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이웃집의 누이가 귀성하였다. 누이의 엄니는 딸이 가져온 명절 선물을 집집마다 다니면서 자랑하였다. 색깔이 현란하고 감촉이 푹신한 담요와 각종 과자가 가득 들어 있는 종합선물 셋트 였다. 척박한 농촌에서는 보기 드믄  귀한 상품이었다. 그러면서 나누어준 과자 한 봉지가 맛이 있었고 이웃과의 정을 나누는 표시였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기억하고 있다. 그 누이가 경상도 마산의 H합섬이나 서울의 구로공단에서  하루 열두시간씩의 고단한 노동으로 꽃다운 청춘을 희생하며 객지에서의 고단한 삶을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치열하고 힘겨운 객지에서의 생활 속에서도 추석과 설날에는 고향을 찾아와 가족들과 만나고 정을 나누는 일은 모두가 기다렸던 소중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제공한 담요와 종합선물 셋트를 오롯이 들고 명절을 찾아온 발걸음이 얼마나 귀하고 반가웠던가를. 부모들은 아들 딸들의 노동 현장이 척박하고 고단한 것 이전에 그들이 가져온 선물을 자랑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 가녀린 위안의 시간들을 감내 하는 것은 언젠가는 풍요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고를 찾아 파독 광부를 지원했던 아들들, 중동의 건설 현장을 마다하지 않았던 아버지들, 베트남 파병을 두려워하지 않던 젊은이들...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어 버린 고통스럽던 시대의 화제들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는 국민소득 3만불 시대, 세계11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은 의식주의 척박함은 벗어난 풍요를 구가하고 있다.
장흥도 예외는 아니다. 지역적 시대적 문제들은 오늘의 대한민국 그리고 장흥이 극복해야할 과제이거니와 어김없이 찾아오는 명절에 비껴갈 수 없는 현안들을 돌아 보는 계기가 되어야 할것이다.

우리들의 형들과 누이들이 객지로 객지로 출향 하여서 한때는 14만여의 인구가 거주하던  장흥이 3만9천여명으로 줄어 들고 그래서 존립의 위기를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 하였다. 그래도 설날은 찾아 왔고 마을 마을의 공터와 골목에는 귀성한 자녀들과 친척들이 타고온 승용차들이 줄지어 주차하고 있다. 그 승용차들의 대열을 지켜보면서 희망을 잃지 않는다.
연노하신 부모들의 명절을 지키고 고향 장흥을 그리워했던 출향 장흥인들의 가족사랑과 장흥 사랑의 염원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명절의 짧은 기간 동안이라도 서로를 격려하고 사랑을 확인하고 덕담을 주고 받으면서 내일을 기약하는 설 날..,아직도 장흥의 미래는 언제나 희망적이라는 사실을 공유 하는 명절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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