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제1회 '존재의 날'의 학술 발표회 2제 중 ‘존재의 생애와 사상’의 내용을 발췌한 글로 ‘존재의 생애’와 ‘존재의 사상’으로 2회에 걸쳐 전재한다...편집자 주>

존재 선생도 보통사람들처럼 살지 않으려했다. 어릴 때부터 조신(操身)을 위한 좌우명을 정해 실천했다. 존재 선생의 좌우명을 보면 세속적인 영달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가 구사했던 단어와 문장들은 과거에 급제해서 사회적 명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나 현인을 그리고 있음을 익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세상을 사는데 마음대로 살기란 어렵다. 나라는 존재의 출발은 부모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중략)...선생도 운명적으로 그 속성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과거는 개인의 신분을 하루아침에 상승시킬 수 있는 전기를 제공한다. 개천에서 자란 이무기가 용으로 변해서 승천하는 유일한 신분상승의 방법이기에 모두가 선망하고 있다. (중략) ... 선생이 과거에 매력을 잃은 시기는 10세와 12세 때이다. 과거시험의 기출문제인 강보나 강규를 보고 “갈 길이 아니다”라고 여겼다. 그 생각은 평생 동안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변사람들의 간절한 시선을 외면할 수 없어 30여 년 간 과장을 출입했다.

그는 시험장의 부정을 체험하면서 “도저히 합격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중략)...선생은 출세를 위해 서울로 가지 않았으며, 고문갑제들이 사귀자 해도 거절했다. 늦깎이로 ‘진사’에 합격한 것이 과장출입 30년의 수확이다. 어쩌다 작은 고을 옥과현감에 제수됐지만 그 것도 풍환으로 인해 1년여 만에 그만 둬야했다. 얼핏 보면 실패한 인생처럼 보이나 평가는 금물이다. 왜냐면 선생의 학문은 지금까지도 빙산의 일각만 알려졌기에 그렇다. 유고와 선행연구자들의 논문을 바탕으로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간략하게나마 더듬어본다.

■출생과 성장
존재선생은 계춘동에서 영이재공(詠而齋公 諱 文德)과 평해(平海) 오씨(吳氏)의 5남 3녀 가운데 장남으로 1727년(영조 3) 5월 15일 태어났다. 파조 안항공(顔巷公 휘 德厚)은 5대조, 웅천(熊川)현감을 지낸 정열(廷烈)은 고조, 동식(東寔)은 증조, 세보(世寶)는 조부이다. 자(字)는 자화(子華) 호(號)는 존재(存齋) 또는 계항(桂巷), 옥과(玉果)이다. 스승 병계(屛溪)가 서재의 이름을 ‘존존재(存存齋)’라 해서 부른 호이며, 계항은 태생지, 옥과는 말년에 현감으로 재직한 지명이다.

그가 태어나던 날밤 아버지 영이재는 꿈을 꾸었다. 하얀 용(白龍)이 뜰아래 우물로 내려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날 밤에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름과 자(字)를 ‘龍’ 자나 자를 넣어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공의 동생인 서계(書溪) 백순(伯純)이 지은 행장을 보면 어릴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다른 데가 많았다고 했다. 선생이 출생할 때부터 체상(體相)이 준수하고 엄연(儼然)하며 알고 깨달음이 침민(沈敏)하여 덕성이 혼후(渾厚)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넷째 동생(書溪)이 관찰한 선생의 모습은 이렇다.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편편하며 이마가 눈썹 위로는 넓고 아래로는 모가 나고 광대뼈는 위의(威儀)가 었어 보였다. 눈썹은 성글고 얼굴이 준수하며 수염이 가늘고 아름다우며 성글성글했다. 얼굴색은 검붉고 살짝 얼근 듯했다. 키는 8척이고 몸집은 비대하여 위의를 다시 강조하고 있다. 어릴 때 관상쟁이가 이 아이는 봉(鳳)의 눈과 ‘용(龍)’의 음성이라 장래 백세의 스승이 될 것이라고 했다고 예언했다고 전한다.

2세(1728 戊申) 막 돌을 지날 무렵이니 2세로 말귀를 알아들을 정도이다. 보통아이들은 아빠엄마를 겨우 표현할 때이다. 그런데 작은 할아버지 춘담공(春潭公 휘 世璘)이 무릎에 앉혀놓고 육십갑자를 가르쳐주자 줄줄 외웠다. 이때부터 천재성이 나타난 것이다.

