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훈 전문기자의 사람그리고세상

중앙일보/ 2008.05.10 / 이만훈기자




↑한승원씨가 토굴 뒤편에 가꾼 죽로차밭에서 밤새 부쩍 자란 차순을 보며 햇차 만들 생각에 흐뭇해하고 있다. [사진=프리랜서 오종찬]

차인(茶人)들에게 요즘은 명절보다 더 귀히 여기는 대목 중의 대목이다. 햇차를 만들고 햇차를 맛볼 수 있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해서 요즘 남도(南道) 땅 어디를 가나 차나무의 햇순이 하늘하늘 신록을 피워 올리고, 그 곳엔 여지없이 차인들의 손길이 춤을 춘다.

정남진(正南津) 전남 장흥에 은거하며 글을 써오고 있는 소설가 한승원(69)선생도 알만한 이는 다 아는 ‘유명한’ 차인. 곡우를 닷새 넘겨 ‘다반사(茶飯事)’의 삶을 사는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그래서 즐겁고 향기롭다. 장흥 읍내서 길을 물어 종려나무가 열병하고 있는 국도 18호선을 따라 간다. 이윽고 그가 사는 안양면 율산리에 이르니 그가 자신의 호를 따 이름붙인 빨간 지붕의 아담한 한옥 ‘해산토굴(海山土窟)’이 저만치 언덕배기에서 객을 맞는다. 처마 끝에선 풍경이 주인장의 청정함을 알리고 뜨락엔 그림같이 어우러진 야생화들 사이로 차향이 일렁이고 있다. 수인사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서자 이번엔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이 그득한데 차를 내는 주인의 신수가 영락없는 선비다. 아니, 곱게 차려입은 한복 하며 칠십 객이면서도 잡티 하나 없이 해맑은 얼굴, 거기에다 수줍은 듯 소리 낮춰 조곤거리는 말 품새가 이미 신선이다. “지난해 부인과 함께 지은 농사”라며 내놓는 차의 맛이 일품이다. 포근하게 찻잔에 어린 연황색, 배릿한 향, 고소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

-도대체 차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생명의 물입니다. 미망을 걷어내고 참 지혜를 터득하게 하는 약초를 불가에선 ‘알가(Argha)’라고 하는데 이것이 곧 차나무를 일컫는 말이고, 그 여린 순(嫩)의 정기가 바로 차입니다.”

-왜 마십니까.

“다반사에 이유가 있습니까. 그냥 좋으니까 마시죠. 또 마시다보면 좋아지고….”

-뭐가 좋아진다는 말입니까.

“몸과 마음이 다 그렇다는 얘깁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이마다 나더러 해맑다고 하는데 이게 바로 차 덕분이죠. 식전에 차를 한 잔 하면 식욕이 생기고 식후에 하면 소화가 잘 됩니다. 여기에다 좋은 차의 향기를 마시면 누구라도 정신이 맑아지고 그윽해집니다.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음식이 어디 있습니까.”

-삼시 세끼 말고 어떤 때 마십니까.

“이태백은 흔들릴 때마다 술을 한 잔 한다 했지만 나는 흔들릴 때 차를 마십니다. 그러면 나의 존재의미가 분명해지곤 합니다. 탐욕이 생길 때, 마음이 붕 떠있을 때, 내가 낡아간다고 생각될 때, 뭔 일로 괜스레 슬퍼지고 우울해질 때 차를 마시면 그 증세에서 깨어집니다. 차는 깨달음 그 자체는 아니지만 깨달음을 낳는 자궁이 되거든요.”

-차가 깨달음을 준다?

“차는 두 가지 무기를 가지고 있어요. 그 하나는 탐욕과 오만과 분노와 시기질투와 복수심을 그치게 하는 것(止)이요, 다른 하나는 밝고 맑은 지혜로써 세상을 깊이 멀리 높게 뚫어보게 하는 것(觀)이죠. 그래서 술은 사람을 미망 속에 빠져들게 하지만 차는 사람을 깨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한낱 마시는 음료를 너무 현학적으로 미화하는 건 아닌가요.

“물론 맨눈으로만 보면 차 자체는 카페인과 몇 가지 무기질이 든 음료이겠죠. 하지만 세상만사 다 그렇듯이 무슨 일엔 다 의미가 있게 마련이고, 그 의미가 온전히 살아날 때 그 일이 제대로 가치를 발하게 마련입니다. 차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차가 지금까지 알 수없는 오랜 세월동안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차가 좋다는 얘기이고 거기엔 나름의 뜻이 숨어 있어 존재가치를 명확히 하고 있는 거죠.”

