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한모 씨(농업기술센터 기술담당관)가 지난해 2011년 12월 23일 정년퇴임식을 갖고 41년 동안의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이날 퇴임식에는 350여명의 관내 농업인들이 참석, 공직에서 떠나는데 아쉬움을 함께 나누고 퇴임 이후의 변 씨 앞날을 축하했다. 이날 변한모 씨는 대한민국 녹조근정 훈장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42개 기관단체, 작목반, 법인체등에서 그동안의 공로를 치하하고 감사를 표하는 공로패, 감사패, 기념패 그리고 축하 화환이 전달되어. 그동안 지역 농업 발전에 크게 기여해 온 그의 공로와 발자취를 가늠케 했다.

다른 무엇보다 변씨를 감동케 한 것은 그와 동갑계인 신묘회(회장 문경호)로부터 받은 ‘퇴임 기념의 글’.

친구들은 이 글에서 “자신의 가정보다 농업인을 위한 일에 구슬땀을 흘리며 열심히 농업현장에서 탁주 한 잔 나누며 고뇌와 괴로움을 나누었던 친구, 항상 반갑게 맞아주고 친구들의 일에 내일같이 ‘짖궂은 일은 내가 좋은 일은 네가’ 라는 자세로 같이 하여준 의리와 정이 넘치던 친구, 감춤이 없는 직설적인 성격에 강자에게는 범같이 약자에게는 양같이 오해를 받을 때도 있었지만 지나보면 마음이 여린, 사심이 없던 친구….”라는 내용이 담겨 변 씨가 살아 온 61년의 인생, 41년의 공직생활을 말없이 웅변해 주었다.

이날 퇴임식에 참석한 한 농업담당 공직자는 “선배 담당관님의 퇴임식을 지켜보며, 변선배님처럼 많은 업적을 남겨 떳떳하게 공직을 마감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편 이날 퇴임식에 군수는 물론 군의장, 군의원 중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점에 대해 한 농민은 “농업직을 경시하는 풍조는 여전한 것 같다” “행정직 공무원이었다면 이랬겠느냐? 농업직이다 보니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녹조근정훈장 수상, 41개 단체등 공로ㆍ감사패 등 받아
하우스 80여ha→140여ha, 연 60억 소득창출에 기여
호도 특화ㆍ보급, 버섯 프로젝트 수립, 버섯산업화 기여

■변한모 씨 누구인가?

“제 인생의 절반을 살아온 가운데, 41년여의 공직생활을 마무리 하는 자리에 격려를 주시기 위하여 귀중한 시간을 같이해준 내외 귀빈과 동료직원 및 군민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가정을 잊고 오직 공직 생활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하여준 저의 아내(이영자)에게도 이 자리를 빌어 사랑한다는 말로 보답하겠습니다.

또한 부족한 저를 같이하여 주시고 지혜를 한데 모아 어려움과 역경을 헤쳐갈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준 농업기술센터 동료직원 여러분과 군산하 동료 공직자 분과 장흥군민, 그리고 학습단체 회원 및 농업인께 이 자리의 영광을 드리며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농업기술센터 내의 직장훈으로 ‘양심, 열심, 합심’ 이라는 삼심의 마음으로 살자, 라는 좌우명을 책상 앞에 붙이고 양심에 따라 일하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모두 같이 울고 웃으며 살자고 노력하여 왔습니다만 저의 부족함 때문에 물음표를 남길 수 밖에 없지 않나 봅니다….”
이렇게 시작한 이날 변한모 씨의 퇴임사는 비장하기까지 했다.

변 씨 고향은 용산면 관지리다. 4남3녀 7남매 장남으로 태어났다.
용산초등(35회), 장흥남중(현 관산중. 15회), 광주농고농업과 졸업(58회)등을 거쳐 1970년 지방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 용산면사무소에서 면서기로 공직을 출발한다.
농업인의 아들로 태어난 변 씨는 농업학교를 졸업하면서, 농업을 통한 잘사는 농촌을 이루어 보고자 하는 조그마한 소망이 있어 면서기의 길에서, 1971년 국가농촌지도직 공채시험에 응시한다.

