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읍지 정묘지>에도 나온다. 그 기록이 앞선, “웅치 삼괴정(三槐亭)”을 먼저 본다. 조선시대 내내, 그리고 1914년 이전에는 본디 '장흥 웅치방 강산촌(糠山村)'이었다. 광산김씨 김정(金珽,1527~1613)이 창정하였는데, 호 남계(南溪), 자 공서(公瑞), 1555년 진사(進士)로, '장흥위씨 위대용, 영광김씨 김귀명'과 사마시 동년입격자이며, <사마재 제명록(장흥향교)>에서도 확인된다. 진사 '김정'의 장남 '김택남(金澤南)'은  李충무공의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에 맞추어 장흥 회령포로 집결한 향선(鄕船) 10척의 참여자로, 명량해전 참전자이다. <마씨가장>에 등장한, 그 해상의병 '김택남'이다. (이렇게 알려주면, 또 보성 쪽에서 이른바 보성출신 의병으로 포장할 것 같아 걱정스럽다.)<정묘지,1747>에는 아직 미기록된, 고읍방 “방촌 三槐亭”은 원래 ‘여기정(女妓亭)’이었다. '영이재 위문덕(1704~1784)'이 그린 방촌 지도에는 '古여기정(亭)'이었다. (<청금유고>에 실린 '장춘대도(圖)'에 표시된 '옥정총(塚)은 회주 기녀 '옥경' 묘소로 구전되었다한다.) 1898년 3월경에 천관산 유람을 마친 ‘연재 송병선(1836~1905)’이 방촌 女妓亭에 이르러 ‘회화나무(학자樹) 세 그루 三槐亭’으로 개칭하였다. 그후 '오헌 위계룡(1870~1948)'이 <삼괴정記>를 남겼다. 현재는 고인돌 셋과 더불어 한 그루뿐인데, <방촌 팔경>에 三槐亭은 없지만 '금당귀범(金塘歸帆)'을 조망하는 길목이다. 마침 女妓亭 사례는 타지에도 있는데, '역정(驛亭,井)<역의정<女妓亭(井)'에서 연원할 수 있다. 주변에 샘(石泉)도 있는데, '넓적 바위 여근암(女根岩)'에 착안한 女妓亭일 수 있다. 女妓亭 고개를 女妓령(嶺)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큰 나무가 있는 길목이기에 당산제 별신제 공간도 되며, 오가는 행인들 휴식장소가 되었을 것. 충청도 '서산 女妓井'은 여러모로 장흥 방촌 女妓亭과 비슷해 보인다. 기왕에 ‘방촌 삼괴정’ 부근의 “신기(新基) 가남쟁이”를 살펴본다.  왜 '가남쟁이'인가? 일각에서는 魏氏 집안 전승담에 의지하여, 1721년에 낙남한 '간암(艮庵) 위세옥(1689~1766)'이 거기에 일시 살았던 연고로 '간암정 <가남쟁이'로 불렀다고 풀이한다. 그러나 얼른 납득되지 않는다. 그렇게 전해 들었다지만, 존재 선생이 쓴  <간암 위세옥 행장>에도 방촌 新基에 '간암정(艮庵亭)' 창정은 없었다. 위세옥은 훗날 대덕 도천(陶泉,초당)으로 옮겨 정착할 때 '艮庵' 편액을 썼다. '艮'은 '그치다, 멈추다'이다. 반면에 '방촌 新基'에서 무슨 잘못을 범한 일 없고, 족손 위백규를 이끌었고, 거기엔 兄 송와공 집도 있는데, 비칭 어감의 '간암쟁이 <가남쟁이'라 함부로 부를 수 있는가? 위세옥이 일시 살았다는 구전 말고는 어떤 특별한 사건기록도 없다. 반면에 '가남쟁이' 사례는 장흥 장동 북교리 학산에도 있고, 전국적으로  빈출하는 지명이다. '가남쟁이(가남정이)' 유래는 그렇게 짐작된다. 첫째, '돌무더기, 돌무덤'을 '덤, 더미 가(可)'로 옮기면서 더미 남쪽을 ‘可南,可岩’으로 지칭하게 된다. ('덤재'를 '可峙, 可岩峙'로 옮긴 사례들이 있다) ‘방촌 三槐亭’과 新基 일대에는 실제로 고인돌 더미가 있다. 둘째, '갈암(葛岩)'에서 유래했을지 모르겠다. 길이 갈라지는 고개 갈령(葛嶺.葛峴)처럼, 갈림길 길목 덤바위 부근을 두고, '갈암<가람<가남'로 변했을 수 있다. 큰나무와 바위덤이 있는 등성이 휴식처로 풀이한, 타지 '가남쟁이' 사례처럼 방촌 “新基 가남쟁이” 역시 그런 분기점에 위치한다. 샘터 있는 등성이로 '역원(驛院)등, 주막'도 있을 법 했다. 요컨대 '가남쟁이'를 '간암, 간암亭'에 결부시킨 구전은 우연찮게 비슷해진 발음을 오해한데서 부회(附會)하였으리라. '간암 위세옥'이 오기 이전에 이미 '가남쟁이'는 있었을 것이고, 또 '간암'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예 '간암亭<가남쟁이' 발상조차 못했을 것. 마지막으로 “신월 초당(草堂)”이다. 그 “신월 草堂” 유래를 두고 일부 의견이 엇갈리는 모양이다. 그 천관산 서쪽 오지 마을에 그 이전에도 몇 가구 있었거나 아니면 페촌 상태에 있었다가, '간암 위세옥'이 입거하면서 ‘艮庵’ 편액이 등장했고, 비로소 ‘초당(草堂)’ 칭명이 되었을 것. <정묘지,1747>에 이미 “草堂, 위씨 마을”이 나온다. 장흥지역 ‘草堂거사(居士)’로 ‘신월 草堂 -간암 위세옥', ’금곡 草堂- 계서 백진항(1760~1818)', ‘묵촌 草堂- 지지재 이상계(1758~1822)'가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草堂 書堂‘을 두고 활동한 ’草堂居士‘가 없다면 그 草堂 마을이름을 얻기 어렵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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