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몫은 외로운 영혼 위무” 숙제 기억합니다
미백 선생님,

선생님을 여읜 큰 슬픔을 그 어떤 필설이 있어 감히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망연자실, 우주의 리듬이 크게 요동치는 혼돈 속에서 그저 허허롭게 시름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한평생 오로지 문학 외길에서 한국문학의 르네상스를 주도하시고 세계문학사를 새롭게 열어 오신 선생님의 생을 반추하노라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소설 작업과 관련하여 선생님께서는 ‘밤길 독행자’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무서운 산속 밤길을 가다가 도중에서 마주 오는 사람을 만나면 서로, “좀 전에 당신 앞서 길을 간 사람이 있었다”고 일러준다는 얘기 말입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건 없었건 “그런 말로 상대방의 밤길에 위안과 용기를 주기 위함”이었다고 하셨지요. 깨어진 영혼들을 위해 건네는 밤 산길 독행자의 위로의 말로 문학을 비유하셨는데요. 실제로 선생님께서는 현실에 지친 영혼들을 위한 위로의 말을 늘 새롭게 건네시는 데 평생 헌신하셨습니다.

자유와 억압, 용서와 복수, 이상과 현실, 존재적 언어와 관계적 언어, 개인의 진실과 집단적 꿈 사이에서 고뇌하면서 이를 종합하기 위한 선생님의 서사적 노력은 가히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현실에서 맺힌 한들을 말로, 소리로, 풀어 한맺힌 영혼들을 위무하려 하셨던 선생님의 문학은, 자유로운 영혼의 비상학을 위한 헌가(獻歌)였습니다.

어느 순간에도 선생님께서 이루신 자리에 머물지 않고[成功而弗居], 부단히 열린 산문정신으로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 보이려 하셨습니다. 독자들의 온갖 찬사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늘 당신 작품에 대해 부끄러워하시며 당신의 허물을 들추어내시려 하셨습니다. 20년 넘게 선생님을 뵈었지만 늘 한결같은 모습이셨습니다. 진정한 대가, 가장 진실한 문학적 장인의 풍모는 언제나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시던 선생님께서 이제 영원한 안식의 문을 여셨습니다. 지난 4월22일부터 2박3일간 선생님 고향인 장흥으로 남도 여행을 함께 하기로 했었지요. 마지막으로 가까운 후배들과 고향에 가보고 싶다 하시면서 무리하게 스케줄을 잡으셨습니다. 하지만 출발 전날 선생님의 병세가 좋지 않아 불가피하게 취소하게 되었지요. 그 와중에도 이메일을 보내셨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허물을 짓고 앉아 있게 됐는지, 용서를 빌 엄두조차 안 나네요. 천행을 얻어 남행길이 다시 허락되기를 빌어 볼 뿐. 이청준 합장.” 결국 천행을 얻지 못해 남행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영원한 남행길에 나서게 되었군요.

선생님께서는 1965년 등단작 <퇴원> 이후 본격적으로 소설이라는 ‘말의 꿈’을 꾸어 오셨습니다. 얼마 전 병실에서 선생님을 뵈었을 때, 결국 그게 마지막이 되었지만, 이제 퇴원하시면 다시 새로운 ‘퇴원’을 쓰실 수 있겠다고, 꼭 그러실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니까, 선생님께서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셨습니다. 새로운 퇴원기를 저희 몫으로 남겨두시고, 선생님께서는 인생이란 병원에서 퇴원하십니다. 이제 더 이상 당신을 부끄러워하시지도 말고 그저 자유로운 영혼의 비상학이 되셨으면 합니다. ‘선학동’에서 선생님께서 그토록 희구하셨던 선학들이 선생님 앞서 비상했습니다.

삼가 엎드려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예의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저를 용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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