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장흥 표고, 장흥 한우, 장흥 키조개’가 장흥지방을 대표하는 장흥 삼합(三合)이라지만, 지난 6~70년대 시절에는 달랐다. 
김(海衣)ㆍ반지락(斑蛤)ㆍ꼬막(甘蛤)ㆍ갑오징어ㆍ주꾸미ㆍ감태(甘苔)ㆍ파래(靑苔)ㆍ매생이(매山) 그리고 ‘물천어’ 정도가 친근했던 맛 아니었을까? 
<정묘지,1747>에 31종 土産品과 21종 進貢品이 나오는데, 오늘날과 그 사정이 꽤 다르다. 그때는 홍합(紅蛤) 전복(鰒)도 많았던 모양.
그 조선 중후기 무렵에도 ‘장흥 표고’는 있었고, '미역(藿)'이야 계속 있어왔다.
장흥 해우(海衣)와 매山이는 장흥사람들에 각별한 추억거리가 된다.
요즘엔 대덕 옹암 ‘매생이’기 옛 시절을 되살려준다. 甘苔는 매고, 매山이는 훑는다던가? 
간장에 찍어먹던 마른 甘苔에, 고급스런 감태지(甘苔 김치)도 있었다. 통째로 볶아먹던, 그 작은 ‘게(칠게)’도 생각난다. 꽃게는 없었다.
갈치 낙지 문어야 언제든 좋았고, 전어(錢魚)는 그리 귀한 취급은 받지 못했던 것 같다.
‘해우(김, 海苔)’는 海衣에서 온 말로, 그 성가가 높았다.
조선 초 기록에 언급되며, 1926년에 죽도 海苔연구소가 들어섰고, 1936년에 전국 생산량 1위를 기념한, ‘해태다수확 기념비’와 ‘조합20주년 기념비’가 세워졌다. 당시 조합원은 2500여명이었다 한다.
그리고 훗날이지만, 장흥해태 생산기술 진흥에 평생 진력한 '김도선' 선생의 공적비(1998)'도 회진 땅에 세워져있다.
대덕 옹암과 회진 이진목에 있는 ‘자지포(紫芝浦)’ 紫芝 역시 海衣 海苔에서 유래한 것. 공들여 만든 ‘김부각’ 별미가 좋았고, ‘김국’도 있었는데, 장흥 ‘무산 김’의 성가가 다시 높아지는 것 같다.
세상이 변하며 ‘반지락(斑蛤)’은 ‘바지락’으로, 석화(石花)는 ‘굴’로 굳어진데서, 요즘 ‘바지락 회무침’과 ‘굴구이’로 남았으며, ‘꼬시래기’도 자리를 잡아간다. 냉장시설이 없었던 시절엔 ‘된장 물회’의 유명세는 없었던 것 같다. ‘청국장’은 개인적으로 거리가 멀었고, ‘생고기 육회 비빔밥’ 역시 장흥 식당 메뉴로는 접할 수 없었다.
‘삭힌 홍어’가 물론 앞자리를 차지했지만, ‘간재미 무침’도 못지않았다.
장흥에는 ‘나주 곰탕’ 같은 브랜드 음식은 없었다.
장흥 하모(갯장어)와 굵고 깊은 16줄 장흥 참꼬막을 최고로 알았더니, 같은 득량만 저쪽에는 고흥 하모와 벌교 꼬막이었다. 한 바구니 가득 ‘삶은 꼬막’에 온 가족이 즐거웠고, 달리 ‘꼬막 비빔밥’은 없었다. 그 시절에는 졸이고, 무치고, 데치고, 지져 먹었다.
두터운 무우, 약간 말린 무우에 무우청시래기도 깔고 민물잡어를 얹어, 졸이고 졸인 장흥 ‘물천어’는 최상의 맛 아니었을까?
무논에는 우렁, 들판 도랑과 방죽에는 민물장어와 미꾸라지가 즐비했고, 또한 새벽에 민물새우(土鰕)도 잡았다.
예양강 은어(銀口魚)는 나중에 보니, 섬진강 은어보다 훨 작았고, 예양강 다슬기(고동)도 있었다.
만두 냉면은 없었으며, 여름에는 국수물에 설탕을 쳐서 먹기도 했다.
그래도 장흥의 미나리(芹)와 순채(蓴)는 구별해야 할 것 같다. ‘원도리 미나리’, ‘순지(蓴池) 순채’인 것이지, 그 순지 마을에 ‘미나리 蓴’은 없었다.
<장흥읍지, 마을유래지>는 ‘사라진 순채’를 두고 ‘미나리 蓴’ 인양 자꾸 오해한다.
장흥 미나리가 있었으니, 주꾸미 또는 갑오징어를 버무린 ‘미나리 초무침’이 좋았는데, 초(醋)는 막걸리 식초였다.
간척사업으로 사라져버린, 그 황금알을 낳던 장흥 갯벌이 아쉽기만 하다.
동네 골목길에 나뒹굴면서 쌓여가던 그 하얀 갑오징어 뼈가 생각난다. 오늘의 장흥 토요시장은 어떤 맛, 어떤 먹거리로 다시 채워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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