한 선생은 정말 차를 즐겨 마신다. 한 번에 다섯 번은 우려 마시니 끼니때마다 앞뒤로 마시는 걸 치면 서른 잔은 족히 될 것이고 수시로 다담(茶談)을 나누려 찾아오는 손님들과 마시는 것까지 치면 줄잡아 하루 사십여 잔은 될 터이다. 그는 글쓰기에 크게 방해가 되지 않는 한 웬만하면 손님을 맞는다. 그래서 이러 저러한 이들이 이따금씩 들러 차를 마시며 그의 고담준론을 듣고 그의 독실한 신도(?)가 되어 돌아가곤 한다. 그런데 이날은 객이란 게 자꾸 따지듯 물어대니 약간은 피곤한 기색이건만 내색 않고 에둘러 자꾸 차를 권한다. “차는 식으면 못쓰는 법이여-. 마시고 계속 합시다.” 그래서 또 한잔.

-차에 숨겨진 뜻이란?

“차에도 몸과 마음이 있습니다. 향기와 색깔과 맛이 몸이라면 마음은 차속에 들어 있는 우주적 순리입니다. 초의(草衣)선사는 이를 두고 다선일미(茶禪一味), 다선일체(茶禪一切)라 했어요. 차속에는 우주 시원(始原)의 참 진리가 들어 있는데 차를 마시면서 그것을 맛보지 않으면 안되는 거죠. 초의의 다선일미란 차를 마시면서 우주의 근원에 이르는 겁니다.”

-너무 어렵습니다.

“갓난애를 보면 누구나 생명의 신비를 느낍니다. 생명력 그 자체이니까요. 그래서 그 몸에서 나는 냄새는 정말 향기롭습니다. 배냇향이라는 건데 이게 생명력의 냄새입니다. 그런데 좋은 차에서 바로 이 향기가 난다 이겁니다. 그래서 차=알가=우주적 시원이란 등식이 성립되는 거죠. 차를 마시는 일은 곧 생명력을 회복하는 일이요 정신적으로는 우주적 시원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우주시원에 도달키 위한 것이 선인데 1700여 화두의 공통열쇠가 순리인 걸 보면 차를 마신다는 게 곧 순리를 회복하는 일, 다시 말해 삶의 고를 푸는 일인 겁니다.”

-좋은 차는 어떤 겁니까.

“처음 우렸을 때나 마지막 우렸을 때의 배릿한 향기와 맛이 한결같이 그윽하고 신비로운 차입니다. 나는 이런 차를 ‘꽃물차’라고 부르는데 차의 신명이 한껏 오른 것을 말합니다.”

-사람에 비유한다면?

“탐욕에 갇혀있는 사람은 질 나쁜 차처럼 발고린내 같은 구중중하고 흉측한 냄새가 나고, 반면 탐욕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에게선 질 좋은 차와 마찬가지로 배릿하고 고소한 향이 나게 마련입니다.”

-좋은 차를 마시면 향기가 난다는 겁니까, 아니면 향기가 나려면 좋은 차를 마셔야 한다는 겁니까.

“두 가지 모두입니다.”

허어, 이런 내공은 어디서 온 걸까? 한 선생은 서울에 살면서 마흔일곱에 비염 알레르기를 잡으려고 한약을 잘못 먹는 바람에 7년을 고생한 뒤 몸에 좋다는 얘길 듣고 차 마시기를 시작했다. 한 십년간 좋다는 차는 이것저것 다 마셔보고 나니 맛이 어렴풋이 보였다. 내친김에 건강을 챙길 겸 96년 고향인 이곳으로 귀향한 뒤 초의의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바탕으로 직접 차를 만들며 본격적인 차 공부에 매달렸다. 2004년엔 토굴 뒤란 600평 대나무 숲을 차밭으로 일궈 자가(自家) 차까지 만들고 있다.

-차 맛이 최곱니다.

“내 수제자인 마누라와 함께 만든 겁니다. 이젠 둘 다 어느 정도 선수가 됐습니다. 좋은 차가 되려면 뭐니 뭐니 해도 정성을 듬뿍 먹어야 합니다. 좋은 잎을 골라 따서 보통 아홉 번 많게는 열두 번 덖는데 자칫 한눈 팔면 그대로 망치고 마니까요. 차를 낼 때도 물이 너무 뜨겁거나 정도 이하로 차면 배릿한 향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죠. 입술을 댈 수 있을 정도가 가장 적당합니다.”

-차를 만드는 것 자체가 생명훼손은 아닙니까.

