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암재 위계철(魏啓哲,1840~1913)

자 치선(致善), 호 모암재(帽巖齋),  장흥 행원리 출생, 문집 <모암집>. ‘괴봉 위대용, 취수헌 위천회’를 잇는 후손,  부친은 ‘행계(杏溪) 위장’. 동생 ‘위계충’은 무과 출신. 그 시절 ‘관료부패, 신분모순, 외세유입, 척사동학’ 등 사회적 갈등으로 점철됐던 조선 후기를 보냈다.

1880년에도 장흥에 70대 고령의 사마시 입격자들이 있었으나,  그런 과거시험도 1894년에 폐지되었다. 그 무렵 선비들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연배인물로 ‘오남 김한섭(1838~1894), 방언 이정석(1838?~1895), 사복재 송진봉(1840~1898), 육우재 백영직(1841~1912), 춘파 위관식(1843~1910)’이 있는데, 그들 향촌사족 간에도 ‘외세, 척사(斥邪), 동학(東學)’에 대한 입장이 사뭇 달랐다. 중도적이고 실천적 성향의 ‘모암재’는 결코 수구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 ‘위계철’의 人生을 일별한다. 34세, 1874년에 장흥부사에 설폐정관(設弊呈官)을 요구하였다가 장(杖)을 맞고 투옥되었으며, 암행어사를 만나 석방되었다. 1879~80년에 향교장의, 1888년 색장, 1890년 장의 등을 역임했다. 1894년 장흥부사로부터 동학 동비(東匪)토벌을 위한 ‘도방수장(道防守將)’ 직첩을 받았으나 제대로 활동하지 않았다. 그 받은 직책 때문에 오해를 받아 농민군들이 사랑채를 방화하였으나 오히려 ‘소모관 白樂中’의 횡포에 대한 탄핵 의견을 개진했던 사정이 알려져 동학농민군들이 그 사랑채를 다시 지어주었다는 가전(家傳)이 전한다. 1895년경 탁지부 주사(전국64명)제도 시행으로, 1896년에 도천(道薦)주사로 임명되었다. 1902년에 향교 재장(齋長)이 되었다. 1913년 8월에 '부춘정 차운(次韻)詩'를 짓고 그해 11월에 타계하였다. 부산방(坊)과 부동坊을 잇는 ‘부산교(夫山橋)’ 중수사업에 따른 ‘불망비(현존)’에 ‘부동방 유사’로 기록되어 있다. 공평무사한 처신에 부민(府民)들 신망이 높았다. 원래 ‘행원 강정등’에 있었던 모암재 집안묘소는 ‘행원 송산’에 옮겨져 있다.

2) 모암재의 '독곡청풍(獨谷淸風)'

그가 남긴 ‘장흥府(邑) 8경’중에 ‘제3경 獨谷淸風’은 그 관점이 꽤 심장(深長)하다. 나머지 7景이야 ‘사자(獅子)귀운, 억불(億佛)모종, 석대(石臺)총죽, 신흥(新興)모종, 예강(汭江)어화, 감호(鑑湖)재월, 연곡(淵谷)취연’ 등 그간에 익숙한 장흥풍경들이다. 그러나 ‘獨谷’에 있어 다른 사람들이 말한 ‘獨谷漁火’ 대신에 그는 ‘獨谷淸風’을 내세웠다. 獨谷의 본령을 은사(隱士) 내력과 절의 淸風으로 직시한 데에 ‘모암재’의 가치관과 식견이 드러난다. 장흥 獨谷은 ‘송호(松湖) 강변, 추강조대, 독곡조대, 청은정, 독실포, 독취정’ 일대로, 장흥 은자(隱者)의 풍영지소라 할 수 있다. (‘독취정’은 모암재가 타계한 후, 1933년에 들어섰다) 그는 ‘사인정, 용호정, 부춘정’ 차운詩도 남겼기에 장흥 향곡(鄕曲)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 것.

제3경, 독곡청풍(獨谷淸風), 모암재 위계철

爽氣淸明百世香 청명한 절의와 기상은 백세향(百世香)이고
千林一抹布靑裳 천림(千林)은 조각마다 청상(靑裳)을 펼치네
噓來五柳人先醉 돌아온 오류(五柳)선생은 먼저 취(醉)하고
流去四明客有狂 유랑유거 사명(四明)山客은 미쳐 있다하네
響生叢竹坮傳石 총죽의 향생(響生) 울림은 대석(坮石)에 남고
地近鑑湖月滿鄕 가까운 감호(鑑湖)에는 달빛이 가득해라
不用一錢何幸漏 한 푼 돈 안 쓰고도 어찌 다행 아닐까
聞其消息到山陽 그 소식을 들으면서 산양(山陽)에 이르리.

獨谷은 ‘독실(犢失)浦’의 ‘독실’과 같은 말로, “독(石,돌)이 많은 계곡(실)”을 한자어 독곡(獨谷)으로 받은 것이다. 그 ‘獨谷’에는‘獨谷 정명세(1550~1592)’가 있었다. 1570년 진사, 1576년 문과급제자로 해미현감을 역임했고, 임란 진주성 싸움에서 42세로  의롭게 순사하였는데, ‘獨谷조대(釣臺)’ 사연을 남겼다. ‘오류(五柳)’는 중국 남조의 은사(隱士) ‘도연명(365~427)’이고, ‘사명객(四明客)’은 당나라 은거詩客 ‘하지장(659~743)’이다. 獨谷에 있는 ‘대석(坮石, 傳石)’으로는 ‘추강 남효온(1454~1492)’의 <조대記> 현장 秋江조대와 ‘독곡 정명세’의 獨谷조대 등이다. ‘釣臺 유허碑’가 있었다. 남효온은  ‘윤구, 이침(李琛)’등 그 무렵 유배객 은거객과 어울렸다. 그 부근 ‘감호(鑑湖)’에는 장흥선비 ‘송담 전유추(1594~1674)’가 은거하였다. 부근 송호(松湖) ‘청은정(淸隱亭)’에는 ‘광주이씨 이만원(1671~1733)’이 은거하였다. 詩 말미에 나온 ‘산양(山陽)’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은거 소요처, 중국 하내현 山陽을 끌어온 것.(여기 山陽을 두고 ‘보성 땅 산양’으로 옮길 수는 없다. 문맥적이든 지리적이든 무관하다.)  ‘모암재 위계철’ 선생은 그런 獨谷에 얽힌 절의와 은거풍광을 ‘獨谷淸風’으로 내세우고 싶었으리라. 그 역시 내내 淸風의 꿈을 꾸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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