3세(1729 己酉) 춘담공이 천자문을 가르쳐주고 며칠이 후에 책을 덮고 물어보아도 막힘이 없었다. 천(天) 아래 율(律), 아래 운(雲)과 지(地), 아래 여(呂), 그 아래 등(騰)등 상ㆍ하판의 글자를 맞췄다.

4세(1730 庚戌) 상상하기 어려운 기지(機智)를 보였다. 마당에서 놀다 동생이 마루에서 토방으로 내려오려 난간에 매달려 있었다. 그대로 놔두면 추락해 크게 다칠 찰나였다. 그는 마당에 있던 짚단을 풀어 난간 밑에 깔았다. 아기가 떨어져도 다치지 않게 충격방지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단순한 임기응변처럼 보이나 기민한 착상이 아닐 수 없다. 아이를 앉아 내릴 수 없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가장 적합한 대처방법인 것이다.

5세(1731 辛亥) 친할아버지 삼족당(三足堂)이 진초(眞草)로 쓴 사랑방 벽에 붙여있는 당음(唐音) 소시(小詩)에 대한 반응이다.『산 위에 뜬 달 촛불처럼 밝은데(山月皎如燭)/ 바람서리에 때마침 대나무 흔드는구나(風霜時動竹)/ 밤중에 새가 둥지에서 놀라니(夜半鳥驚栖)/ 창문 안에 사람 혼자 묵고 있네(?間人獨宿)』이란 절구를 춘담공이 풀어주었다.

「가을 집에 홀로 묵다(秋齋獨宿)」이라는 대목에 이르자 그는 “그 구절이 좀 이상하다”고 했다. 산 위에 뜬 달 촛불처럼 밝은데(山月皎如獨)/ 창문 안에 사람 혼자 묵고 있네(?間人獨宿)/ 밤중의 새가 둥지에서 놀라니(夜半鳥驚樓)/ 서릿바람 때마침 대나무를 흔드네(霜風時動竹)로 바꿔야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곧 시의 순서를 1-4-3-2로 바꾸는 게 낫다고 했다. 불과 5세의 나이에 진초의 글씨를 식별하는 것도 비범하지만 시의 순서를 바꾸자는 안목(眼目)이 예사 수준이 아님을 보여준 것이다.

6세(1732 壬子) 소학을 읽었다. 언해(諺解)와 삼성(三聲)과 전주(轉注)와 반절(半切)의 용법도 원칙을 이해했던 것이다. 전주는 상형(象形), 지사(指事), 회의(會意), 형성(形聲), 가차(假借)등과 함께 육서의 조자(造字) 원칙으로 두 글자의 뜻이 같아 호훈(互訓)한 글자이다. 즉 락(樂)자가 음악의 악(樂)자로 쓰이는 경우이다. 반절은 일종의 발음표기로 문(文)자의 음은 무(無)의 ㅁ과, 분(分)의 중성(ㅜ)과 종성(ㄴ)을 합쳐 ‘문’이 되는데 이를 무분반(無分反) 또는 무분절(無分切)이라고 표기하는 방법이다.

7세(1733 癸丑) 때 이웃집 모자(母子)의 싸움하는 모습을 보고 탄식했다. 그리고는「不善非人 不孝非人子」라고 종이와 팔뚝에 써서 조신했다. 곧 “선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고, 불효하면 자식이 아니다”는 뜻이자 “자신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의지다.

김석회교수는 선생의 생애를 5단계로 나눠 살폈다. 즉, ▷태어나서 24세까지를 자수면업기(自修勉業期), ▷25세부터 40세까지를 덕산수학기(德山修學期), ▷41세부터 54세까지를 궁경독서기(躬耕讀書期), ▷55세부터 71세까지를 강학저술기(講學著述期), ▷71세부터 72세까지를 사환와병기(仕宦臥病期)로 본다. (이하 생략)

■ 수학(修學)과 적용(適用)
학계는 존재 선생의 일생을 5단계로 나눠 설명한다. 이 같은 나눔은 무리가 없어 보인다. 다만 학문의 기초를 닦은 자수면업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은 작은 할아버지 춘담공(春潭公)의 가르침과 선생 자신의 탐구로만 보고 있다. 그러나 당시 선생의 주변에는 아버지 영이재공(詠而齋公)를 비롯해 종숙부 잉여옹(剩餘翁) 휘 명덕(命德), 종조부 간암공(艮庵公) 휘 세옥(世鈺)등의 지도를 받았음을 간과하고 있다. 이들 세분은 주로 장천재에서 독서하며 지내면서 선생에게 직간접으로 도움을 줬다.