“모든 작물이 그렇듯이 차나무도 자신의 에너지로 인간을 순화시키는 것에 만족할 겁니다.”

-어떻게 우립니까.

“엄지와 검지, 중지로 가볍게 차를 집어 찻주전자에 넣고 처음 우릴 땐 80도, 두 번째부터는 90도 정도의 물을 부어 1~2분 뒤에 마시면 좋습니다. 커피잔에 차를 듬뿍 넣고 뜨거운 물을 따라 마시면 써서 마실 수 없고 몸에도 이롭지 않습니다.”

-몇 번까지 우릴 수 있습니까.

“아주 좋은 차는 열 번까지 우려 마셔도 됩니다. 대개의 경우 네 번째부터 단맛이 나는데 계속 우려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첫 번째 우린 것은 배릿한 향이 나는 십대의 맛이고 열 번째는 사바세상과 아미타 세상을 넘나드는 열반의 맛입니다.”

-요즘 다도(茶道)다 행다(行茶)다 해서 요란합니다.

“차는 편안하게 마시는 게 제일입니다. 물 흐르듯이 꽃피듯이(水流花開) 말입니다. 그런데 너무 형식만을 강조하는 차 마시기가 판을 쳐 걱정입니다. 오히려 차를 멀리하게 만드는 일이니까요.”

-그런 행위들도 어찌 보면 차를 보급시키기 위한 방편중 하나가 아닙니까.

“차를 통해 자유자재차를 가르쳐야 하는데 다도랍시고 새로운 굴레를 강요하는 건 안 될 일입니다.”

-차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결국 같은 맥락이 아닙니까.

“제대로 마시기 위해 본질을 알자는 얘기하고 형식을 과장해 강요하는 건 한참 다릅니다.”

-차를 커피와 비교한다면?

“커피가 동적이라면 차는 정적입니다. 차는 정적인 가운데 동적인 것을 품고 있습니다. 거친 움직임으로부터 돌아와 깊이 다소곳해진 여인네 가슴이라고나 할까요?”

묻는 자가 어리석어서일까? 얘기는 길어지고 더욱 진지해진다. 벌써 세 시간을 넘겼다. 자신을 ‘풋늙은이’라고 소개했지만 슬슬 미안해진다. 차도 몇 주전자를 비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차를 마시면 나라가 흥하고 술을 마시면 망한다는데 정말이냐”고 하자 “그 말을 한 다산선생도 암자 옆에서 살고 싶은데 반드시 주지가 곡차를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고 답한다. 오케이다. 그가 단골로 삼은 마을 아래 여다지해안가 횟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2회전이다. 선생은 포도주, 객은 쐬주-. 술이 술술, 얘기도 술술 넘어간다. 술을 마시면서도 차 얘기니 다담의 연속이다. 끽다거(喫茶去)는 “차 한 잔 하라”이지 “차 한 잔 하고 가라”가 아니라느니, 다신(茶神)의 ‘神’은 완성을 뜻하는 것인데 귀신으로 생각하는 건 토굴이라니 젓갈집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느니…등등. 두 시간여 지나자 선생의 얼굴엔 포도주 빛이 감돌고 객은 쐬주 빛이다. 자리를 일어서면서 선생이 석가의 열반게(涅槃偈)를 패러디해 한마디 한다. “나는 차를 마시지 않는다-.” 바닷바람이 삽상하니 향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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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은 다담을 즐기는 까닭에 손이 올 때마다 손수 차를 우려 대접한다.

한승원은

1939년 전남 장흥 출생으로 신화적인 작품들을 통해 생명력 넘치는 구도적이고 그윽한 문학세계를 추구해 온 소설가·시인이다.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고를 졸업한 뒤 1968년 대한일보에 ‘목선’이 당선돼 등단했다. ‘불의 딸’ ‘아제아제 바라아제’ ‘동학제’ 등 굵직한 작품으로 한국문학사에 뚜렷하고도 독특한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칠순을 코앞에 두고도 작가로서의 열정을 불태우며 ‘흑산도 하늘길’ ‘초의’ ‘꿈’ ‘멍텅구리배’ ‘화사’ ‘물보라’ 등의 작품을 꾸준히 내놓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초의’에 이어 ‘추사’, 그리고 ‘다산’(6월 중순 출간 예정) 등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차 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평소 차 살림을 하면서 느낀 소회를 주제로 한 차시(茶詩)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 통산 네번째인 시집 ‘달 긷는 집’을 곧 출간할 예정이다.

글=이만훈 전문기자, 사진=프리랜서 오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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