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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군 계산리 차동마을 진주정씨 충렬사(忠烈祠) (1)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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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24  10:4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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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군 용산면 계산리 177-1번지(용안로 203-209) 차동마을 뒤 수리봉(鳶峯 140m) 자락 수리골에는 충렬사가 위치한다. 이곳은 연곡서원, 강성서원과 함께 장흥군 내 3대 사액서원 중에 한곳으로 유서 깊은 사우(祠宇)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외삼문(外三門)이 있다.

원래의 사우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신 정명세(1550~1593)와 그의 동생 충신 정명원(1559~1592)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683년(癸亥 숙종9) 지방 유림들의 공론에 따라 전라도 선유어사(宣諭御使) 이동욱이 장흥읍 충렬리에 석대사(石臺祠)를 건립하였다. 그 후1555년(乙卯) 임진왜란의 전초전인 달량진(지금의 해남군 남창)사변에서 순절한 장흥부사 한온(?~1555)을 1689년(己巳) 배향하면서 관산 충렬사라 칭하고 한온 부사를 주벽을 모셨다. 그 후 1786년(丙午 정조10) 단종조 3相 중, 정분(鄭? , ?~ 1454)만 은전을 입지 못하고 황보인, 김종서 등은 사우가 있어 향사하고 있음을 이유로 그 후손들이 살고 있고 5세손 정명세와 정명원이 배향된 충렬사에 배향할 것을 전라도 유학 김익현 등의 청액소(請額疏)로 사액을 건의하여 충렬사라 사액되고 정분을 주벽으로 배향하고 정광로를 추배하였다. 1868년(戊辰 고종5) 흥선대원군(李昰應)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면서 그곳에 유허비를 세우고, 현재의 자리에 7位 단소(壇所)를 세워 향사하였다. 그후 1955년(乙未)현 위치에 복원하면서 정명진(1573~ 1635)과 정곤수(1560~1593)를 추배하였다.
충신 정분은 문종이 승하시 우의정으로 단종을 보호하도록 명을 받고 충성을 다하여 단종을 보호하다 1454년(단종2) 수양대군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정광로(1425~1496)는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을 보고 스스로 호(號)를 광노자(狂奴子)라 칭하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정명세는 정분의 5세손으로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장으로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1593년 6월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 촉석루에서 순절하였다. 정명원, 정곤수 도 임진왜란에서 크게 功을 세우고 순절하였다.
 

   
 

충렬사에는 충장공 정분(鄭?)을 주벽으로 효자공 정광로(鄭光露), 충의공 한온(韓蘊), 해미현감공 정명세(鄭名世), 청안현감공 정명원(鄭名遠), 온성현감공 정명진(鄭名振), 훈련원 판관공 정곤수(鄭崑秀)등 7位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陰 9월 9일 지역 유림에서 제향을 주관하였으나, 농촌사회의 고령화 등으로 2005년부터 후손 주관으로 제향을 봉행한다.
충렬사 전면 입구 우측에는 진주정씨삼세충효문(晉州鄭氏三世忠孝門) 정려(旌閭)가 위치한다.

   
 

이곳은 원래 1804년(甲子 순조4)충신 정분과 효자 정광로 충신 정명세 등의 충절과 효행을 기리기 장흥읍 충렬리 남문 밖에 세웠다. 1808년(戊辰 순조8) 진사 이기선 등의 상소로 나라의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위패를 옮기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모시도록 하는 부조지전(不?之典)의 특전을 받았다. 그후 1973년 목포~여수간 국도 확장 포장공사로 인하여 헐리게 되자 진주정씨 후손들의 헌성과 장흥군의 보조를 받아 충렬사 내 현 위치로 옮겨지었다.

정려 내 중앙 상단에는 忠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 贈諡忠莊公鄭?之閭 上之四年三月 日 命旌閭(충신 대광보국승록대부는 정1품의 품계다. 의정부 우의정 시호 충장공 정분의 정려로 1804년 3월 命에 의해 정려를 세웠다.)라 쓴 현판이 소장되어 있다.
하단에는 上之四年甲子四月(1804년 4월) 우참찬 등을 지낸 조종영(풍양人, 1771~1829)이 근지(謹識)한 정려기(記)가 소장되어 있다.
우측 상단에 孝子狂奴子鄭光露之門 上之十六年丙子七月 日 命旌(효자 광노자 정광노의 문으로 1816년 7월 명에 의해 정려를 세웠다.)라 쓴 현판이 소장되어 있다.
하단에 광노자정공정려기(狂奴子鄭公旌閭記)는 1819년(己卯)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이광문(우봉人, 1778~ 1838)이 지(識)한 정려기(記)가 소장되어 있다.
좌측 상단에 忠臣海美縣監 贈 都承旨鄭公明世之閭(충신해미현감 증 도승지정공명세지려)라 쓴 현판글과 하단에 예조참판 등을 지낸 오연상( 해주人, 1765~1821)이 찬(撰) 정려기(記)가 소장되어 있다.