이어 간암공의 주선으로 노론산림(老論山林) 중 하나인 충청도 덕산의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3~1767)를 사문(師門)으로 정한 25세부터 병계가 죽은 1767년(41세)까지 청장년기 15년 정도의 기간이다. 부친 영이재(詠而齋) 문덕(文德)의 서신에는 덕산수학을 ‘북학(北學)’으로 표현하고 있다. 겨우 20두락 정도의 농사를 짓고 사는 장흥 벽지의 한사층(寒士層)으로서는 호락(湖洛)이나 경사(京師)에게 유학(遊學)하는 것이 모험적인 결단에 의한 매우 특별한 기회임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다.

효도=孝란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천리에 어긋남이 없어야 비로소 효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증자(曾子)가 공자로부터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라는 가르침을 듣기 전에는 효에 대해 완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된 이후에야 효를 다할 수 있고, 효를 다했다면 효라는 명칭을 붙일 수 없다. 유우(有虞), 민자건(閔子騫), 왕상(王祥) 같은 사람들은 부모가 자애롭지 않아서 자신들의 이름이 저절로 들어난 경우이지만, 대순(大舜)에게 어찌 효자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으리오.

가중사시회음(家中四時會飮)=향음주례는 선생이 주관한다. 계춘동 자택이나 다산초당에서 매년 3월 15일, 6월 15일, 9월 15일, 12월 15일 4차례에 걸쳐 실시했다. 이때 영이재공과 오씨 어머니를 주빈으로 모시고 5형제의 가족들이 모여 진행했다. 부모님이 타계한 후로는 선생이 평소 존경한 어른을 주빈으로 모신 경우도 있었다. 한편 주례는 성종 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통해 일반화됐다. 주례의 절차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주인이 손님 집에 찾아가 초청하고 허락을 받는다 △향음주례 당일 아침 예를 거행함을 알리고 손님을 모신다 △대문 밖에 나가 손님을 맞는다 △손님에게 술과 안주를 대접한다
△ 손님이 주인에게 술을 권한다 △주인이 여러 손님에게 술을 권하며 풍악을 연주한다
△ 사회자를 세운다 △서로 차례차례 술을 권한다 △주인과 사회자가 여러 사람에게 술을 권한다 △음식을 거둔다 △폐회한다 △손님이 아무 말 없이 돌아간다 △손님이 다음날 다시 와서 예를 표한다

■과장출입 30년의 변
선생은 10세 때인 1736년(丙辰)에 사친(事親)을 수신의 목표로 삼았다. 만으로 9세에 이미 백행의 근본이 사친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몸을 닦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 수신은 사친이며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육아시(蓼莪詩)로 “쑥쑥자란 재숙이여 재숙이 아니라 쑥이로다. 슬프디 슬픈 부모 나를 낳느라 온갖 고생하셨구나”란 구절을 즐겨 읊었다.

더구나 과거에 의한 출사를 접고 ‘성인’이나 ‘현인’이 되려고 결심한 시기는 12세 때(1738년,戊午)이다. 시험의 기출문제집인 <講譜>를 읽으면서 인생의 방향을 바꿨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강보에 나온 과거시험은 진정한 인재를 발굴하려는 의도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러 서간에서 부모의 뜻을 저버릴 수 없어 과장을 출입했다고 털어놓고 있다.

과거시험 부정행위=세상의 모든 시험에서 커닝이 있다. 옛날에는 과장 내에 막걸리 장사들이 판을 펴기까지 했으며, 안동김씨 등 세도가들의 경우에는 아예 답이 주어졌고, 답안을 제출하는 방식도 집에 가서 답안지를 가져온다든지, 또한 감시의 임무를 수행하는 포졸들이 완성된 답안지를 가져다주도 했다. 이런 부정행위 중에서 숙종재위시기에 언급된 대표적인 폐단인 팔폐(八弊)를 강조해 작성했지만, 다음과 같이 20종 가깝게 부정행위가 횡횡했다.

