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형식적 실험은 한국 시단에 고마운 일이다.
예술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이 필연의 어떠한 관계라고 말하면서도
…몇 편 되지 않는 것이라서 쉽게 규정할 수 없지만
그가 전위적 형식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인 전기철은 1954년 장흥출생으로 숭의여자대학교 교수이다.
89년 <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나비의 침묵’, ‘풍경의 위독’,‘아인슈타인의 달팽이’,‘로깡땡의 일기’등이 있다.
이번에 새 시집‘누이의 방’이 실천문학사에서 발표했다.
진보적 시인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고뇌, 진보적 교수로서 사학재단 교수사회에서 살아가는 고뇌, 시골출신 가장이 도시인 가족을 책임지며 살아가는 고뇌...태생적 한계와 현실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는 이 시대에 분노하는 지식인의 리얼리티의 속살, 아픔의 속살 같은 것들을 가감없이 그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대식 시인의 시평을 지난 <627호>에 이어 게재한다. <평집자 주>


“오늘은 예이츠가 죽은 날/그날처럼/눈 내리고 춥다.//바람이 어둠과 범벅이 되어/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거리에서/떨고 있는/나의 누이, 플라타너스여,//아직 나는/유년의 대륙을 찾지 못해/고독을 어깨에 짊어지고/증오를 직업으로 삼은 채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왜 이렇게/그리움은 쉽게 마모되고/희망은 마약인가./가진 자들이 사이코패스가 되어 눈을 부라리는//엄흑한 세상에서/나는 저주받은 시나 쓴다.//나의 누이, 플라타너스여,/내 유년의 대륙으로 가고 싶다./그곳에 가서/쓸모없는 나무가 되고 싶다.//오늘은 예이츠가 죽은 날/불평 많은 나의 시를 데리고/이니스프리로 가고 싶다."-‘플라타너스 전문’

아일랜드 사인 예이츠를 추모하는 형식으로 쓰인 이 시에서 두 가지 욕망을 엿볼 수 있다. 하나는 유년의 대륙을 찾고 싶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니스프리로 가고 싶다는 것이다. 유년의 대륙은 그리움이나 희망이 살아 있는 시원의 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 하우스’에서 “바이칼로 가는 꿈을 결코 접을 수 없다”는 다짐에서의 바이칼이라는 공간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곳은 때 묻지 않은 곳이라는 점에서 예이츠의 시 ‘이니스프리의 호도’의 이니스프리와 같은 성격의 공간이기도 하다. 저주받은 시를 쓸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때 묻지 않은 유년의 대륙에 가서 ‘무용지목(無用之木)’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그가 투신한 문학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문학의 현실적 쓸모없음이 가장 훌륭한 문학의 쓰임이라는 아이러니에는 문학에 전적으로 투신한 한 시인의 욕망과 좌절이 음각되어 있다. 그것은 따라서 결국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그래서 의미 있는 문학 발생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지막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불평 많은 나의 시를 데리고/이니스프리로 가고 싶다”는 욕망 속에 그의 곤고한 삶과 문학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브레히트와 더불어 예이츠에 대한 전기철의 애정은 각별하다.
“친구야,/별이란 다른 시간에서 달려오는 거야./나는 네 밤의 장기 투숙자가 될게./네가 보고 싶으면/외로운 공중전화 부스에서/너의 별에 전화를 걸게./예이츠의 보름달이 뜨면/하루를 반으로 찢어서 너에게 편지도 쓸께.”-‘풍금’부분