중앙에는 충렬서원 강당 영모재(永慕齋)가 위치한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와가 건물로 1955년(乙未) 중수하였다.

   
 

건물 좌측 처마에는 충렬서원, 우측 처마에는 영모재 액호가 걸려 있다. 좌측 강당 출입문 위에는 부조묘(不조廟)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현판은 장흥읍 평장마을 진주정씨 충장공파 종가(17세 종손 정형용)에서 소장하고 있었으나, 1980년경 순천으로 이사 집이 헐리면서 이곳에 옮겨 걸었다고 한다. 부조묘는 "不遷之廟"와 같은 뜻이다. 즉 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을 말한다.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王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다. 따라서 불천지위가 된 대상은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어 가문의 큰 영광으로 받들었다. 陰 10월 13일 영모재 강당에서 효자공 정광로 등 4위에 대한 시제를 모신다.

영모재 강당 내 소장된 영모재기(永慕齋記)는 1953년(癸巳) 가을 온성현감공 사손(嗣孫) 방식(1895~?) 근지(謹識)하다.
1955년(乙未) 가을 충장공 사손(嗣孫) 한종(1889~?) 근지(謹識)하다.
충렬사팔경은 1957년(丁酉) 후손 제일(1889~?) 근고(謹稿)하다.
1957년(丁酉) 후손 용식(1901~?) 근고(謹稿)하다.
영모재판상운은 1955년(乙未) 가을 방촌리 태생 남곡 염석진(1879~ 1956)이 근고(謹稿)하다. 근차 1948년(戊子) 봄 2월 후손 래식(1909~?) 근고(謹稿)하다.
근차 후손 해영(1886~?)과 제일(1889~?)은 고(稿)하다.
근차 1948년(戊子) 봄 2월 후손 종식(1895~?) 근고(謹稿)하다. 후손 해명(1907~?) 근고(謹稿)하다.
근차 1948년(戊子) 봄 2월 후손 연우 근고(謹稿)하다. 근차 영모재운은 후손 고흥 연순(1928~?) 고(稿)하다. 근차 영모재운은 후손 화순군 연우(1909~?) 근고(謹稿)하다.
근차 1948년(戊子) 봄 2월 온성공 사손(嗣孫) 연찬(1929~) 근고(謹稿)하다.

본 사우의 규모는 400여평 대지에 충렬사 3칸, 구당(충렬서원, 영모재) 4칸, 외삼문(振綱門), 정려문각 1동, 직사 1동이 있다. 액호 5개 시운 편액 20개 등 총 25개의 편액이 소장되어 있다.
충렬사가 위치한 수리봉 일대 임야(150,000평)와 답(畓) 15두락은 정조 임금으로부터 사액(賜額)과 함께 받은 사패지(賜牌地)이다. 진주정씨 충장공파종중 소유로 관리되고 있다.

충장공파종중은 진주정씨 내 종파이다. 후손의 주요 세거지는 장흥군 장동면 조양리(관호,양곡), 함평군 학교면 죽정리, 화순군 북면 서유리 이다.

   
 

충렬사를 찾아가는 길은 장흥대로를 이용 안양면 모령리 풍암마을에서 용산면 계산리 차동마을 방향으로 가다보면 안양면과 용산면 경계 지역 도로변 우측에 晉州鄭氏禮葬山 표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우측 방향으로 진입하여 산길 농로 900여미터를 이용하면 된다
농로를 따라 300여미터 가다보면 우측 야산 바위 위에는 1955년 3월에 종손 한종(漢鍾) 등이 세운 晉州鄭氏禮葬四山 이란 비석과 전방의 수리봉 아래 위치한 충렬사 등 재각 건물이 눈에 들어 온다. 농로는 1975년경 진주정씨 충장공파종중에서 개설하여 선조 묘소, 사우 참배 및 지역주민들의 농로로 이용되고 있다.

필자의 견해 : 충렬사는 장흥군 내 위치한 3대 사액(賜額) 사우로 지역의 자랑스런 역사적 유적지이다.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문화환경 변화로 현세를 살아가는 후손의 입장에서는 선대의 유산과 문화를 존속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있을거라 본다. 본 사우는 충장공(鄭?) 등 배향된 훌륭한 선조 위상에 걸맞지 않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으면서 당국의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아 시설 중·보수 등 관리에 어려움이 뒤따르고 있다. 이에 대한 진주정씨 충장장공 후손의 진력(盡力)과 문화재 당국의 관심과 추진이 필요하다 사료된다.
자문 : 정용길(충장공 19세손 1959년생, 화순군 북면 서유리 태생, 곡성군 옥과면 무창리 거주), 정연재(충장공 17세 1963년생, 보성군 웅치면 용반리 태생, 수원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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