공채시험에 합격, 1972년 3월 1일자로 장흥군농촌지도소 현 농업기술센터에서 햇병아리 지도사로 출발한다. 그 후로 기술센터에서 40년의 농업담당의 공직이 이어진다.

■장흥 농업기술센터에서 40년

“저는 제 고향 장흥군에서 유일하게 한 번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장흥군농업기술센터의 한 부서에서만 운 좋게 재임할 수 있었던 행운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40여년이었지요. 따라서 이는 제 인생에서 큰 보람이었고 무엇보다 장흥군농업인과 함께 할 수 있어 참으로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시절을 회고하는 그의 얼굴에 수심이 깊어진다.
“실컷 쌀밥 한번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1970년대였습니다. 통일벼 보급, 새기술 교육이 당시의 최대 과제였습니다. 울퉁불퉁 논두렁길을 누비며 징검다리 실개천을 건너서 벗겨진 자전거 체인에 시커멓게 변해버린 손발을 후후 불어가며 농촌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어요….농촌지도자회, 4-H회, 생활개선회를 조직하고 낮에는 식량증산 현장지도에, 밤에는 기술교육을 위한 월례회를 참석하며,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기쁜 일 슬픈 일 같이 하면서, 밤과 낮이 없었을 때 가을들녘에서 두 손을 꼭 잡으며 ‘진즉 통일벼 나락이 나왔으면 우리 아들 고등학교도 보내고 했을 텐데’ 하며 아쉬워하던 한 농업인의 말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그래서 지도사는 선생님으로 통하였습니다. 논 한마지기에서 한 섬 두 섬 먹기도 어렵던 시절, 넉 섬 닷 섬의 쌀을 수확할 수 있게 되다 보니 고마움의 표시로 자기 집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던 달걀 하나를 덥썩 가져다주며 고마움을 표시하던 정을 보람으로 여기며 농촌지도사의 긍지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1980년대는 녹색혁명의 완수로 배고픔이 해결되어가는 시대였다.
이때는 밭작물의 비닐멀칭 재배기술 보급과 비닐하우스 보급을 통한 계절 없는 신선채소와 과일을 먹을 수 있는 백색혁명시대로 접어든다.

“기계모내기 이앙기를 처음으로 도입, 누구도 쳐다보지 않던 기계모내기 기술을 보급하던때, 기계 모내기는 안 된다며 논두렁에 누워버린 아주머니를 설득시키고 상자 기계 모내기 기술 보급을 통한 쌀농사 기계화에 목숨을 걸었던 일도 새롭습니다.”

1990년대 들어 식량작물계에서 수도작 업무를 담당할 때였다. 변 씨는 처음으로 보급되는 어린모 기계 모내기 생력재배 기술보급에 앞장서, 못자리 설치 노동력 62%, 자재비 43%를 획기적으로 절감시키는 기술 지도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오늘의 상자육묘 기술을 정착 시킬 수 있기도 했다.

■1990년대 지도기획계장, 기술보급과장

변 씨는 1993년부터 1997년까지는 지도기획계장으로 재임하게 된다.

당시 ‘농업인과 함께 하는 활기찬 농촌지도’ 라는 슬로건으로 농업기술센터의 빈약한 시설확충을 위하여 국비를 유치, 현재의 농업기술센터 자리에 첨단기술관을 신축하고 조직배양실, 종합검정실 설치, 그리고 교육강당을 확보하게 된다.

또 기술센터 앞마당 주차장 부지, 정원부지를 매입하고 건물 뒷면 옛 측우소 부지를 기술센터로 편입, 테니스장 설치 등 지도업무 능률향상과 근무여건을 개선시키게 된다.

