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치유여행 49차 여정에서 저는, 마치 소리를 잃어버린 새처럼 노래를 잃어 버리고 살았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드렸습니다. 수치심의 포로가 된 채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노래는 남의 인생에나 있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던 분들의 이야기를요..오늘은 한 남자 분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려 합니다. 이 분은 문외한인 제가 들어도 참 아름다운 테너 목소리를 가졌습니다. 원석처럼 다듬어지지 않아서 그렇지 누군가의 레슨이라도 받으면 얼마나 고운 소리가 될까, 그야말로 발전의 여지가 무궁무진한 미성의 소유자지요. 중년의 지긋한 나이에도 시들지 않은 성량 뿐 아니라 높은 고음도 무리없이 올라가고 가성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오페라의 꽃이 남성으로서는 테너라더니 그 테너 특유의 매력을 다시 느끼게 해주는 목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절대로 대중 앞이나 무리들 속에 끼어서는 노래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취미 생활을 할 기회도 있었고 합창단 가입 권유를 받은 적도 있었는데 그 때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고개를 흔들며 가버리는 겁니다. ‘난 노래를 못해요’라는 말과 함께..
그럴 때면 어김없이 얼굴이 굳어져 있기 일쑤였지요. 방금 전까지도 웃고 있다가 말입니다. 참 묘한 단호함이었습니다. 무언가 불가항력의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의 모습 ..참 이상하다..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유가 아니라, 너무나 아프고 서러운 상처였지요. 학창 시절 노래를 참 좋아했던 그 분은 자신도 남들처럼 친구들과 선생님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답니다. 학교의 인정을 받아 행사가 있을 때 마다 늘 단골로 무대에 섰던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자기도 같은 처지의 친구들끼리 모여 그 당시 마치 열병처럼 유행했던 중창단을 만들었는데, 아무리 연습하고 연습해도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고,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답니다. 이름하여 학교와 선생님들의 인정을 받았던 그 그룹은 ‘주류’, 자기처럼 그냥 자기네끼리 모여 누가 알아 주지도 않는 연습을 거듭했던 그룹은 ‘비주류’였답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이름이 불리워 질 날이 있겠지, 배고프고 초라했던 그 시절, 부모님이 힘이 되어주지 못했던 아이들만 모여 마치 매니저 없는 무명 가수처럼 기약없는 연습만을 되풀이했던 그 시절에, 언제나 무대에 서는 친구들을 보면서 얼마나 더 초라하게 오그라 들었을까요...그러던 어느날이었습니다. 단 한번도 자신들을 쳐다보아 주지 않았던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한명 한 명 가창 시험을 치르는 음악시간이었답니다. 자기 차례가 되자 가난한 어린 중학생은 떨리는 심정을 겨우 가다듬고 이제야말로 선생님께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벅찬 감격으로 그 당시 선망의 대상이던 창법으로 목청껏 노래를 불렀습니다. 영원한 비주류였던 자기네 그룹이, 단 한 번만이라도 눈길을 받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요..그런데, 한 소절도 채 다 부르기 전에 그 선생님이 키득키득 웃더라나요..그 것도 너무나 큰 소리로 말입니다. 그 웃음 속에는 ‘야 그 창법은 또 어디서 줏어 들었어? 유행은 알아서 ..’하는 가혹한 비웃음과 경멸이 담겨 있었습니다. 얼마나 창피했는지, 얼마나 수치스러웠는지 쥐구멍도 모자라 그 자리에서 그만 영원히 땅 속으로 꺼져 버리고 싶더랍니다. 그리고 그 날로 그 소년의 삶에서 노래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음악으로 모든 사람의 삶에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일이 사명이었을 음악 선생님, 그러나 가난하고 희망없던 소년에게서 노래를 빼앗고 아직도 그 때의 수치심이 떠오를 때마다 떨고 있는 자로 만든 것, 그 것이 바로 상처가 하는 일입니다. 상처많은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그의 한 어린 제자에게로 흘러가 또 다른 상처를 낳은 상처가 가진 그 특성을, 밝은 세상을 꿈꾸는 우리라면 주목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멈추려는 노력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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