“예이츠의 보름달”은 예이츠가 쓴 시편 가운데 보름달 아래 명상이 담긴 시편이다. 사실 예이츠는 이러한 목가적이고 명상적인 시도 썼지만 신화를 바탕으로 난해한 글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전기철이 주목하는 것은 전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전기철의 작품들은 오히려 자아와 세계의 갈등 양상이 첨예화된 예이츠의 중기 이후의 시편들과 유사성이 있다.
전기철이 예이츠의 초기 시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무의식 어딘가에서 자아와 세계의 온전한 결합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메마른 듯 보이지만 종종 그의 시에서 우수에 가득 잠겨 있는 풍경이 발견되는 경우는 대체적으로 지상의 것과 결별한 혹은 비현실적인 것들에 대한 발화가 주를 이루고 있을 때이다.
현실에서의 자아는 늘 고통의 그늘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누이야,/나도 권선징악이 있고/해피엔딩이 있는 세상으로 가고 싶어”(‘부러진 봄’)에서 보듯 유토피아 혹은 자연이나 일상으로 희귀하고 싶은 욕망이 그에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스스로를 “나는 고립된 국가야. 촛불처럼 홀로 깜박거리지”(‘천 개의 도시’)라고 규정하고 있다

“아무도 나를 읽을 수 없다네./달로 이민을 가려고/야곱의 사닥다리를 오르며/죽은 자들과 친구하고//산 자가 그리우면/산 너머/떡갈나무에게 하소연하는/나는 불운의 연습장/고독의 전단지라네.(중략)..나의 시는 어둠을 아는 장님이 읽고/절망 너머를 볼 줄 아는 자만이 읽는다네./지구가 도는 소리를 듣는/나는 이 세상의 낙오자라네.” -‘시인의 영토/부분

자신과 자신의 시에 대한 이 도저한 부정의 기원이 무엇인가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나마저도 사물 A,B,C로 규정되는(‘여름가족’)일이 그의 감각의 촉수로 걷어 올린 이 세계의 풍경이다. 그렇다면 참된 아트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지만 전기철은 이 부분에서 영성을 바탕으로 한 참 자아에 대한 탐구를 포기한다. 방기한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오히려 그 진창의 세계로 한 발 더 들어감으로써 세계와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동양의 미덕이란 존재의 무화에 있을 터이지만 전기철은 자신앞에 놓인 신(세계)과 투철한 싸움을 감행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밝히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그랬을 때 자신의 실존의 문제를 다시금 생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산, 아니 요한은 왜 유배지에서라도 다시 신을 찾지 않았을까. 바람이 몇 장의 하늘을 걷어낸 계절 속에서 들어가 보면 달이 도는 소리인지 지구가 도는 소리인지 시간의 소음이 요란하다.”-‘다산은 왜 요한을 배반했을까' 부분.

한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문제 삼고 있는 이 시는 요한이라는 세례명까지 받은 다산 정약용이 왜 신의 존재를 끝까지 부정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 명상한다. 베드로와 같이 인간의 한계 때문에 신을 몇 번 부정하고도 다시 신을 찾는 모습은 오히려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다산이 그의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몰고 간 신의 존재를 끝까지 외면한 이유에 대해 시적 화자는 알고 싶어 한다.
그것은 단순히 한 실존을 넘어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등가의 것이기에 그의 질문은 집요하다. “요한, 아니 다산이 신을 배반한 영혼의 길은 곡선일까 직선일까?” “다산이 신을 배반한 영혼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등의 물음을 통해 인간 너머에 도사린 허기진 영혼의 쓸쓸함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지금 여기의 상태를 “배고픔을 달랠 곳을 찾지 못한 채 걷고 있다”고 말한다. 영혼의 배고픔이야말로 전기철 시의 본령이라 할 수 있다. 이 세계는 영혼보다는 물질에 더 가깝기 때문에 그의 외로움은 깊어간다.
전기철의 이번 시집이 가진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정치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가 편년체(編年體)의 방식으로 구성된 시가 여려 편 있다는 것이다. 이 시들은 연월에 따라 역사를 기술하는 역사 편찬의 한 체제를 빌려 세계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약 아이’,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슬픈 피에로’ 등의 작품이 그것으로 ‘오바마 모년 혹은 이명박 모년 모월 모일’ 혹은 ‘이명박 모년 모월 모일모시’와 같이 연대를 기록하는 수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바마 2년 혹은 이명박 3년1월2일 눈이 뿌리다./파키스탄에서 폭탄 테러가 있었다. 지구상에서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용산의 전쟁은 한쪽에서는 끝났다고 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보스(Hieronymus Bosch)의 돌이 머리에 너무 깊이 박혔나 보다. 머릿속에 목소리가 많이 들어와 있다. 나는 아침부터 루터의 잉크병을 던지며 법석을 떨었다. 눈은 먼 산에서 시대에 대한 성명서를 펼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가격표들이 둥둥 떠다녔다. 나는 청동 소녀의 슬픈 책 속을 더듬는다. 소녀의 책은 너무 시끄럽다.”-‘약아이’부분