△의영고(義盈庫) : 콧구멍 페퍼 △협서(挾書) : 붓 대롱 끝 페퍼 △고반(顧盼) : 옆 사람 답안지 베끼기 △낙지(落地) : 답안지 떨어뜨려 보게 함 △설화(說話) : 옆 사람의견 나눠 답안 작성 △수종협책(隨從挾冊) : 책을 가지고 들어 감 △암표(暗標) : 시험관과 표시해 알리는 방법 △외장서입(外場書入) : 시험지를 외부에서 들어옴 △음아(吟?) : 웅얼거려서 말해주는 방법 △이석(移席) : 자리 옮긴 부정행위 △이졸환면출입(吏卒換面出入) : 매수한 사람으로 교체하는 부정행위 △입문유린(入門蹂躪) : 응시자가 아닌 사람이 출입하는 것 △자축자의환롱(字軸恣意幻弄) : 답안지를 이리 저리 손봐서 합격하는 행위 △절과(竊科) : 합격자의 답안지의 이름을 바꿈 △정권분답(呈券分遝) : 시험지를 바꿔치기 △차술자작(借述借作) : 대리시험 △혁제(赫蹄) : 시험관 매수 △혁제공행(赫蹄公行) : 시험의 제목을 미리 아는 것 △선접군(先接君) : 미리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 사람 △ 거벽(巨擘) : 문제를 푸는 사람

■ 스스로 밝힌 낙방 이유
당시 과거는 인재를 효과적으로 선발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명문가 자제들을 과거라는 길을 통해 발탁하는 길로 이용했다. 합격자는 미리 예약돼 있었다. (전략) 그러나 저는 분수를 편안하게 하고 운수에 맡겼기 때문에 패강(한강)을 건너면서 눈물을 머금지 않았습니다.

지금과 같은 세상에 태어나서 이름을 구하고 출세코자 하는 자 중에 어찌 나처럼 괴물과 같은 자가 있겠습니까. 저는 과거장의 글(程文)이나 과거시험에 쓰이는 문체(科體)를 구차하게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향해(鄕解)에서 매양 패배를 보았습니다. 과거를 보는 것은 소시 때에 맹세하기를 사십을 넘지 않으려고 했으나 양친의 성심으로 운수를 감흥시켜 되돌리어 39세에야 성균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대과인 즉은 본시 바라던 바의 밖에 있었습니다.

■ 평생 敎育者
선생의 평생 직업을 무엇으로 볼 수 있는가. 교육자다. 즉, 계당학숙, 귤우헌 양정숙, 사강회, 다산정사 등으로 전 생애를 관통하고 있다. 따라서 감농가와 함께 교육자임이 분명하다. 22세 때인 1748년(戊申), 29세 때인 1755년(乙亥)에 귤우헌(橘友軒)에서 양정숙(養正塾)을 운영했다. 다만 사실상 서당운영의 시초는 17세 때인 1743년(癸亥)부터로 볼 수 있다. 서당을 열지는 않았지만 이미 인근에서 많은 학생들이 찾아와 가르쳤기 때문이다.

향약이자 향촌발전을 위한 사강회(社講會)는 독특한 운동이다. 39세에 생원시(小科)에 합격한 후 진사의 신분으로서 시작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는 주경야독의 형태가 아닌 농사현장에서 쉬는 틈을 이용한 교육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특정지역의 미풍양속을 순화하기 위한 축소된 향약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강회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교육인 것이다. 그것도 거의가 일가의 후손을 대상으로 삼았기에 유별나다.

당시 방촌은 그만한 여건이 갖추어져있었다. 오덕의 후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가장 큰 관심사는 자식들에 대한 교육이었다. 이곳은 국토의 끝자락에 위치한 벽항이지만 다른 촌락과는 달랐다. 그 원인은 고려 때 정안현(定安縣)의 치소가 1379년까지 방촌에 있었다.
특히 공예태후가 당동(堂洞)에서 태어났다는 흔치않은 역사도 있다. 읍민들의 의식과 왕비의 태생지 등의 이유들이 작용하는 정서로 볼 수 있다.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