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은 통제사로 임명되기 직전에 250척의 판옥선 함대를 구성하면 남해안권역 어디든 상관없이 해상을 장악할 수 있다는 장계를 올린다. 그리고 자기의 마스터 플랜을 완성하기 위해 지방관으로 이름 높던 반곡 정경달을 직접 찾아가 통제사 종사관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 충무공의 종사관이 된 정경달은 호남지역 일대에 둔전(屯田)을 운영하고 고기잡이, 소금생산, 그릇을 제작하여 이를 군량으로 바꾸어 충무공의 수군에 큰 힘을 보태 주었다고한다. 당시 체찰사로 내려와 현지상황을 본 이원익도 크게 감명받을 정도였단다. 물론 반곡에 대한 통제사 이순신의 신임이 두터웠다. 군영을 비우고 작전을 나갈 때는 반곡이 본영의 살림과 운영을 대신할 정도였다. 이처럼 반곡의 활약으로 정유재란을 바로 앞둔 시점에서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180여척 전선을 보유한 거대한 함대로 재건되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옥에 갇히자 많은 사람들이 탄식을 하였다. 뜻있는 선비들은 그를 구명하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다. 병조판서 이덕형은 혼자 선조 앞에 나아가 이순신의 목숨만은 구해달라고 애걸한다. 전라우수사 이억기도 "수군은 얼마 못 가서 패배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디서 죽을지 모릅니다”고 주청한다. 그 말대로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1597년 7월16일 칠천량 전투에서 몰살했고 이억기도 전사한다.

반곡 정경달 선생도 선조 앞에 나아갔다. 그는 선조에게 “이순신의 애국심과 적을 방어하는 재주는 일찍이 그 예를 찾을 수 없습니다. 전쟁에 나가 싸움을 미루는 것은 병가의 승책인데 어찌 적세를 살피고 싸움을 주저한다 하여 죄로 돌릴 수 있겠습니까? 임금께서 이 사람을 죽이면 나라가 망하겠으니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이순신의 석방을 간곡히 주청한다. 반곡 선생은 이에 그치지 않고 유성룡과 이항복을 찾아가 이순신 구명운동을 한다. 그들이 정경달에게 원균과 이순신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말해 줄 수 있는가 묻자 정경달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는 말로 해명할 일이 아닙니다. 제가 보니, 이순신이 붙잡혀 가자 모든 군사들과 백성들 중에서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통제사가 죄를 입었으니 우리는 어떻게 살꼬’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 시비를 알 것입니다”라고 답변한다.

이런 반곡선생이 우리에게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남겼다. 임진왜란을 몸소 겪은 경험을 남긴 것으로 다산 정약용은 ‘제반곡정공난중일기(題盤谷丁公亂中日記)’라는 발문을 남겨 이 책을 매우 높게 평가하여,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이라면 자세하고 꼼꼼하게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고 한다. 다산은 특히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 백사 이항복의 <임진록(壬辰錄> 조차도 임진란의 현장을 생동감으로 보여주는 면에서는 반곡의 <난중일기>를 따르지 못한다고 높이 평가했다. 충무공의 <난중일기>가 해전(海戰) 위주로 기술되었다면, 반곡의〈난중일기〉는 육전(陸戰)의 난중일기로 충무공의 난중일기와 구별하여 <반곡 난중일기>로 불리어진다.

반곡 정경달선생은 1542년 장동면 반산리 출신이다. 벼슬이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이 시작될 당시 경상도 선산군수로 군사를 모아 경북 금오산전투에서 크게 승리하기도 하였던 임진란의 영웅이었다.

그 반곡선생의 <난중일기>가 한글로 번역된다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다만 그것이 반곡선생의 출생지 장흥군이 아닌 보성군이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과 힘을 합쳐서 추진한다는 소식에 아쉬움이 있다. 누군가가 나서서 위인의 현창사업을 한다는데 시비가 있을 수 없지만 반곡선생의 출생지인 장흥군에서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은 아닌지 아쉬움이 있다.

선열이 남겨준 기록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뿐만 아니라 우리를 더욱 깊고 향기롭게 한다. 특히 인문학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현대의 디지털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인문학 열풍이 불고 요즘은 문화가 답이라는 말이 당연시 회자된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반곡선생의 고향인 우리 장흥에서 그 분에 대한 조명사업이 활발하게 일어나면 좋겠다. 반계사에 반곡선생의 유물관을 짓는다든지, 반곡선생, 풍암 문위세 선생 등 임진란, 정유재란 때 장흥 출신 영웅들을 기리고 현창사업이 펼쳐지길 기대해 본다. 문림의향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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