오바마는 미국의 상징으로 미국은 끊임없이 경찰국가를 자임하여 세계의 모든 분쟁에 개입해왔다.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위시한 아랍의 수많은 분쟁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 시적화자는 부조리한 폭력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사실을 오바마 연대로 기술함으로써 그 부당함을 고발하고 있다. 이명박의 연대도 마찬가지이다. 처참한 용산 참사는 기층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지만 기득권들에게는 지나간 과거의 한 사건에 불과한 것이다. 다른 한쪽에서는 끝났고 다른 한쪽에서는 끝나지 않은 사건이 동일한 공간과 시간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 사회의 대립적 모순을 선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정치적 사건에 대한 그의 진단과 태도는 지극히 상징적이다. 히에로니무스 보스라는 네덜란드 화가의 작품 ‘돌 수술’을 끌고 와 자신의 머리에 돌이 너무 깊이 박혔다고 고백하고 있다. 돌 수술은 머리에 박힌 돌을 제거하면 멍청함을 고칠 수 있다는 일종의 사기였는데 그림에는 아이러니하게 신부와 수녀가 수술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보스의 작품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어리석은 환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 고백한다. “루터의 잉크병”은 교황에게 반기를 들고 비텐베르크 성에 은둔하며 라틴어 성경을 번역하던 루터의 상징이다. 고난의 은둔 생활 속에서 한 번만 양보하면 편안한 삶을 보장받지만 그러한 마음이 들 때마다 벽이나 책상에 잉크병을 집어던지며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소리쳤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돌 수술을 받는 환자와 루터는 상반된 인간형이다.
기존의 말도 안 되는 관습에 복종하는 어리석은 인간형과 문제의 근원을 타개하기 위해 스스로 뼈를 깎는 깨어 있는 인간형을 동시에 자신에게 대입한 것은 말 그대로 자아 정체성의 혼돈이다.
이 혼돈은 사실 지구 곳곳에 전쟁이 일어나고 부당하게 사람이 죽어가고 제 머리에 총을 겨누는 소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이 세계에 대한 반작용에 가깝다. “고양이가 순례하는/포연이 아직 남은 도시/시체를 먹는 개들이 도마뱀처럼 눈을 씻는 도시에서/삶을 연습하는 사람들”(타르코다르2)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이며 또한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기도 한 것이다.


제3부에 실린 일부 시편들은 형식적으로 굳이 이름 붙이자면 이중주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 이중주 형식은 어느 하나의 시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 방해가 전기철 시인이 의도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 분열의 양상을 통해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에 나타나는 조롱과 야유가 풍자가 되지 않을 때 그 깊은 곳에서 종종 낭만주의적 태도를 만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형식적 실험은 한국 시단에 고마운 일이다. 예술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이 필연의 어떠한 관계라고 말하면서도 한국 시가 형식적으로는 지나치게 산문시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몇 편 되지 않는 것이라서 쉽게 규정할 수 없지만 그가 전위적 형식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글을 쓰고 나니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그와의 혼돈의 심교가 후회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미 쏘아버린 화살이다. 그와의 지난날을 회상하며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의 인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그 곁에서 다음의 시 한편은 이 겨울 두고두고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밤이 늦어서야 돌아오는/흰 소가 끄는 수레//어둠이 찰랑거리는/수수께끼의 고요//밤이 오선지 위/흰 소의 발자국//뛰노는 말들/흰 소의 말들//불빛, 가물거리는/잊었던 말들//방죽, 별자리, 수탉의 잔소리, 달의 빈정거림/새처럼 날지 못하는 말들//한밤의/흰 방울소리”-‘눈오는밤‘ 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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