또, 1997년부터 1999년까지 기술보급과장 재임시, 소득 기반이 취약한 지역농업 소득향상을 위해 저비용 비가림하우스 보급, 1억 소득 거점단지 조성을 추진, 시설하우스 면적이 80여 ha에서 140여ha로 늘어나 연간 60억 이상의 소득창출 효과를 가져 오도록 하는데 기여한다.
“장흥 딸기의 경쟁력 향상을 위하여 ‘딸기 재배 100문 100답’ 책자를 발간, 배부하고 장동면 우산리에 고냉지 육묘장을 설치보교조생 품종을 시장성이 좋은 육보 품종으로 갱신시키기 위해 천관딸기 작목반 회원들과 웃고 울었던 일이 새롭습니다.

또 장흥 특산품인 호도나무의 특화와 보급을 위하여 누구도 안 된다던 번식기술을 개발하여 오늘의 귀족호도 박물관이 탄생하고 장흥의 명품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하는데도 저의 노력이 적지 않았습니다.”

■2000년 이후 기술담당관 재임

변씨는 2000년부터 현재까지 기술담당관으로 재직한다. 농업기술센터에서 최고위직에 근무하면서도 그의 열정은 식지 않는다.

버섯 고장으로서의 위상정립과 경쟁력 향상을 위하여 버섯종합단지 프로젝트 계획을 수립하여 국비 35억을 확보하였고 이어 장흥군버섯연구소 설립, 정남진 종균분양센터 설치(37억), 우리 군에 맞는 새로운 사계절 버섯재배사 모델을 개발 보급했던 일도 변씨의 주력 업무였다.
또 장흥한우의 명성과 기반구축을 위하여 ‘혈통한우입식사업’을 추진, 오늘의 장흥한우 명품화 특화사업이 선정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일도 변씨 노력의 결과였다.
“개방화 파고 속에서 ‘장흥 쌀만은 살려보자’는 일념으로 추진한 장흥군의 얼굴 쌀인 아르미쌀 생산단지 조성, 진흥청 브랜드쌀 육성 탑라이스단지 유치를 추진했습니다.

이를 통하여 탑라이스 쌀은 국무총리상을 수상, 세계에서 가장 으뜸가는 쌀이 장흥군에서 생산되고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 주었고, 아르미 쌀은 전남 10대 브랜드 쌀에 입선시킬 수 있었습니다.

또, 농업인이 생산한 농산물의 출하조절과 상품성 제고를 통한 제값받기를 위하여 소형 저온저장 예냉고보급사업을 기획하여 추진하였고, 정부에서 오리사육농가 지원정책이 전무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차에, 오리사육 농가의 어려움 해결을 위하여 오리를 정부지원정책에 포함시켜 달라는 농수산부 건의를 통하여 시설 등 방역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던 일은 지금도 가슴 뿌듯한 일이었습니다.“

■아쉬움도 많다

“아쉬움도 작지 않습니다. 80년대 장동, 장평의 광활한 야산을 개발하여 배나무 단지를 조성하여 소득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켜 보고자 노력하였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일이 그렇고, 저비용 비가림하우스 보급이나 농산물 출하조절 저온 예냉고 보급, 소형 고추건조기 보급, 오리사육농가 시설개선 지원, 농산물가공시설 보급, 딸기베드 재배시설 보급, 저비용 친환경자재 기술보급 등등은 보다 확대 보급하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아쉬움으로 만감이 교차 합니다.”
아직도 할 일은 많은데 그 일의 현장에서 떠나게 되어 아쉬움이 크다는 변한모 씨.

“농업기술센터는 지금의 나를 완성시킨 고향입니다. 농업기술센터가 그동안 여물지 못한 나를 이만큼 성장하게 하였습니다. 나는 이제 현직의 옷을 벗지만 고향의 군민과 함께 장흥에서 살아갈 겁니다.”

변한모 씨. 그는 앞으로 고향마을에서 농사도 짓고 한가로우면 여행도 다니며 공직생활 중 갖지 못했던 삶의 여유도 찾아보겠단다. 그의 앞날에 신의 축복을 기원한다.
변씨는 아내 이영자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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