文을 쓸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남긴 하지만, 그 문집의 ‘종유록(從遊綠)’ 명단에 ‘광산인 盧명선’도 있는 것을 보면, 충분히 가능했을 것. 다만 ‘盧명선(鳴善)’으로 되어 있다. 여기저기에 산재한, 장흥문인 '盧명선' 관련시문들을 한데 모아 <자료시문집>으로 엮었으면 한다. <정묘지> 인물 편에는 웬일인지 '청사(옥천) 盧명선'이 실종되고 말았다. ‘광산노씨 효성사’ 쪽에도 ‘盧명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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